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성의 구상화에 대한 소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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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서론 이 글은 근대기에 활약했던 양화가 이인성(1912-50)의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1930년대 후반에 주로 제작되어진 일련의 구상화 작품들을 분석해 봄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이다.1) 이인성은 유화와 수채화에 대한 근대 초기의 기술습득단계로부터 점차 예술적 가치를 확보해 나가기 시작한 전환기의 우리 화단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인상주의에서부터 후기인상주의,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야수파, 표현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서구 모더니즘을 각기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1930년대 우리 화단의 복잡한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인성의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정점으로 하는 구상화 계열의 작품들은 그의 짧은 생애에서도 황금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주로 제작되어진 것으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일본 체류시에 익힌 것으로 보이는 구상화들은2) 그의 유별난 조형적 빈식증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 내면의 사상이나 이념, 문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구상화의 특성상 다른 여느 경향보다도 이인성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었던 1930년대 후반의 문예계에서 이인성이 어떠한 시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인식하려 했으며, 그것이 또한 우리 근대미술사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가 남긴 몇몇 구상화 작품들은 문제해결의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귀중한 연구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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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일본근대미술과 구상화 현재까지 알려진 이인성의 작품들을 통해 살펴본다면 구상화에 대한 이인성의 관심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뛰어난 화재와 번뜩이는 감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대구 화단의 지극히 제한된 영역 속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이미 서구 미술계와의 직접적인 교류아래 다양한 형식체험을 전개하고 있었던 근대기 일본의 유화계가 확실히 새로운 자극의 보고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스승 서동진(1900 ∼70)으로부터 익힌, 인상파적인 시각성을 강하게 노출하고 있는 수채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한편, <파란 지붕이 보이는 풍경>(1932), <세토섬의 여름>(1933) 등과 같은 수많은 풍경화와 정물화를 통해 세잔의 감화를 나타냈으며, <창가>(1934, 호암미술관), <실내>(1935)에서는 보나르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대부분 사물대상에 대한 예민한 시감각적인 인상 내지는 구축적이고 논리적인 화면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 회화 양식들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는 이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전혀 새로운 - 그러나 서구 근대미술사에 있어서는 전통적이며 복고적인 - 양식이 바로 일련의 구상화 작품들이다. 많은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였듯이 <가을 어느날>(1934, 호암미술관)과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에서는 원시적인 건강성이 강조되거나 토속적 정감을 환기시키는 인체표현, 강렬한 원색의 사용에 의한 장식적인 화면 분위기, 문학성 짙은 주제의식 등에서 고갱의 타히티 시절의 작품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인성과 고갱의 이러한 영향관계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는 분명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즉, 고갱은 추악한 서구 근대문명에서 벗어나 황홀과 고요함과 예술에 싸여 살 수 있는 타히티를 동경했으며 실제 그곳 현실세계를 체험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신화나 전설속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철저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반해 이인성은 여러 가지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화면 곳곳에 산재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 진정한 시각적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있지만 고갱은 현실에서 벗어나 또다른 이상향으로 도피하고자 했으며 이인성은 현실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인성의 이러한 태도는 앞서의 두 작품외에도 이후에 지속적으로 제작된 <과수원의 일우에서>(1936)와 <閑庭>(1937), <舞>(1938), <뒷뜰>(1939)과 같은 구상화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작품의 토대를 고대의 신화나 전설 또는 몽환적인 이상의 세계에 두지 않고 향토적 내지는 토속적 정감이 물씬 풍기는 당대의 현실에 기반을 둔 이인성의 구상화 작품들은 어쩌면 근대 초기 일본 유화계의 경향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일본 유화계에 있어서 구상화는 신화나 종교적인 주제를 즐겨 선택했던 하라다 나오 지로우(原田直次郞)의 <騎童觀音>(1889)을 비롯한 많은 선례가 있지만 대체로 구로다 세이끼(黑田淸輝)의 <옛 이야기(昔語)>(1898)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고 보고 있다.3) 이 작품은 길거리에서 승려가 불고 있는 피리소리를 경청하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정경을 작가가 파리에서 직접 지도 받은 적도 있는 퓌비 드 샤반(1824-98)의 우의화 <휴식>(1867)에서 구도를 차용하여4) 그린 것이지만 다까히시 슈지(高階秀彌)는 이 작품이 인간의 오감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즉 피리를 불고 있는 승려와 눈을 반쯤 감은 채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 중앙의 무희가 '청각'을, 그 옆에서 담뱃대를 들고 있는 하녀가 '후각'을, 남자의 손을 맞잡고 있는 무희가 '촉각'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술이 든 표주박이 '미각'을 암시하며,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고 있는 좌측의 나물 캐는 소녀가 '시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5) 아무튼 일본 고유의 토속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京都 여행을 통해 제작된 <옛 이야기>에 어떤 내밀한 의미를 담고자 했던 구로다의 태도는 이인성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되어 짐으로써 해서 매우 흥미롭다.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는 비록 여러 장의 사진을 변형시킨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6) 그가 평소 신라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증언은7) 경주에로의 여행을 통한 취재의 결과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인성이 '조선의 향토성과 설화적 세계를' 담기 위해 일본화가의 구상화와 고갱식의 그림을 토대로 했다고 본 김윤수 교수의 견해는 매우 적절하다.8) 문제는 이인성이 구현코자 했던 것이 단순히 '조선의 향토성과 설화의 세계'였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구상화들과의 연관성속에서 재검토되야 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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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이인성의 구상화 이인성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어떤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이른 작례로서는 <초하의 빛>(1933)(그림 1)을 들 수 있다. 제12회 선전에 출품, 특선을 차지한 이 작품은 함께 출품된 <곡진유원지의 일우>와 <세토섬의 여름>과 같은 인상파와 세잔풍의 풍경화와도 경향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온갖 형태의 나무와 잡초들이 주의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이인성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나무등걸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물이 화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인물중심의 포치방식은 작품 <溫日>(1930년대)에서와 같이 인물이 주변사물들과 함께 하나의 단순한 모티브로 취급받아 왔던 인상파적 묘사방식과는 분명 성격을 달리한다. 가벼운 등산길의 기념사진처럼 보여질 수도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밝지 않은 인물표정과 함께 발치에 놓인 몇 개의 사과가 뭔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밝은 색조의 포장지(또는 헝겁)로 곱게 싸여진 사과알들의 존재가 화면의 주요 구성인자로 부각되어 있는 점과 함께 인물의 포즈나 배경의 나무들이 이후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 <경주의 산곡에서>의 화면 우측에서 또 다시 유사하게 반복되어져 있음으로 해서 이 부분들에 대한 이인성의 각별한 관심과 애착이 확인된다. <초하의 빛>에 담겨진 이인성의 진정한 제작의도를 밝혀 내기에는 작품 자체의 불명료성과 그 주변의 정황에 대한 자료부족으로 인해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의 또 다른 수채화 작품 <아리랑 고개>(그림 2)는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인성 특유의 밝고 선려한 색감의 단속적인 터치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단순히 서울 근교의 풍경화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최근 신수경의 조사로 일제하 우리 민족의 한과 울분이 승화된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9) 즉, 1926년에 상영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넘어 가고" 있는 마지막 장면의 같은 현장을 이인성이 작품의 대상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인성이 스스로 '의미 있는 화재'라고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사실은 양자간의 친연성을 더욱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푸르른 신록과 붉은 지붕이 강렬하게 대비되고 있음으로 해서 화면 온통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가득차 넘치지만 이것조차 이인성이 가슴에 응어리진 식민지의 한을 주목하고 새로운 희망과 꺾이지 않는 부활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 것으로 본다면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인성이 이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성을 담고자 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연계시켜 볼 수도 있다. 1931년의 만주사변 발발과 함께 사회는 극도로 혼란해졌으며 1933년 6월에는 일본 내무성이 출판물에 대한 검열제도를 대폭 강화한데 이어 조선총독부 역시 같은 해 9월에 간행물의 교정검열을 실시해 나갔다. 특히 <아리랑> 레코드를 치안방해 이유로 발매금지처분(1933. 9)한 것은 이인성으로 하여금 그같은 방법을 동원케 했던 원인으로 보인다. <아리랑 고개>를 통해 이인성이 생명력 충만한 화면 분위기로 절망과 비탄에 빠진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새로운 희망과 의욕으로 승화시키고자 의도했다면 <가을 어느날>(그림 3)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놓여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초하의 빛>에 이어 제 13회 선전에서 특선에 오른 <가을 어느날>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눈에 보여지는 현실의 풍경과 인물들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이인성이 추구하고자 한 하나의 이상세계를 마치 현실속의 정경인 것처럼 환기시킨 작품이다.10)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온갖 형태의 식물들이 각기 화려한 생명력을 발산하며 기름진 붉은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바구니를 든 젊은 반라의 젊은 처녀와 나이 어린 소녀가 이를 무대로 걸어가고 있는 광경의 이 작품은 확실히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11)'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유독 강조된 것은 바로 건강한 생명력에 대한 찬미이다.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을 활짝 드러낸 성숙한 여인은 현실속의 존재라기 보다는 풍성한 생명의 힘을 상징하는 일종의 대지모신이며 활기에 넘쳐 흐르는 수많은 화초들과 사과나무 등은 그에 대한 예찬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여인이 손을 돌려 소중하게 들고 있는 한송이 꽃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도 가능하리라 본다. 고갱의 <모성애>(1896)에 등장하는 화면 좌측의 여인이 싱싱한 과일을 들고 있는 것과도 비교시켜 볼 수 있는 이 여인의 포즈와 꽃의 존재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구본웅이 이 작품에 대해 '묘사의 파상성12)'을 언급했지만 이인성의 진정한 제작의도가 현실경에 대한 사실적 묘사보다는 당시의 침울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건강한 활력과 재생의 희망을 불어 넣고자 한데 있음을 도외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인성이 구상화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당시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증언을 시도했음은 이듬해 제작되어진 <경주의 산곡에서>(그림 4)라는 명제의 작품에서도 재확인된다. 제 14회 선전에 출품, 특선과 더불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이인성 스스로도 득의의 작품으로 여겼음인지 같은 해 일본에서 개최된 제 16회 제전에도 재출품하여 준특선까지 올랐다. 편평한 색면으로 메워진 푸른 하늘과 붉은색의 대지, 짙은 윤곽선을 이용한 명확한 형태묘사 등은 고갱의 토속적인 화면 분위기와 흡사하다. 특히 인체표현과 수목들의 묘사에 있어서는 양식화를 지향하고 있음으로 해서 장식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새로운 시도는 화면 우측 소년의 안면과 가슴부분처럼 다소 부자연스런 분위기를 낳기도 했는데 김종태는 새새끼와 같은 아이의 얼굴이 만화적이며 '미개인의 모습이 여전히 드러나 있으니 혹 그것을 조선의 지방색(로컬)'으로 보느냐는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13). 반면, 이인성과 함께 향토회 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김용준은 '형태와 색채의 설명에 대하여 대담한 시험이라 할만큼 데포르메한 형적이 화면 전폭에 흐르는 작품'으로 '상상력의 풍부함, 색채의 명랑성, 컴퍼지션의 웅장함'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14) 그러나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이인성의 현실인식이 교묘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화려한 궁궐은 모두 사라지고 몇 조각의 기와장과 멀리 첨성대만을 남겨놓고 있다. 화면 우측에는 <초원의 빛>에서 등장했던 인물과 거의 동일한 포즈의 소년이 힘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좌측에는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무엇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페허가 되어 버린 경주라는 배경, 각기 상이한 포즈의 소년들은 우리로 하여금 갖가지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이인성 구상화의 묘미라 할 수 있다. 특히 앉아 있는 소년의 감겨진 눈은 이인성의 자화상이나 인물화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이인성이 일제 치하 한국인은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기에 감은 눈으로 그렸다는 김용성의 증언15)과 결부시켜 볼 때, 작품해석의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를 증언하는 갖가지 유물들과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과 연관지어보면 단순히 가족내의 이야기, 예를 들면 들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화려한 영광이 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광복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조국해방을 간절히 염원하는 이인성의 심정을 매우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고향 상실감16)'의 발로라든가 '무기력한 패배주의가 세기말적인 독특한 상징성을 띠고 기념화17)'된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들은 재검토될 여지가 있다.18) 지금까지 살펴본 이인성의 구상화들은 대부분 어떠한 상징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을 어느날>에 등장하는 여인도 '풍요로운 생명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모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경주의 산곡에서>의 앉아 있는 소년은 '절망과 체념' 그리고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년은 '희망'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인성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과' 역시 어쩌면 나름대로의 상징적의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정물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과는 논외로 하더라도 <초하의 빛>에서는 주인공의 발치에 몇 알의 사과가 놓여진데 이어 <가을 어느날>에는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한그루이 사과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고, 1936년의 제 15회 선전에는 아예 사과밭을 무대로 한 <과수원의 일우>(그림 5)가 출품되었다. 물론 이인성의 고향인 대구가 사과의 특산지이고 인근 안동의 처가에는 과수원이 있었기에 그로서는 매우 친근한 과일이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구상화에서 사과열매나 사과나무가 기능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분을 뜻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閑庭>(1937, 그림 6)에 등장하는 한 알의 사과가 화면 속의 다른 어느 사물보다도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음으로 쉽게 확인된다. 1937년의 제 16회 선전과 그 이듬해 일본의 제 2회 신문전에 출품한 <閑庭>은 두 명의 소년이 땅바닥에 앉아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목가적인 정경이지만 화면 곳곳에서 이인성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퉁소를 불고 있는 소년과 날라리, 밀집모자, 흰 옷과 고무신 등은 전형적인 '한국적 이미지의 소도구들19)'이며, 붉은 색의 땅바닥 역시 이인성 특유의 '향토색'이라 할 것이다. 그가 "나는 적토, 즉 붉은색의 땅의 향기가 한없이 좋다"는 말을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자연과 상징물들을 작품 속에 교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배치시킴으로써 어떠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소리없이 웅변코자 했던 것이다.20)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역시 '사과'의 존재이다. 이 작품은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일단 등을 돌린 채 퉁소를 불고 있는 소년에게 집중시켰다가 드러누워 있는 소년의 발치에서 허리로, 안면부로 이동시킨 다음 마지막에는 그가 들고 있는 한 알의 사과로 유도시킨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감추어진 핵심은 바로 '사과'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곧 이인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인 셈이다. 한 손을 턱에 괴고 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퉁소의 선율에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이 소중하게 들고 있는 사과에는 우리 민족과 식민지가 되어버린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이인성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에서 등장하는 화면 중앙의 인물이 조심스레 두손을 뻗쳐 따려고 하는 열매를 연상케 하는 이인성의 사과 한 알에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생명과 재생의 희망이 영글어져 있는 듯하다. 1938년의 제 17회 선전에 출품된 <舞>(그림 7) 역시 민족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민족풍의 십장생도를 배경으로 춤을 덩실 덩실 추고 있는 한복의 두 여인을 그렸는데, <경주의 산곡에서>와 <閑庭>과는 달리 '한국적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춤을 소재한 그림이나 무녀가 다수 등장했던 당시의 화단 분위기와도 관련시켜 볼 수도 있지만21) 확실히 이인성 회화의 새로운 변모를 말해 주기도 한다. 구본웅은 이 작품의 '회화적 모멘트가 어떤가를 묻고 싶으며, 특히 이 작품이 가진 바 세계가 완전치 못한 감을 주는 것은 어쩜일까22)'라고 의문을 표시했지만, 한국적 정감을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을 통해 이인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는 한편,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그 우월성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23) 이인성은 작품 <舞>에 대해 커다란 애착을 느낀 듯 이를 대작으로 다시 제작하려는 의도를 보인 듯하며24) 결국 거의 유사한 형태의 <뒷뜰>(1939, 제18회 선전, 그림 8)을 통해 실현하였다. 여인들의 의복색과 함께 배경을 십장생도에서 풀밭으로 교체함으로써 이 작품의 현실성을 드높인 대신 좌측 여인의 손에 태극부채를 들게 함으로써 십장생도가 지녔던 한국적 이미지를 집결시켜 놓으려는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태극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의 손모양은 한송이의 꽃을 들고 있는 <가을 어느날>의 역시 좌측 여인의 그것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이인성의 각별한 의미부여 또한 쉽게 읽혀진다. 따라서 <舞>나 <뒷뜰>은 결국 우리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혼에 대한 이인성의 강한 자긍심의 소산이며 이는 <경주의 산곡에서>와 <閑庭>에 나타나는 '재생에의 희망'을 초극하는 완결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1943년에 제작된 듯한 <피리(笛)>와 <호미를 가지고> 역시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암흑기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가지고자 한 이인성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호미를 가지고>는 녹음 짙은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한복바지를 입은 한 젊은이가 호미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작품으로 풍요로운 내일에의 희망을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이인성의 구상화는 지금까지 살펴보듯이 대부분 우리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복돋아 주고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려 한 것이지만 이인성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도 있어 흥미롭다. 1947년 전후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인물>(그림 9)이 그것으로 반라의 한 남자가 이마에 손을 대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두 명의 한복 입은 여인들이 흐릿하게 나타나 있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는 이인성 그 자신이며 족두리를 쓴 여인이 이인성의 셋째 부인 김창경, 등을 돌린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여인은 그 이전의 여인임으로 해서 이 작품은 '지나간 시절의 여인들과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갈등과 번민25)을 하고 있는 이인성의 자화상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 근대미술사상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렇듯 진솔하게 작품으로 형상화시킨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를 통해 보아서도 이인성의 구상화는 그의 진솔된 면모를 이해하는데 첩경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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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결 론 지금까지 이인성의 구상화를 중심으로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이인성은 우리 화단의 구상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제 식민치하의 암울한 시대상황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조국해방에의 염원을 상징적이고도 은유적인 조형언어로 담아내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이인성의 활동 당시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의 미술사적 평가에서도 도외시되어 왔다. 대구라는 지역화단 출신의 젊고 패기에 찬 이인성이 선전과 제전 등 관전을 주무대로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화단활동을 전개하였음으로 인해 그간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는 한편으로 왜곡된 이인성 예찬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냉혹한 비난 역시 낳게 되는 부작용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 특히 구상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평가의 부재는 결국 당대에는 이인성으로 하여금 깊은 자괴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으며 오늘날에는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 미술계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치열한 고뇌마저도 외면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비록 그가 현실의 제모순들과 직접적으로 대항하고 증언하는 리얼리스트는 아니었지만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당시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확고한 역사인식과 민족의식을 지니고 우리 민족의 강한 생명력과 조국해방에의 의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은 분명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인성의 이같은 시각 이면에는 대구 문단의 영향이 매우 컷을 것이며 이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 하리라 본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러 가지 상징언어들에 대한 다양한 차원에서의 실증자료의 확보와 체계수립 역시 보완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근대기 우리 미술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 작업을 통해 올바른 역사의 복원과 함께 우리 근대정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수립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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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이인성, <初夏의 빛>,1993 | 그림 2.이인성,<아리랑 고개>,1934,수채화,57x78cm,유족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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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이인성,<가을 어느날>,193,캔버스에 유채,97x162cm,호암미술관 | 그림 4.이인성,<경주의 산곡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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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이인성,<과수원의 일우>,1936 | 그림 6.이인성,<한정>,1937 | 그림 7.이인성,<>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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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8.이인성,<뒷뜰>,1939 | 그림 9.이인성,<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