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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13372

“나에게 예술은 여행과도 같다” 김순기 작가를 만나다

김순기 작가

김순기 작가

김순기는 1971년 도불한 뒤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동·서양의 철학, 시간과 공간 개념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영상과 설치, 드로잉과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형화될 수 없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고찰해왔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
<김순기 : 게으른 구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8월 31일부터 2020년 1월 27일까지 개최되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기 전, 예술가이자 시인, 연구자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1971년 프랑스 니스의 국제예술교류센터 초청작가로 선발돼 도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세계무대로 나간다는 설렘이 컸겠지만, 먼 타국으로 떠나며 고민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공부방 뒤에는 세계 지도가 붙어있기도 했고, 현대 미술의 중심지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 미리 불어를 배우기도 했죠.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늘 소망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져 너무 좋았어요. 당시 프랑스 예술계는 아카데믹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의 니스로 가겠다고 한 것도 나였어요. 내가 원하던 것이었고,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Q. 1975년, 서울에서 처음 열린 <김순기 미술제>라는 개인전을 통해 시대를 앞서 나가는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그저 관람만 하는 전람회가 아닌 미술 영상 전시와 토론, 상영회 등이 합쳐진 ‘미술제’를 선보인 것이죠.
이런 행보를 펼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김응수 감독

김순기 작가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그림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아방가르드 작업을 해왔어요. 프랑스에 가서도 그 작업을 쭉 이어갔고, 설치나 영화도 제작했기에 한국에서 내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죠. 그런데 당시에는 서울에 전위 예술 전시회를 할 공간이 없었어요. 그러다 미국문화원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됐는데, 당시에 전시회 제목으로 많이 쓰이던 ‘전람회’라는 용어 대신 ‘미술제’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했어요. 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전람회는 시각적으로만 감상하는 관람의 성격을 갖는 단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매일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작품 슬라이드와 영화를 상영했고, 9월 13일부터 16일까지 “여러분과 함께 이 미술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토론회를 가질 것이므로,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아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지만, 많은 분이 와서 즐겨주었고 특히 한국에서 아방가르드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오셨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미국문화원 전시 공간뿐 아니라 건물 밖 길거리에도 작품들을 전시해놨어요. 바로 <조형상황Ⅰ>이라는 소리 작품인데,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나와서 그 작품을 가져가 버리지 뭐예요. 아마도 많은 사람이 몰린 내 미술제를 보고, 내가 정치적으로 문제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나는 밤을 새워서 작품을 다시 만들어 내걸었고,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은 그 작품을 또 거둬갔어요. 그러면 다시 언니와 동생, 그밖에 지인들을 불러 모아 하룻밤 사이에 또 작품을 만들어 내걸기를 반복했죠.(웃음)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야단을 쳤는데, 하나도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작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물질적으로 남기는 작품보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순간성이나 상황에 더 관심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더불어 비디오와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외삼촌이 사진과 영화를 하시던 분이었는데, 어린 시절, 삼촌이 만든 작품들을 본 것이 굉장히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리고 프랑스에 갔을 때 빛으로 하는 비물질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고, ‘아 그러면 비디오 작업을 해야겠다’ 싶었죠. 하지만 1970년대에는 비디오 촬영 장비가 워낙 고가라 작업을 자주 하지는 못했어요. 1973년도에 카메라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모나코 시 관계자에게 부탁해 장비를 빌렸죠.

그때 만든 작품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조형상황Ⅱ>였는데, 작업에 참여하는 일반인들과 작가들에게 카메라를 맡겨 자유롭게 촬영하도록 했어요. 바닷가에 그냥 놀러 온 분들도 참여할 정도로 아주 즉흥적이었죠. 그들과 같이 무얼 했느냐 하면, 연을 만들었어요. 외국인들이니 연 만드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제작법을 프린트해서 나눠주었죠. 같이 연을 만들어 날리고 그 모습을 찍기도 했던 즐겁고 재밌는 작품이에요. 작품 제목에 ‘상황’을 넣는 이유를 아나요? 내가 작품을 만들 때, 혹은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 놓을 때 거기에는 빛도, 바람도, 먼지도 있고 사람 소리도 들리고, 차 소리도 나죠. 그런 상황이 참 좋은데, 그 마음이 반영된 것이에요.

Q.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예술, 철학, 과학이 접목된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하셨는데요.
이런 소통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순기, (왼쪽부터)<자크 데리다와의 대화>(2002)·<존 케이지-빈 말들& 미라주 베르발>(1986)·<장 뤽 낭시와의 대화>(2002)

김순기, (왼쪽부터)<자크 데리다와의 대화>(2002)·<존 케이지-빈 말들&미라주 베르발>(1986)
·<장 뤽 낭시와의 대화>(2002)

나는 좋은 분들과 만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많은 분들과 교류를 했지만 그중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게요. 바로 플럭서스의 대가 존 케이지 선생님이에요. 그분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는데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되었죠.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2년 전 쯤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가 같이 인터뷰를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가 “선생님, 평생 제일 좋아한 글이 있다면 뭔가요?”하고 물으니 바로 “장자와 비트켄슈타인의 글”이라고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두 분은 내가 오랫동안 공부를 했던 분들이거든요. 그렇게 잘 통했어요. 그 밖에도 아주 많은 분들과 친분을 나눴어요. 사실 나는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동양에서 온 여성일 뿐이었어요. 그런데도 나를 받아들이고 대화를 했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름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거죠.

Q. 이번 전시는 회고전이면서도 신작 두 점을 발표하는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작품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순기 작가와 로봇 제작자들

김순기 작가와 로봇 제작자들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는 것을 좋아해요. 이번에는 그래서 로봇을 하나 제작했는데요. 작품에는 로봇과 무당이 퍼포머로 등장해요. 로봇은 프로그램되어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이고, 무당은 인간 이성의 범위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것들과 연관있는 존재인 거죠. 영희라는 이름을 가진 게으르고 심심해하는 이 로봇이 나와 마주 앉아 시를 읽는 퍼포먼스를 하죠. 바로 <Space Time 2019>라는 작품이에요. 사실 <Space Time>은 1975년도에 발표했던 소리 콘서트인데, 2019년 현재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라는 공간에 맞춰 작품을 다시 제작했죠. 자전거로 발전시키는 레코드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전시마당을 둘러싼 유리에 그 소리가 반사돼 에코가 생기고, 위아래를 움직이는 거대한 애드벌룬에서도 소리가 발생하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작품이에요.

지난 9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과 지하 1층 공간에서 펼쳐진
김순기 작가의 신작 <Space Time 2019> 퍼포먼스 현장 모습 지난 9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과 지하 1층 공간에서 펼쳐진
김순기 작가의 신작 <Space Time 2019> 퍼포먼스 현장 모습
지난 9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과 지하 1층 공간에서 펼쳐진
김순기 작가의 신작 <Space Time 2019> 퍼포먼스 현장 모습

이번 전시 제목의 ‘게으른 구름’은 내가 90년대에 냈던 시집의 제목에서 가져왔어요. 구름은 항상 형태가 변하고, 늘 움직이잖아요. 나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려 본다면, 사막에 사는 이방인이자 야생동물처럼 바깥의 잡초와 친하고, 밤중에 별똥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구름은 자유롭게 하늘을 떠돌아다니고, 한계가 없잖아요. 나한테는 작품 속이 하늘이에요. 이렇게 예술 활동을 하는 게 여행 다니는 거죠.

Q. 세간에서는 작가님에 대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예술가이며, 예술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요소들이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의 예술 행위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순기 :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김순기 :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김순기 : 게으른 구름> 전시 전경

나는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성미를 지녔어요. 그리고 내가 할 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열정도 가득하죠. 누군가는 일생동안 작업을 한다는 게 힘든 일이라고 하는데, 나는 재미있게만 했거든요. 그리고 보통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어디에서 얻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영감이라는 단어를 잘 모른다고 답합니다. 작업을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다음에 할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사용하고 싶은 재료도 생각나곤 하니까요. 그래서 드로잉 작업물이 많은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나는 ‘일꾼처럼 묵묵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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