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전 전시구성

「전시 구성」



I. 대구화단과 이인성

이인성 작품세계의 방향은 대구화단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대구 화단은 수채화로 처음 서양화를 시작한 초창기 근대 화단이었다. 대구 최초의 한국인 미술 모임이었던 영과회(1927-29)와, 향토회(1930-35)에 이인성은 정기적으로 출품을 하게 된다. 영과회는 일본의 탄압에 의해 해체되고 영과회 중 순수계열의 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향토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시기 스승 서동진과 향토회 결성에 영향을 미쳤던 김용준의 예술관, 그리고 절친했던 윤복진의 서정적 문학관은 이인성 예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인성은 서동진의 대구미술사에서 인쇄 및 도안을 하며 수채화를 배웠고 1929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를 출품하여 스승인 서동진과 나란히 입선하게 된다. 이렇게 대구화단을 통해 형성된 그의 예술관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II. 근대성의 인식

이인성은 1931년 말에서 1935년까지 일본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도쿄와 대구를 오가며 일본 전람회와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수채화와 유화로 기량을 쌓아간다. 당시 대구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계산동 성당 등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이러한 신식 건물, 세련된 실내, 정원 풍경은 이인성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는 빛과 색, 짧고 단속적인 붓질, 화면을 과감히 자르는 기법 등이 나타난다. 서구 및 일본 회화와의 영향관계는 이인성이 수집했던 200장이 넘는 그림 엽서와 도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화단의 영향으로 불투명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인성은 순도높은 원색을 사용하고 빨강과 녹색을 배치하여 강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후 이러한 색채는 상징적인 색채로 변모하게 된다.


III. 조선향토색의 구현

이인성은 조선향토색을 추구하였다. 조선 향토색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문학예술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즉 조선의 정조를 표현한 것으로 조선의 민속적인 소재들을 사용하거나 목가적인 자연과 삶을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당시 평론가들은 조선예술의 방향을 향토색에서 찾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1922-44)에서 향토색을 심사기준의 하나로 강조하면서 조선향토색론이 확산되게 된 배경도 있다.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 <해당화>(1944)는 향토적 소재를 사용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것들로 구성에 있어 인물과 풍경의 조화, 화면의 장식성이 서정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상징적인 화면을 만들고 잇다. 해석에 있어 많은 여지를 남기는 이런 작품들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색채의 강렬함은 사라지고 소재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IV. 인간, 자화상

이인성은 1945년 서울로 옮겨 미술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이 당시에 주로 주변의 인물이나 정물들을 그렸다. 이 시기 작품에는 이전의 강렬한 색채와 특징들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예리한 인물표현과 빠른 필치로 이인성의 진면목을 살펴보게 한다. 소품은 주로 목판 위에 제작되었는데 자화상에서는 삶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눈을 감고 있거나 가식 없는 담담한 모습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모습이며 한편으론 시대적 고민과 개인적인 상처가 읽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료평가를 거쳐 새로 발굴한 한국화 작품들이 출품되는데 이는 해방 후 우리미술의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수묵화를 중시했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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