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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문화 프로그램> 관람객들이 채워나간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

<문화 프로그램> 관람객들이 채워나간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1’

 

‘지난겨울, ‘빨간빛’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를 온통 물들였다.
반투명의 빨간 유리창, 할머니 사진 영상이 붉게 투사되는 ‘빨간 벽’으로 이뤄진 임흥순 작가의 설치작품 <할머니가 구한 나라>가 있는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작가와 함께 ‘빨간 실’ 뜨개질을 이어간 것이다.
관람객들은 ‘미술관에서의 뜨개질’이라는 생소하고 낯선 ‘노작(勞作)’을 경험하며, ‘세상을 떠난 후,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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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받은 털실 물품으로 이어진 떠남, 그리고 남겨짐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지난해 12월 27일 ‘문화가 있는 날’을 맞아 모든 관람객을 대상으로 전시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을 30일까지 개최했다. 임흥순 작가 작품의 화두인 ‘한국 근현대사에서 희생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한 이 행사에서는 뜨개 워크숍과 퍼포먼스, 아코디언 퍼포먼스를 통해 관람객과 함께 전시 주제를 공유했다. 프로그램에 앞서 미술관은 20일부터 26일까지 관람객에게 털실 혹은 털실로 구성된 물품을 기부받았다.

 

본 프로그램인 뜨개 퍼포먼스는 27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됐다. 아직 주인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 뜨개치마, 뜨개 숄, 뜨다 만 뜨개 조각과 털실 뭉치 등 김동일 할머니의 뜨개 유품 19점은 관람객의 뜨개 조각과 연결되기 위해 한 올, 한 올 풀어졌다. 할머니의 소품뿐 아니라 사전에 수집된 관람객의 니트, 털모자 등도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빨간 실’과 교차됐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번 퍼포먼스의 주제로 왜 뜨개질을 선택했을까?

 

<문화 프로그램> 관람객들이 채워나간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2

<문화 프로그램> 관람객들이 채워나간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3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로 일본에서 살다 생을 마감한 김동일(1932~2017) 할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겨난 상처와 트라우마를 뜨개질로 극복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4명의 여성(정정화, 김동일, 고계연, 이정숙)들은 국가와 역사로 인해 발생한 이유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온 시대의 희생자이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흩뿌려진 할머니들의 부서진 시간이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반복적인 뜨개질을 통해 복원되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인의 다양한 경험과 체험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는 임흥순 전시 담론을 관람객 참여를 통해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문화프로그램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은 참여예술에 예술교육방법론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감상·비평의 접근법을 선보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관람객이 단순히 감상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작품의 참여자가 되고 작가는 공동창작자가 되는 것으로, 누구나 ‘창작’하고 ‘공유’하며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예술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떠난 후 무엇을 남길 것인가?

 

퍼포먼스에서 뜨개 조각은 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의 삶과 오늘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당신은 세상을 떠난 후,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행사에 참여한 관객들은 “나의 인생 안에 할머니의 인생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당신의 삶의 모습을 느끼고 가는 것처럼 나의 죽음 뒤에도 누군가 나의 물건을 만지며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김동일 할머니를 만났고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추억 속의 나’라고 썼고, 또 다른 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라고 남겼다.

 

<문화 프로그램> 관람객들이 채워나간 ‘떠난 후, 남겨진 것들의 시간’4

 

오늘날 ‘김동일 할머니’ 탈북여성과 함께한 아코디언 퍼포먼스

 

한편, 27일부터 29일까지는 뜨개 워크숍 및 아코디언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되고 소외된 여성과 함께하는 뜨개 워크숍 및 아코디언퍼포먼스로 남, 북 어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음악을 아코디언 퍼포먼스 표현했다. 뜨개질과 아코디언 감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후 자신이 남길 것을 적어 보는 워크숍이었다.

전시에 등장하는 4명의 할머니 외에 이번 프로젝트에는 또 다른 3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각각 탈북 17년, 8년, 4년 차에 접어든 북한이탈여성이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한 오늘날 또 다른 ‘김동일 할머니’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평범한 뜨개강사와 아코디언 연주자로 관람객에게 소개되었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음악을 연주하고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뜨개질을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어떤 이도 이들의 고향을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람객과 이 여성들은 남과 북에서 모두 불리는 ‘임진강’, ‘사의 찬미(死의 讚美)’를 들으며 시대와 역사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한편, 30일 마지막 날까지 뜨개질 퍼포먼스는 이어졌다. 앞선 사람이 뜨고 난 빨간 뜨개 조각은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지속되고 남기고 간 조각은 또 다른 이에 의해 다시 이어져 ‘빨간 벽’ 아래 하나, 둘 쌓여 거대한 ‘빨간’ 뜨개 작품으로 집적되어 갔다. 새로운 삶의 의미와 순환하는 인생의 무게는 손에서 손으로, 털실 짜임과 꼬임으로 전해졌다. 당신은 세상을 떠난 후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사진제공: 이현민 / 원문: 국립현대미술관 에듀케이터 조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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