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4개의 소주제와 회화의 복권
1)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 사이 -학예연구관 장영준
김대원, 왕형열, 이재복에 의한 이 섹션은 전시장 도입부에 속한다. 평면에서 한국화 양화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만큼 한국화 작가들도 포함되었다. 장영준(학예연구관)에 의한 이 섹션은 대상성을 지니면서 그 소재나 오브제가 갖는 정신성까지도 포함하는 일군의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즉 사물의 형상에서 그 근본을 찾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을 유출해내는 작업은 자연의 원리를 뼈대로 하는 동양회화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개념인 것이다.
김대원은 <옛날 옛적에>라는 제목으로 사람, 동물, 바위, 산 등을 형상들을 화면에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인 감각은 다시 전통적인 여백의 미와 먹의 묘미를 한껏 살리고 있어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즉 자연적인 대상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을 초월함으로써 그 간극을 느끼게 한다.
다음의 왕형열은 최근 주로 새를 모티브로 가족과 삶의 환희의 주제 표현을 보여준다. 이 작가 역시 다분히 동양적인 소재를 이용하고 있으나, 그 채색하는 방식과 구도는 현대적인 감각에 따르고 있다.
이재복은 한국 전통적인 한지와 토속적인 질감을 이용한 화면을 구성하여 재료와 작품의 개념을 일원화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재료인 키, 천, 한지 등을 오브제로 사용하고 한문으로 조형적인 구성을 마무리하고 있다.
2) 매재의 회화화 또는 회화의 매재화 -관장 오광수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 사이 섹션에 이어 연결되는 매재의 회화화 또는 회화의 매재화 섹션으로 참가작가는 강미선, 김선두, 정종미이다. 이들은 주로 한지를 이용하여 그 재료의 특성을 살림으로써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강미선은 한지를 여러 겹 바른 후 붓끝으로 탁본하듯 두들겨 마치 우리나라 화강암과 같은 질감을 만들어 내고 그 위에 일상적인 풍경을 담았다.
김선두는 오랫동안 사용하여 온 장지를 오려서 선과 면을 형성한 뒤 하찮아 보이는 자연의 들풀들을 조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음으로 정종미는 식물성의 종이 위에 안료를 착색하여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는 이 두 가지의 식물적 속성의 결합으로 사유로의 깊이를 더하고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재료 자체의 회화성이 부각되기를 기다린다.
3) 숲-생명의 유희 -학예연구사 임대근
역시 한국화 작품으로 이어지는 이 섹션은 강경구, 김병종, 조순호로 구성되었다. 세 작가 모두 숲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강경구는 약 15m에 달하는 대작으로 구성하여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보여지는 숲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김병종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한옥에서 많이 사용하는 색 바랜 듯한 장지 위에 힘있는 붓터치로 매우 유머러스하게 나무와 숲을 표현하고 있다. 조순호는 숲이라는 큰 범위보다는 그것을 구성하는 새와 꽃 등과 같은 작은 구성 요소들에 집중한다. 결국 이 섹션은 각양각색의 숲의 형상을 보면서 생명을 느끼게 한다.
4) 손길을 따라서 -학예연구사 김경운
유머러스한 숲 속을 벗어나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섹션은 김태호, 김호득, 황창배로 구성된 손길을 따라서 이다. 이 섹션은 ‘손’이라는 신체의 일부를 부각시킴으로서 평면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태호의 매우 미니멀한 작품에서부터 무수한 먹점으로 이어나간 김호득 그리고 황창배의 드로잉과 같은 간소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손에 의한 작품의 기본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섹션은 한국화와 유화를 구분하지 않고 구성함으써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양화 섹션과의 연결고리를 작품의 성격에 따라 형성해 주고 있다.
5) 일상의 이미지 -학예연구사 김연희
이 섹션은 우연의 일치로 김원숙, 유연희, 황주리 등 모두 여성작가로 구성되어 일상적인 이미지에 주제를 맞추고 있다. 김원숙은 일상의 이미지를 상상의 언어로 풀어 내는데 <천개의 산>은 미당 서정주가 머리가 노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매일 천 개의 산을 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천 개의 산을 그리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그리기 시작하여 작은 소품에 일상적인 생활을 그려내고 있다.
다음으로 유연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순환의 개념으로 연결하여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황주리는 식물의 형상에 작은 일상의 모습을 다시 담아내고 있다.
6) 인간, 마르지 않는 샘 -학예연구사 이추영
사람의 일상사를 담은 섹션은 인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인간, 마르지 않는 샘으로 연결되어 서용선, 오원배, 정복수의 작품들로 다시 한번 인본주의적인 관심으로 강조된다. 서용선은 빌딩, 자동차, 혹은 신문을 통해서 보여지는 도시 속의 삶을 거친 붓터치와 원색적인 색감으로 표현하여 결국은 군중과 함께 하는 인간을 지적한다.
오원배는 삭발한 머리와 벗겨진 상체의 모습을 통해 소외된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격자구조의 기둥이나 시멘트 건물의 배경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성에 대한 언급은 신체의 내부를 해부하는 정복수로 이어진다. 사람의 몸에서 발생하는 모든 액체를 표현하고 그 생물학적인 분석을 통해 물리적인 인간의 기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7) 그린 글 읽기 -학예연구사 강수정
그린 글 읽기 는 소위 우리나라의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이 섹션은 인간의 신체 혹은 내면과 관련한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의 기본권리를 옹호하고 현실을 은유하는 표현으로 전환된다. 즉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으로 제약된 인간의 모습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둔 장으로 인간, 마르지 않는 샘과 변별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연결고리를 형성하였다.
작가는 안창홍, 임옥상, 홍성담으로 구성되었다. 안창홍은 조선광복군의 기념사진을 차용하여 역사의 비진실성을 고발하고 있다. 김치라는 말과 함께 사진을 가식적으로 촬영하고 있는 이 장면은 우리의 근현대사가 개인들의 희생을 딛고 권력자들에 의해 조종되고 변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음은 회화를 통하여 서사적인 드라마를 재창조하는 임옥상의 작품으로 전체 18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민족 상상 21>은 좌우 9장면씩 서로 대칭이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비록 이번 전시에 이 대작의 부분을 전시하였으나, 서로 댓구를 이루면서 수천명의 시민이 함께 참여한 칼라 시트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홍성담은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그가 사상범으로 경험했던 감옥 생활에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간수의 눈을 피해 서로 이야기 나누려고 애쓰는 장면들로 묘사되어 있는 <통방>은 창마다 하나씩 에피소드가 걸려있고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한 장면씩 서술적으로 읽혀지도록 구성되었고, 이들의 작은 감방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상징하고 있다.
8) 물성과 시간성 -학예연구사 류지연
그린 글 읽기 에 이어 물성과 시간성 으로 이어지는 제2전시장의 구성은 형상성과 한국화에 따른 제1전시장과는 달리 추상성과 비형상성 그리고 다양한 혼합재료에 의한 평면작업으로 구성되었다.
김택상, 석철주, 차명희에 의해 구성된 이 섹션은 재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시간성으로 마무리되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즉 물에 관심이 많은 김택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물감과 물의 결합으로 교묘히 층을 이루는 현상에 집중한다. 그에게 있어 물의 흔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을 2차원의 세계에 구현하고 새로운 존재를 생성하는 창작과정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석철주와 차명희는 빨리 마르는 아크릴의 속성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고 있다. 석철주는 캔버스에 바탕을 바르고 말린 뒤, 다른 색으로 한번 칠하고 그 면이 채 마르기 전에 물을 흠뻑 머금은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순간적으로 붓이 지나간 자리의 아크릴은 지워지고 바탕색이 드러나게 되고 마지막으로 캔버스 전체에 일정한 방향으로 붓질을 가하여 이미지를 흐려버린다. 차명희 또한 바탕을 칠한 후 칠이 마르기 전의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그 위에 검은 선을 그린다. 그리는 순수한 행위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차명희 작품에서의 선이라는 개념은 시간성을 동반하고 있다.
9) 실재와 이미지 -학예연구관 최은주
한운성, 강성원, 정장직에 의해 구성된 이 섹션은 작가에 의한 대상물들의 이미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한운성은 사진, 인쇄물, TV, 컴퓨터 등의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실재하는 것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풍경을 제록스, 도트 등 최종 픽셀에 의한 방식으로 보여져 결국 매개체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 시각적인 대상은 허상임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나아가 화가의 눈이 어떤 시각적 장치보다도 대상을 파악하는 폭과 깊이에 독자성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강성원은 선, 형태, 색채 등이 작가의 감정에 따라 충분히 변형, 왜곡되고 거부될 수 있다는 표현주의적 회화관을 드러내고 있다. 흘러내리는 뇌수의 형태는 언급했듯이 부패한 사회군상의 썩은 정신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다음의 정장직은 동양철학 주역 의 이론을 형상화하고 있다. 8궤의 원리를 확장하여 64개의 단위 형식으로 조합 구성되는 것이다. 각각의 궤에서 보여지는 조형적 질서는 색, 선, 형 등의 요소로서 추상미술의 원리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 정장직은 모두 사람의 얼굴로 조형화하여 인간세상의 설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10) 환영의 힘 -학예연구사 박미화
사진과 꼭 같이 묘사한 작품에 대한 놀라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단지 대상이 변화하고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변모되었을 뿐이다. 고영훈, 류재하, 이석주에 의한 작품들에서는 기본적으로 회화가 가지는 환영의 힘이 인정된다. 작가의 사실적인 기술력과, 현실을 초월한 상징성들이 살아있고 이는 전통적인 회화의 아우라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고영훈은 인간의 문명을 상징하는 사전이라는 책 위에 오래된 일상의 오브제들을 그려 회화의 일루전 효과를 보인다. 류재하는 공중에 거대한 돌이 그 무게를 상실하고 당당히 자리함으로써 전통적인 사실적 묘사에 충실하고 있다.
이석주 또한 공중에 부유하는 낙엽과 시계 그리고 악기 등을 묘사하여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기법을 연상하게 한다.
이 섹션은 비록 구상적인 경향이지만 매우 섬세하고 세밀한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추상적인 심상( 象) 그리기 읽기 와 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1) ‘심상(心象)’ 그리기 읽기 -학예연구관 강승완
김지원, 이상남, 최인선으로 이어지는 이 섹션은 마치 그림이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물감 표면을 끝없는 사포질로 인공적인 매끌매끌한 인공적인 질감을 형성한후 다시 기호적인 형상을 일부에 그려넣은 이상남, 빛에 의해 표면 질감이 미묘하게 드러나는 최인선, 그리고 투명 비닐 위에 그림을 그려 존재하지 않는 듯한 벽을 그려내는 김지원 등의 작품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색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미니멀한 구성으로 매우 색다른 경험을 유도한다.
12) 다시 보기 : 추상의 형상화 -학예연구사 박수진
앞의 두 섹션이 매우 세밀한 묘사와 미니멀한 분위기의 작품들로 구성되었었다면, 이 섹션은 대상을 매우 표현적인 형상과 기법에 의존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다시 새로운 분위기를 감상하도록 한다. 박관욱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는데 돌가루를 화면에 뿌리면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엄정순은 신체의 움직임과 선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태를 만들어내고, 이지은은 물감이 캔버스의 뒷면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면서 형성되는 이미지는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에 의한 구성은 결국 선과 같은 추상적인 기본 구성요소에 의해 다시 형상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13) 회화의 깊이 -학예연구사 박영란
문범, 이인현, 홍승혜로 구성된 이 섹션은 사물성이 강조되는 만큼의 깊이, 안료가 표면에 안착되는 깊이 그리고 예술자체에 대한 존재론적인 의문과 그것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의 깊이로 주제가 형성된다. 오일스틱으로 마치 한 폭의 동양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문범, 물감의 번지는 효과를 이용하여 작품의 측면을 통해 깊이를 강조하는 이인현, 그리고 홍승혜의 반복적인 기하학형에 의한 유기적 형태가 착시 효과로 마무리되면서 회화 자체의 깊이에 대한 통일을 이루고 있다.
14) 그리지 않은 그림 -학예연구실장 정준모
회화의 깊이에 이어 남춘모, 최선호, 장승택에 의한 마지막 구성은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졌다. 이 섹션은 매우 간결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앞의 심상( 象) 그리기 읽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섹션을 구성한 학예직의 관점의 차이에 의해 주제는 확연히 구별된다.
즉 심상( 象) 그리기 읽기에서는 작가의 주관성에 출발점을 두고 있는 반면, 이 섹션은 그림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출발점을 두고 있어 소주제의 제목은 그리지 않은 그림 으로 귀결되었다. 마치 화면에 어떤 행위도 가하지 않고 단순히 밑바탕만 칠해 놓은 듯한 장승택, 최소한의 구획으로 푸른색의 차가운 느낌을 강조한 최선호, 파스텔톤의 옅은 색감으로 작가 단위의 폴리를 서로 연결해 놓은 남춘모, 이들 모두가 관람자에게는 마치 그림을 그려 화면을 채웠다기 보다는 다음의 동작이나 행위가 가능한 하나의 시작점의 작품으로 보일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14개의 소주제는 현대 회화의 다양성을 반영하면서 회화의 복권이라는 대주제로 모아진다. 회화의 복권은 단순히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회화의 아우라를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의 회화 양식을 점검하여 새로운 개념의 아우라를 찾고 그와 관련한 전통성을 확립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상의 14개의 소주제들은 동시대 평면회화 경향을 수용하면서 그 독자한 개념 설정에 매우 용이한 전시구성 방식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