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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13043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로운 전시 들여다보기: 물성, 묘법, 사회참여 예술운동

1. 곽인식, <작품 63>(1963)  /  2.박서보, <묘법(描法) No.190227>(2019)  /  3. 박서보, <묘법(描法) No.080618>(2008)  /  4. 아스거 욘, <무제(미완의 형태 파괴)>(1962)

1. 곽인식, <작품 63>(1963) / 2.박서보, <묘법(描法) No.190227>(2019)
3. 박서보, <묘법(描法) No.080618>(2008) / 4. 아스거 욘, <무제(미완의 형태 파괴)>(1962)

평소 미술관을 즐겨 찾는 관람객이라도
예술가들의 고유한 특성과 그 작품세계를 단번에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전시
<탄생 100주년 기념-곽인식>,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전을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도록, 작품 감상 돋보기를 준비했다.

곽인식이 다룬 일상 속 ‘물성’에 대하여
<탄생 100주년 기념-곽인식>,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06.13~2019.09.15

곽인식, <작품65-6-2>(1965) 곽인식, <작품 No.11>(1976) 곽인식, <작품 85-2-2>(1985)
곽인식, <작품65-6-2>(1965)·<작품 No.11>(1976)·<작품 85-2-2>(1985)

곽인식은 사물과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며 선구적인 작업을 한 작가로, 그의 회고전 <곽인식> 전이 6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되고 있다. 작가는 유리, 놋쇠, 돌, 종이 등 다양한 사물을 관찰하고 생애를 바쳐 물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업한 예술가였다. 또 한편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한국 작가들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지적인 스승이자 선배였으며, 사회의 일원으로써 시대의 아픔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작가가 비록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으나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 ‘봉합’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기 곽인식은 남북통일 활동에도 앞장섰다. <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문화제>(1961)에 참여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계열의 미술가협회가 연합한 <연립미술전>(1961)을 기획하기도 했다. 곽인식은 일본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가운데 한국의 미술계와의 교류도 활발히 했다. 1968년 동경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하고, 196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인 화가로 참가했다.

하지만 ‘곽인식’을 처음 마주하는 관람객이라면 전시실에 놓인 ‘유리 파편’과 ‘돌’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당황하거나, 그 너머의 세계를 살피지 못할 수 있다. 그는 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을 포착하게 되었을까. 먼저, 곽인식에게 유리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서도 다가가기 힘든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작가는 돌에 대해서 “인간에게 친숙하면서도 밉살스러울 만큼 예뻐서 보석보다 더 보석다운 존재이기에 이 소재에 끌렸다”고 기록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 한 번에 뚝딱 만들어 내지 않고 재료와 오래 함께했다. ‘유리와의 만남이 나의 생활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라고 할 만큼 말이다. 아울러 그가 즐겨 탐구한 놋쇠, 종이 등의 소재 역시 우리들의 생활과 관계가 깊은 사물이다. 곽인식은 놋쇠에 대해 “친근감이 들어 좋아하는 소재들 중 하나다. 그리고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작가는 인간과 깊은 유대를 가진 사물들을 탐구하고 관찰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따라서 곽인식의 작품을 들여다 볼 때는 당신의 일상 속 소재들이 미술 안에서 어떤 특별함을 선보이고 있는지 확인하며 작품을 감상하길 추천한다.

박서보의 70년 화업 인생, 그에게 깨달음을 준 묘법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05.18~2019.09.01

박서보, <묘법(描法) No.01-77>(1977) 박서보, <묘법(描法) No.931215>(1993) 박서보, <묘법(描法) No.070405>(2007)
박서보, <묘법(描法) No.01-77>(1977)·<묘법(描法) No.931215>(1993)·<묘법(描法) No.070405>(2007)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한국 현대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박서보. 그를 회고하는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이 5월 18일부터 9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다.

박서보는 평생에 걸쳐 예술을 탐색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57년에는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았으며 1960년대에는 생명을 향한 에너지를 화폭에 담아냈다.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에는 당시 서구의 흐름을 수용하되 기하학적 추상과 대중적 이미지, 한국 고유의 색감을 사용하며 여러 회화적 시도를 감행했다. 그리고 자신을 쏟아내며 채웠던 과거의 화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며 자기만의 조형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연필 묘법’을 통해 무엇을 그려내야 한다는 의지가 아닌, 체념과 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비워냄’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원래 묘법이라는 단어는 ‘그리는 법’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어 캔버스에 유백색 물감을 칠하고 연필로 긋기를 반복하며 마치 수행자처럼 정진했다. 그리고 초기 묘법을 ‘회화 행위의 무(無)목적성, 반복성이 이뤄낸 결과물’이라고 명명했다. 리듬을 타면서 자신을 비우고, 그리는 과정에서 물성과 정신성 그리고 작가의 행위가 합일에 이르게 되는 수신 과정의 도구라고 본 것이다.

1980년대는 중기 묘법 시기로, 무채색의 연필묘법에서 다시 색을 회복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 <묘법(描法) No.133-83>(1983)을 살펴보면 마포에 유채와 연필을 사용하거나, 닥종이에 수성물감과 연필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업은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지가 채 마르기 전에 문지르거나 긁는 등 반복되는 행위가 강조된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자유로운 방향성이 두드러져 지그재그 묘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무수한 필선에서 다시 회화성을 회복하고자 한지 위에 쑥과 담배를 우려내는 등 자연의 색을 담아냈다.

1990년대 중반, 그는 화면에서 손의 흔적을 제거하며 묘법에 변화를 시도했다. 색채묘법이라고도 불리는 묘법의 후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작가는 한지를 막대기나 자와 같은 도구를 이용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밀어내면서 화면에 길고 도드라진 선과 고랑처럼 파인 면들을 만들어 낸다. 2000년대 초반, 작가는 단풍 절정기의 풍경을 보고 자연 속에서 강렬한 치유의 경험을 느꼈다. 이를 통해 ‘자연이 그러하듯 예술이 흡인지처럼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박서보 작가의 회화에 대한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렇듯 도전과 변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박서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 그가 지나온 화업 인생을 여행할 준비를 해보자.

북유럽 작가 아스거 욘의 사회참여 예술운동이란?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04.12~2019.09.08

아스거 욘, <남성적 저항>(1953) 아스거 욘, <세속의 마리아>(1960) 아스거 욘, <무제 (데콜라쥬)>(1964)
아스거 욘, <남성적 저항>(1953)·<세속의 마리아>(1960)·<무제 (데콜라쥬)>(1964)

<대안적 언어 –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전은 4월 12일부터 9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다. 북유럽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인 아스거 욘은 늘 새로움을 탐색했던 예술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사회 구조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예술에 대한 정치적이고 대안적인 시각을 추구했던 태도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더욱이 욘은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예술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루고자 대중의 통념과 사회적 구조에 지속적으로 도전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도 보다 비약적인 변화를 이룬다.

이는 그가 몸담았던 ‘코브라’,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스칸디나비아 비교 반달리즘 연구소’ 등 예술 그룹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스거 욘은 1948년에 5명의 동료와 함께 코브라COBRA) 그룹을 설립했다. 이 명칭은 각 작가들이 활동했던 3개의 도시인 코펜하겐(CO), 브뤼셀(BR), 암스테르담(A)에서 가져왔다. 이 그룹은 공동작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추구했다. 이를 통해 욘은 예술의 국제적 연대와 창의성에 바탕을 둔 대안적 문화를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이후 1957년, 아스거 욘은 초기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들과 함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라는 혁명적인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 대한 예술적, 이론적인 비평을 실천함과 동시에 예술의 상업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상황주의자들은 예술적으로 ‘여러 상황’을 재미있게 연출하며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1961년 가을, 욘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을 떠나 ‘스칸디나비아 비교 반달리즘 연구소’를 설립하고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스칸디나비아 예술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전통을 연구했다. 북유럽 전통 연구를 통해 지배적인 남유럽 고전 문화를 해체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이해를 제안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특히 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간이 있다. 바로, 그가 1964년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으나 거부하고 대중으로부터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서신인 ‘구겐하임 텔레그램’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이 서신에는 ‘이 상금을 가지고 당신은(구겐하임 어워드 담당자) 지옥에나 가라. 나는 상을 받지 않겠다’라는 직설적 표현이 적혀있다. 이를 통해 기존의 미술 제도와 문화 권력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태도와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아스거 욘이 예술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루고자 했던 행동들은 작품을 보다 급진적으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가 작품 바깥에서 펼쳤던 활동을 알고 전시를 본다면, 이전과는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구겐하임 어워드: 현 구겐하임 펠로우십, 세계적인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학자나 예술가를 선정해 수여하는 상

가끔 현대미술은 어렵거나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편견을 버리고 살짝 다가가 마음을 연다면 그 어떤 공식이나 규칙 없이 작품 자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보자. 미술관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예술의 시작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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