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기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976-1977, 캔버스에 유채, 250x190cm, 리움 삼성미술 관 소장


김기린의 색은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된다.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본질로 돌아간 화면의 색채는 그 순도 자체로 감각적인 요소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두텁게 축적된 깊이는 명상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화면 안에 형상이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사각형에서 그 어떤 공허함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부재를 통해 늘 보이지 않았던 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그 무엇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



2. 박서보, 묘법 NO.43-78-79-81, 마포천에 유채, 연필, 193.5 x 259.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작가의 쉼 없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화면 전체를 균질적으로 보이게 한 작품이다. 이 무위자연의 행위는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작가가 작품과 합일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한다. <묘법> 연작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변모하였다. 1970년대 묘법은 채색된 캔버스 위에 연필로 드로잉을 함으로써 표면으로의 환원을 보여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데, 물감으로 흠뻑 젖은 한지를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누르고, 상대적으로 밀려나간 한지의 연한 결들이 뭉쳐 선으로 돌출한다. 이처럼 창작과정에 정신성을 부여하고 꾸준한 자기연마를 예술로 승화시킨 박서보는 한국 단색화 고유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3. 윤형근,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86-29, 1986, 캔버스에 유채, 300x150cm x(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형근의 작품은 네모난 색면 속에 대담함과 단정함이 함축된 숭고미를 보여준다. 일회로 완결되지 않고 몇 차례 겹쳐지는 선들의 어울림에 의해 완성된 화면은 서로 스미고 배어나오면서 깊이와 평온을 더한다. 그는 생지의 캔버스 위에 직접 물감을 바르는데, 이는 천연 마포의 색을 그대로 살리고, 그 질감에 예민하게 침투하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한 번짐 효과를 위함이다. 이렇게 그려진 청색과 다색(황갈색)의 사각형으로 구성된 캔버스는 색면과 여백, 유한과 무한, 충만함과 허함이 동화된 자연의 음양 이치를 담아낸다.



4. 이동엽, 상황, 1972,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작가소장



이동엽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백색의 단색화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흰색은 자연이 환원된 색이며, 그로 인한 화면은 의식의 여백이자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1980년대부터 그는 <사이> 연작을 제작했다.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붓을 사용하여 흰색 바탕 위에 또 다시 흰색 선을 정교하게 닦아 나가듯이 붓질을 반복한다. 이와 같은 행위와 행위의 무수한 중첩에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겹침과 스며듦이 곧 작품이 된다. 이렇게 작가는 정신성의 구현을 위해 물질감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구도하듯이 무수한 붓질을 반복한다.



5. 이우환, 점으로부터, 1976, 캔버스에 안료, 117x11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우환의 작업세계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과 차별화되는 우리 고유의 동양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동양 최초의 자생적인 현대미술 운동인 모노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노하 시기와 국제적 실험미술의 과정을 거쳐 1970년대 중반 무렵 한국의 단색화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조응> 연작은 점과 선을 동양적인 기와 생명력의 근본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구현된 작업이다. 질서와 균형이 담겨 있는 점의 집합 상태나 선의 나열을 통해 시공간 속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화면에 움직임과 운율을 더한다. 궁극적으로 이우환이 추구하는 것은 조형적 결과물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선을 긋는 제작 과정에 내재된 본질적 의미의 발견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세계와 사물, 인간 간의 관계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6. 정상화, 무제_07-9-15,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x19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상화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단색의 평면 회화인 <무제> 연작을 작업해오고 있다. 화면 전체는 바둑판 모양의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네모꼴로 구성되어 있는데, 네모꼴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가 아크릴 물감으로 다시 메워 가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작품의 주요 제작 방식은 뜯어내기와 메우기이다. 이 같은 반복 행위에 의해 작가는 동양적 정신성으로의 접근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제작과정 그 자체가 곧 작품이다. 물질로서가 아닌 정서로서 물감의 스며듦을 보여주고, 명상의 세계로 이끌고자 함이다.



7. 하종현, 접합-7, 1982, 마포천에 유채, 120x22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종현은 올이 굵고 성긴 마포의 물질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마포의 뒷면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이 물감을 천의 앞면으로 밀어 넣는 독창적인 방식인 배압법(背押法)을 구현한다. 이렇게 해서 올 사이로 나온 물감을 다시 도구나 손을 사용하여 재구성한다. 기존의 회화적 관습을 버리고 제작한 <접합> 연작에서 눈 여겨 볼 부분이 바로 캔버스 표면에 알알이 맺힌 물감 알갱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감을 밀어내는 힘의 차이로 만들어진 우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얼룩 그리고 작가의 개입이 남긴 캔버스 표면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 독특한 미감을 전해준다.



8. 김춘수, 울트라-마린 1034, 2010, 캔버스에 유채, 200x200cm, 작가소장



김춘수에게 청색은 특별하다. 흰 바탕 위에 눈이 시리도록 푸른 청색을 칠하는 그의 작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푸른색은 하늘, 구름, 바다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여지를 제공한다. 바다 혹은 푸른색 저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는 <울트라-마린> 시리즈나 무언의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있는 <수상한 혀> 연작에는 이데아를 향한 작가의 태도가 투영되어 있다. 수직으로 긋거나 점을 찍거나 혹은 짧게 끊는터치와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점차 높아지는 밀도의 형광빛 푸른 세계는 생명의 원시적 에너지를 닮아 보고자 하는 이상향의 세계로 수렴되는 듯하다.



9. 김태호, 내재율 2011-44,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163x260cm, 작가 소장



김태호의 작품은 선과 면의 반복패턴으로 덮인 단색의 표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첫 눈에 보이는 하나의 색면 밑에는 중첩을 거듭한 여러 겹의 색층이 존재한다. 작가는 무수한 안료의 겹으로 이루어진 층을 만들고 난 후, 이것을 날카로운 칼로 다시 도려내는 과정을 반복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반복적으로 흐르는 무수한 선과 면, 그리고 그 사이로 깎여진 다색의 편린들은 화면의 긴장감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생성과 소멸의 이중적 구조를 드러낸다. 지층변화와도 같은 색층의 틈새는 마치 스스로를 비우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현존성을 확보하려는 듯하다.



10. 문범, 천천히, 같이, 천천히 #395, 패널에 아크릴릭 폴리아크릴 우레탄, 124x124x8cm, 작가소장



"인간은, 미술은 그 이름을 걸고 예전부터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이야기의 질서, 의미의 기승전결, 재현의 다양한 결과 등을 흠모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는, 사물들은 미술이 집요하게 던지는 판단과 분류의 촘촘한 그물 사이로 항상 매혹적으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절망과 그때마다 나타나는 유혹들이 나와 현대미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나의 미술은 오래 전부터 전혀 관계없는 다수의 공간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거나 죽어서 떠도는 영혼들의 날갯짓, 혹은 그 그림자들, 그것의 주름진 교차의 음계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예찬, 절절한 그리움 같은 망설임의 징후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밀려와 만들어내는 물거품의 유리알만큼이나 눈부신 무질서들 속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어떤 질서와 같이 출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소용이 없다. 나는 그곳에 도달하지를 못한다." - 작가의 글 중에서



11. 안정숙, 긴장 2008-A-2, 2008, 캔버스에 유채, 85x85x8cm, 작가_소장



안정숙은 인간관계의 갈등,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나는 대립과 충돌의 긴장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다. 수많은 인간관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는 갈등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데, 작가는 이것을 극복하여 공통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어떤 합일점을 찾고자 한다. 직선적인 사고방식의 문화가 있다면, 곡선적인 사고방식의 문화도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두 요소의 조화로운 만남과 자연스러운 관계로 평화롭게 화합시키는 것이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곡선은 정적인 캔버스 위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여 보이기도 하나 동시에 유기적인 관계로 서로를 지탱해주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유기적인 결합은 안으로는 마음의 평정을, 밖으로는 견고한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12. 이강소, <섬에서-07247>,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218.2 x 291cm, 작가 소장



이강소의 작품은 자유로운 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굵은 선, 빠른 필치의 붓놀림, 필선의 변화에서 오는 역동성을 담은 대담한 몇 개의 획만이 화면의 기조를 이룬다. 사물의 모습을 너무도 깊숙이 투영한 나머지 형태를 잃어버린 소재들이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닌 필선으로 환원된 까닭이다. 강한 스트로크와 검고 흐린 색들로 이어진 호방한 붓놀림 속에는 작가의 거친 숨소리가 잠겨 있고, 이는 기의 발현과도 같다. 묵직한 필선에서 배어나오는 기의 흐름은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슬픔이요 눈물이요 의지와 힘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가는 필선으로 경쾌한 리듬을 지닌 선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도 한다. - 김성희, <이강소>,마로니에북스, 2011, p. 104 수정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