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2019.08.304295

자유로운 예술혼 <김순기: 게으른 구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에 설치된 김순기 작가의 작품 전경 모습

김순기, <조형상황 III – 보르도의 10월>(1973)

전시정보 <김순기: 게으른 구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08.31~2020.01.27

프랑스를 중심으로, 온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며
새로운 미술 언어를 실험해온 김순기와 국립현대미술관이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순기: 게으른 구름>을 통해
‘일상과 실천으로서의 예술세계’를 추구한
김순기의 작품 200여 점을 총망라하고
<시간과 공간 2019> 등 신작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다양한 매체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온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김순기 작가
김순기 작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순기: 게으른 구름> 전을 2019년 8월 31일부터 2020년 1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김순기의 삶과 예술, 자연이 조화된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그의 작품 설명에 앞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 김순기에 대해 탐구해 본다.

어린 시절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겠다는 꿈을 키웠던 김순기(1946~)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1년에 니스에 위치한 국제예술교류센터의 초청작가로 발탁되어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는 타국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며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편입했으며, 1972년에는 전국 미술대학 우수졸업생 36인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후 1974년 마르세유 고등미술학교에 임용되었으며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김순기: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김순기: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김순기: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보수적인 파리 미술계와 달리 김순기가 교수로 지냈던 니스와 그 주변 지역은 젊은 작가들에게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제공하면서 새롭고 실험적인 미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에 김순기는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는데, <조형상황 III – 보르도의 10월>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1973년 10월 김순기는 미술대학생 및 작가, 일반인들과 함께 연이나 대형 풍선을 만들어 해변에서 바람에 날리고 그 장면을 영상 담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직접 촬영하지 않고, 작품에 참여한 일반인들에게 카메라를 맡겨 자유롭게 찍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이란 캔버스 내에서 작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김순기 미술제> 컨퍼런스 장면<김순기 미술제> 컨퍼런스 장면

이후 그는 1975년 서울 미국문화원에서 <김순기 미술제>라는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전시명을 ‘전람회’가 아닌 ‘미술제’라고 쓴 것과 이때 선보인 프로그램은 시대를 넘어서는 시도로 회자된다. 미술을 회화 혹은 시각 예술로만 바라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작품 슬라이드와 영화를 상영하고, 관람객과 미술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김순기의 행보가 파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들판의 흙을 파서 옆에 쌓았다가 다시 그 구덩이를 메우고, 실뜨기를 하는 등 자연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상적인 행위에 기반을 둔 퍼포먼스 작품은 1960년대 이후 비물질적인 미술을 추구했던 세계적 사조와 궤를 같이한 것으로, 한국 미술계에서는 매우 앞선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대가 존 케이지,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와의 교류

김순기와 미국 작곡가로 유명한 존 케이지(1912~1992)와의 인연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시작됐다. 김순기가 1977년 프랑스 한 수도원에서 <존 케이지와 함께하는 페스티벌>에 갔다가 세미나를 들으며 예술적 교감을 나눴고,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된 것이다. 이후 뉴욕으로 간 존 케이지는 백남준에게 ‘꼭 만나봐야 할 한국 여성이 있다’고 말하며 김순기를 소개했다. 존 케이지가 다리를 놔준 이후 김순기는 백남준의 아뜰리에로 가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퍼포먼스를 하는 등 지속적으로 만남을 유지했다.

그밖에도 김순기와 존 케이지가 함께한 일화는 너무나도 많다. 1986년, 김순기는 마르세유에서 연 페스티벌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에 존 케이지를 초대했고, 그는 매니저 몰래 행사에 참여해 김순기의 생일인 7월 5일에 맞춰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퍼포먼스란 마르셀 뒤샹의 일기에서 나온 텍스트를 웅얼거리며 낭독한 것이었는데, 세계적인 대가의 작품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렇지만 존 케이지가 선보인 이 ‘언어화되지 않은 음성’은 소리와 공연장에서 발생한 소음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듣는 이의 귀를 기울이게 했다. 이렇듯 인위적인 행위를 최대한 지양하는 예술관은 존 케이지와 김순기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김순기,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중 존 케이지 콘서트 (1986)김순기,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중 존 케이지 콘서트 (1986)

정의 내려지지 않는 예술가 김순기의 ‘게으른 구름’에 대하여

이제까지 김순기의 행보를 살폈다면, 지금부터는 그와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김순기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예술가이다. 멀티미디어 작품이나 퍼포먼스를 기획할 때에는 과학자들의 실험에서처럼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구상해나가는가 하면, 순간과 우연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작업들도 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남긴 여러 드로잉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Vide&O> 작품과 관련해서는 전체 느낌을 담은 회화적인 드로잉과 마치 엔지니어의 도면처럼 수치와 비례를 정밀하게 표기한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제목 ‘Vide&O’는 영어 단어 뜻 그대로 비디오를 나타내고 프랑스어로는 ‘비어 있는’과 ‘물’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에는 우연에서 발생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김순기는 얼음으로 모니터 모양의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 모니터의 프레임과 내부가 서로 다른 속도로 녹아내릴 수 있도록 수차례 연구와 실험을 계속했다. 마침내 방법을 찾아 제작을 의뢰했는데, 얼음 공장 직원이 ‘비디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실수로 ‘빈 물’이라고 표기해 버렸다. 평소 언어 게임을 즐겨 하는 작가는 실수로 생겨난 이 단어가 ‘영상을 보여주면서도 비어있는 모니터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했고 아예 작품 제목을 <Vide&O>로 명명했다.

김순기, <Vide&O>를 위한 드로잉(1987) 김순기, <Vide&O>를 위한 드로잉(1987) 김순기, <O.O.O.>(1989) 김순기, <O.O.O.>(1989) 김순기, <빛의 길>(1998) 김순기, <빛의 길>(1998)

또한 그의 작업 세계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거침없이 가로지를 정도로 방대하지만, 그 모든 행위와 실천은 자연과 사물의 본 모습을 담아내려는 태도 하나로 수렴되기도 한다. <빛의 길>이라는 작품 역시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미학적 태도를 반영한다. 이 작품은 빛의 양에 따라서 결과가 바뀌게 되는 핀홀 카메라를 이용해 작업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순기는 특별한 풍광을 포착하려 애쓰지도, 유명 사진가처럼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의미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모든 순간이 결정적이며 동시에 영원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번 전시명 ‘게으른 구름’과도 맞닿아있다. <게으른 구름>은 김순기가 쓴 동명의 시(時) 제목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의 의미와 삶의 모습을 은유한다. 그에게 게으름이란 타자에 의해 규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삶의 매분 매초가 결정적 순간임을 긍정하며 사유하고 행동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순기는 요즘도 텃밭을 일구며 독서를 하고 붓글씨를 쓰는 일상의 모든 행위를 통해 예술이 매일 각자의 순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삶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예술가이자 시인, 연구자 김순기가 평생 탐색해온 ‘일상과 실천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해외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김순기 작가의 진면목을 이 기회를 통해 발견하길 바란다.

MMCA 뉴스레터 구독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