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2019.05.158612

한국 추상미술의 빛,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박서보, <묘법(描法) No.071208>(2007)

박서보, <묘법(描法) No.071208>(2007)

전시정보<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MMCA서울 1·2 전시실 및 복도 공간, 2019.05.18~09.01

박서보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지속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조형언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예술가다.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에서는 그의 삶과 화업을
총 160여점에 이르는 작품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살펴보고
오직 MMCA에서만 볼 수 있는 신작 3점과 미공개작 11점을 최초 공개한다.

반세기를 넘는 실험정신, 박서보에 대하여

국립현대미술관은 대규모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을 5월 18일부터 9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1931~)는 평생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으며 행정가, 교육자로서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고 국내외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6.25전쟁을 겪고 정신적 고뇌를 겪으며 여러 예술적 시도를 했던 그는 한국미술의 전위적인 흐름을 이끌며 기성 화단에 도전했고, <회화(繪畵) No.1-57>을 발표하며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물질과 추상의 관계와 의미를 고찰하며 이른바 ‘원형질’, ‘유전질’ 시기를 거쳐 ‘묘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그 중심에서 역할하고 있다.
*앵포르멜 미술: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박서보, <회화(繪畵) No.1-57>(1957) 
이 작품은 1950년대 당시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잔해에 철근이 뒤엉킨 광경에서 영감을 받은 후 에나멜을 숫돌로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 색을 뿌리기를 반복하여 제작했다

박서보, <회화(繪畵) No.1-57>(1957)
이 작품은 1950년대 당시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잔해에 철근이 뒤엉킨 광경에서 영감을 받은 후
에나멜을 숫돌로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 색을 뿌리기를 반복하여 제작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마치 수행자처럼 예술에 정진했던 화가로서의 70년 업적을 은유한다. 과연 어떤 작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을지 미리 들여다보자.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박서보의 일생을 따라 걷다

박서보, <원형질(原形質) No.1-62>(1962) 박서보, <원형질(原形質) No.1-62>(1962) 박서보, <유전질(遺傳質) No.2-68>(1968) 박서보, <유전질(遺傳質) No.2-68>(1968)

예술가의 감정을 다양한 재료와 물성으로 표현하다, <원형질(原形質) No.1-62>
1950년대에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불안과 부정적인 정서를 표출했던 박서보는 이후 한국사회에 배어있던 전쟁의 상처가 가라앉아 점차 다채로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는 1961년 파리에 체류할 당시 다양한 재료와 물성(물질이 가진 특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서구 작가들의 작업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쓰레기통 속의 부서진 기계 부속, 옷가지 등을 주워 꿰매 붙인 후 페인팅하는 즉물적인 작업을 선보이게 된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삶과 죽음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기 위해 <원형질(原形質) No.1-62>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이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되며 큰 호평을 받는다.

기하학적 추상과 한국 전통 색감을 사용하다, <유전질(遺傳質) No.2-68>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실험을 거듭했다. 전통문화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서 오방색을 활용하고,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옵아트* 등의 영향 아래 기하학적 추상과 대중적 이미지를 담은 ‘유전질’ 연작을 선보이게 된다. 이전에 비해 원색이 두드러지고 색의 대비가 강조되는 패턴이 반복되며, 단순화되고 정제된 화면 속에서 한국적인 색감을 발현하여 전통사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아울러 달 착륙과 무중력 상태에 영감을 받은 <허상> 연작이 재현된다. 박서보는 1969년 인류의 달 착륙을 계기로 무중력에 관심을 갖고, 스프레이의 원리가 무중력 상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으로 스프레이 분사법을 제작 과정에 사용했다. 그는 이 기법으로 어딘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인체 형상의 설치 작품을 제작한 뒤 오사카 <엑스포(Expo)'70> 한국관에 출품했다. 하지만 당시 반정부성향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정부세력에 의해 전시 도중 철거됐는데, 이 사건 이후 선보인 적 없던 <허상> 연작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옵아트 : 1960년대 미술 경향으로, 기하학적 형태 등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

박서보, <허의 공간>(2019 재제작)

박서보, <허의 공간>(2019 재제작)

철학적 차원에서의 작업…‘묘법’을 통해 예술을 수행의 경지로 끌어올리다

박서보, <묘법(描法) No.6-67>(1967) 박서보, <묘법(描法) No.6-67>(1967)


박서보, <묘법(描法) No.01-77>(1977)
작가가 파리를 여행하던 중 영감을 받아 앞방 투숙객이 버린 신문지를 주워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연필로 묘법을 시도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된다 박서보, <묘법(描法) No.01-77>(1977)
작가가 파리를 여행하던 중 영감을 받아 앞방 투숙객이 버린 신문지를 주워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연필로 묘법을 시도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된다

‘유전질’ 시리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 어휘를 찾지 못한 박서보는 또다시 작업 방식을 고민한다. 그는 한국의 미학을 비움의 미학으로 정립하고 이를 그려내고자 고심하던 중 어린 아들이 글씨를 썼다 지우는 모습을 보고 초기 묘법인 ‘연필묘법’을 착안하게 된다. 이는 캔버스에 유백색의 밑칠을 하고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수없이 반복해 선을 그어가는 작업을 말한다. 이 기법으로 제작된 <묘법(描法) No.6-67>은 새로운 무언가를 그려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비워낸 데서 시작한 ‘체념의 미학’을 표현한 그림 중 하나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물성과 정신성 그리고 작가의 행위를 합일에 이르게 했다.

박서보, <묘법(描法) No.931215>(1993) 박서보, <묘법(描法) No.931215>(1993) 박서보, <묘법(描法) No.870907>(1987) 박서보, <묘법(描法) No.870907>(1987)

더 나아가 그는 1982년에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하며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지가 마르기 전에 문지르거나, 긁는 행위를 반복하는 ‘지그재그 묘법’을 선보인다. 무채색의 연필묘법에서 쑥과 담배 등을 우려낸 색을 활용하며 다시 색을 회복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표작품인 <묘법(描法) No.870907>은 한지를 직접 긁고 문지르며 방향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 작품을 위해 24시간을 연속해서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박서보, <묘법(描法) No.070405>(2007) 박서보, <묘법(描法) No.070405>(2007) 박서보, <묘법(描法) No.071014>(2007) 박서보, <묘법(描法) No.071014>(2007)

박서보는 1990년대 중반, 묘법에서 손가락의 흔적을 제거하며 또다시 변화를 시도한다. 막대기 같은 도구를 이용해 한지를 밀어냄으로써, 화면에 고랑처럼 파인 면들을 만들어내는 ‘색채 묘법’을 선보인 것이다. 흑백의 화면으로 되돌아갔던 그의 작품은 2000년대 초 단풍 절정기의 풍경을 경험한 후 중첩된 색면의 오묘함을 내포하며 더욱 다채로워진다. 동시에 예술도 자연처럼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굳혔다. 작가는 색채 묘법과 공고해진 자신의 신념을 결합해 작업에 몰두했고, 가을 노을과 단풍이 물들어가는 색감에서 영감을 얻어 <묘법(描法) No.070405>를 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 박서보 (좌)<Ecriture No. 190227>(2019)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 <묘법(描法) No. 190411>(2019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2점.
박서보 (좌)<Ecriture No. 190227>(2019) (우)<묘법(描法) No. 190411>(2019)

이번 전시는 수많은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박서보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행사>(5월 31일)와 작가를 초청하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작가와의 대화>(7월 5일 예정) 등이 개최된다. 또한 전시 기간 내내 박서보의 묘법을 직접 표현해보는 관객 참여 프로그램 <마음쓰기> 등도 마련된다.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은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족적을 남긴 그의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여행하며, 당신 안에서 움트고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해보길 바란다.

MMCA 뉴스레터 구독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