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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람(1970-)은 1993년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1999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움직임과 서사를 가진 ‘기계생명체(anima-machine)’를 제작해 왔다. 그가 대학 시절 처음 시도한 ‘움직이는 조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움직이는 조각에 내재된 핵심은 생명체의 본질인 ‘움직임’과 문명을 움직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특히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기계생명체를 제작했는데 식물, 곤충, 동물처럼 살아 숨 쉬는 듯한 기계생명체를 만들고, 거기에 신화와 이야기를 곁들여 특유의 세계관을 창조했다. 최우람의 작품은 인공적 기계 메커니즘이 생명체처럼 완결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고, 동시에 생명의 의미와 살아있음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기술 발전과 진화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에 주목해 온 작가의 관점은 지난 30여 년간 사회적 맥락, 철학, 종교 등의 영역을 아우르며 인간 실존과 공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1998년 《문명∈숙주》(갤러리 보다), 2006년 《도시 에너지-MAM 프로젝트 004》(모리미술관, 도쿄), 2010년 《새로운 도시 종들》(프 리스트 시각예술 센터, 테네시), 2016년 《스틸 라이프》(대구미술관), 2022년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9년 《미메시 스의 정원 - 생명에 관한 테크놀로지 아트》(일민미술관), 《도시와 영상》(서울시립미술관), 2004년 부산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전》(리움미술관), 2006년 제6회 상하이 비엔날 레, 2021년 강원 국제 트리엔날레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원탁>은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4.5미터 지름의 원탁이 가장자리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상판의 기울기를 변화시킨다. 그 경사를 따라 둥근 머리의 형상이 이리저리 구른다. 그리고 종종 머리의 형상은 원탁에서 이탈하여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판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은 원탁 테두리 아래에 위치한 머리가 없는 18명의 지푸라기 몸체임을 알 수 있다.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몸체가 등으로 힘겹게 원탁을 밀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원탁 위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움직임 같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머리를 더 멀리 밀어내 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이러한 작품의 움직임은 하나의 머리를 두고 벌이는 치열하고 끝없는 경쟁의 현장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천천히 작품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이 싸움의 숨겨진 면을 보게 된다. 이 원판을 기울이는 힘은 가운데 있는 구동부의 작용일 뿐이며, 원탁 가장자리 아랫면을 따라 등허리가 고정된 지푸라기 몸체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고단한 움직임을 강요 받고 있다. 머리를 밀어내는 것인지, 하나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인지 알 수 없지만, 개체의 욕망과 상관없이 하나의 머리를 중심으로 한 투쟁이 강제된 시스템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원탁을 받치는 인간 몸체의 재료가 지푸라기라는 점은 논쟁의 실제 주제는 논박되지 않고 거짓 주제로 대체되는 ‘허수아비 공격 오류(straw man fallacy)’*와 연결된다. 이 경쟁 체제를 가동하는 핵심 원리는 가려진 채 지푸라기 몸체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는 <원탁>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눈이 먼 정치인들의 모습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경쟁 체제의 굴레에 놓인 우리의 모습까지 반영하고 있다.
*허수아비 공격 오류 (straw man fallacy): 논증 오류 중 하나로, 상대방의 입장을 곡해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형식적 오류이다. 상대방의 입장과 피상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사실은 비동등한 명제(즉, "허수아비")를 만들어 상대방의 입장을 대체하여 환상을 만들어 내고, 그 환상을 반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