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존재 의지와 기술 이상, 모더니즘의 영원한 미제
기계문명이 산업 혁명의 실험기를 거쳐 본격적인 결과물들을 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의
눈과 귀는 항상 더 새로운 발명과 첨단의 기술 발전에 열려 있었다. 이런 현상은 건축 분야에
서도 마찬가지여서 이미 19세기말이면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새로운 재료와 구
조 공법으로 지어진 고층 건축물들이 '수직선'이라는 신문명의 건축 이상을 선보이기 시작하
였다.
바벨탑의 신화이래 주기적으로 천상에의 수직 욕구에 시달리던 인류는 기계문명이 지어
준 300m짜리 철골 제단에 너무도 흡족해 했고 너도나도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도시를 여러
겹의 수직선으로 치장하는 일에 몰두하계 되었다. (도판 3) 언제부터인가 모더니즘 건축은 기
술 유토피아라는 성스러운 신앙을 행하는 현대판 십자군 전사와 이들의 발목을 붙드는 재래
문화의 대결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기계문명의 운용이
시작된 초창기부터 많은 선각자들은 기계문명이 가져올 폐해를 예견하며 다른 한편으로 여러
종류의 반(反)기계문명 운동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모더니즘 문명은 산업혁명이 낳은 가
치관의 붕괴를 테크놀로지의 이상으로 해결하려는 치유책으로 시작된 문명이었으면서도 존재
의지와의 사이에 큰 괴리를 처음부터 가정하고 시작하였다. 모던 테크놀로지 문명은 여러 종
류의 폐해들을 낳으며 인류 문명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져 놓고 있었다.
인간이 정착하여 건축 행위를 시작한 이래 건물은 항상 두가지 기본적인 기능을 만족시켜
야 한다. 첫째는, 인간을 환경으로부터 보호하여 행위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고 둘째는,
땅 위에 터를 갈고 자연이 인간을 세상에 보낸 존재 의미를 담아 내는 것이었다.
첫 번째 기
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항상 자기 시대의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이전 시대의 집보다
더 나은 집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인간은 이전 시대부터 전해 내
려오는 지혜를 바탕으로 자기 시대의 보편적 가치가 제시하는 바에 따라 자연의 섭리와 융화
되는 집을 지으려 했으며 이것을 통해 땅위에 인간의 존재 방식을 새기려는 건물의 두 번째
기능을 만족시키려 했다. (도판 4)

테크놀로지와 존재의 문제는 인간이 정착과 군집을 시작한 때부터 항상 건축을 둘러싼 가
장 중요한 두가지 주제였다. 테크놀로지의 욕구와 존재의 의지를 조화롭게 융화시켜주는 가치
가 한 시대를 지배할 때 건축은 융성하여 값진 유산을 남겼다. 이와 반대로 이 두 가지 가치
체계 사이에 경쟁이 벌어져 괴리가 생길 때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전환기가 시작되었다. 많은
선각자들은 이러한 괴리에 대한 치유책을 항상 자연의 교훈에서 찾았다.
모더니즘기를 준비하던 선각자들 중에는 기계문명이 초래할 인류의 위기 상황이 이전 시대
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파괴적인 것임을 일찍이 예견한사람들이 있었다. 기계문명의 폐해
로부터 인류를 지키려는 건축 운동들에 의해 모더니즘을 정의하려 한 건축가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가지 핵심적 내용은 20세기 근대 건축의 상징적 이미지를 위와 같은 '수직선'이 아닌
'수평선'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근대 건축의 이상 중에는 효율과 쾌적의 의미를 양적 팽창이
아닌 인류의 향상된 존재 가치로 해석한 일단의 건축 운동들이 있었다. 이들은 기계발전이 낳
은 새로운 문명 조건하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류의 존재 방식을 땅으로부터 떨어지는 수직선
의 개념이 아닌 땅에 뿌리박는 수평선의 개념으로 가정하였다.
미술공예 운동, 중세주의 운동,
전원 이상 운동, 가든시티 운동, 화이트시티 운동, 도시 미학 운동 등과 같은 일련의 자연주의
내지는 모던 휴머니즘 계열에 속하는 운동들이 땅의 수평선을 이상적 근대 문명 가치로 추구
한 운동들이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문명 운용 방식의 종류에 상관없이 인류가 행하는 건축 문화 행위의 궁극
적 목표는 항상 자연의 품에 안기는 존재 방식에 대한 제안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가지
고 있었다. 이제 모더니즘 문명은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문명 체계에 맞는 건축적 존재 방식을
새로이 제안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많은 근대 건축가들은 수평선의 질서 아래 펼쳐지는 마
을의 공동체 생활을 근대적 이미지에 맞게 번안해 내는 작업을 그 목표로 삼았다.
지난 1세기동안 모더니즘 건축을 운용해온 인류는 이제 또다른 세기로의 전환점에 서게 되
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재정의 작업은 세기말어 접어들면서 21세기
의 이상적 건축 모델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기술적 진보에
의해 정의하려는 기술 이상주의가 더욱 팽배하면서 이러한 모델을 '첨단 기술이 가져다주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 세계의 창출'로 가정한 하이-테크 건축이 1990년대 세계 건축의 흐름을
급속히 통일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하이-테크 건축이 제시하는 인공적인 꽃장식과 영롱한 유리의 이미지는 인류의 미래
에 대한 진정한 건축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기술 이상과 존재 의지 사
이의 간극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지금 21세기의 건축 모델은 땅위에 뿌리박는 인류의 존재
의지를 확인시켜 줄 모델이어야 하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