미술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관람자가 어느 정도 미술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된다. 그러나 공공(公共)의 공간에 놓인 미술작품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적대적일 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과 마주치게 된다. 대중과의 갈등을 빚은 유명한 예가 뉴욕 연방광장에 있던 리차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弧), Tilted Arc>다. 1989년 이 작품은 작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불평으로 결국은 철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후 작가나 작품중심이었던 공공미술의 논의를 이제까지 수동적인 위치에 있던 관람자 우선으로 옮겨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에서 공공미술의 최대의 후원단체인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of Arts)의 목표가 1970년대에는 우리시대 최고의 작가의 작품에 공공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는데 반해, 1993년에는 ‘구체적으로 공동체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으로 바뀐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공공미술은 누가, 누구를 위해 제작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부터 공공의 권리와 작가의 책임, 그리고 미술과 대중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최근 가장 논의가 활발한 것은 장소와 관람자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장소(place)는 물리적 지형을 가리키는 ‘사이트(site)'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장소’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로 가는 오늘날의 다문화(multicultural)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한 고장에서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외모와 문화가 판이한 다른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생활하게 되면서, 자신과는 다른 삶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공미술 작품들이 많아졌다. 한 장소에 세워진 공공미술에서 공공이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사람들, 예를 들면 그 지역의 소수민족인가, 작품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신문보도나 도록을 통해 경험한 사람들도 포함시키는 것인가? 공공미술의 성공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관심은 관람자, 공공의 개념, 공공미술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새로운 공공미술의 통로를 개발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88년,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미국 샌디에고의 슈퍼볼 개막식 날, 세 명의 작가들은 일반버스에 "미국 최고의 관광 플랜테이션(농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문구와 세 장의 사진으로 된 포스터를 부착했다. 플랜테이션은 예전에 흑인노예들이 일하던 목화 농장을 빗댄 것인데 이 문구는 "샌디에고는 미국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시의 공식 슬로건을 약간 바꾼 것이다. 사진은 경찰에 체포되는 불법 멕시코 이민의 손, 호텔 청소부의 손, 접시를 닦고 있는 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이 포스터는 미국의 번영이나 여유로움은 이들 불법 노동자들의 착취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포스터는 결국 철거되었으나 이미 신문이나 언론매체에서 크게 보도된 이후였다. 이것은 최근의 공공미술이 새로운 공공영역으로 등장한 언론이나 영화, 인터넷 등의 매체를 사회적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이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 1996년 폴란드 태생의 작가 우디츠코(Krzysztof Wodiczko)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수도 크라코우의 권위적인 시청건물 위에 여성이나 동성애 단체들과 협력하여 약물문제, 장애인들의 개인적인 경험 등을 다룬 비디오를 쏘았고 대형 스피커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였다.

이러한 최근의 공공미술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공공미술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공공의 공간에서의 미술' 또는 '새로운 공공미술'이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다. 미술이 사회적 치유와 역할에 적극 나서는 경향에 대해 이 부분은 미술가보다는 사회봉사자, 또는 인류학자의 영역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그러나 공공미술이 더 이상 시각적 대상으로만 재현되지 않으며, 공공미술가들은 다른 참여자와 협력하는 법, 관람자들을 개발하는 방법, 다른 분야와 교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공공미술이 더 이상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고고하게 독백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다양하고 폭 넓은 관람자들의 삶과 관계되는 문제들에 대해 대화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미술은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 자체는 미술의 오랜 전제였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