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朱慶,1905-1979)은 우리나라 초기 근대서양화가중 한사람으로 일제시대 화가의 길에 입문하여 동경 유학 중 미술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우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던 화가였다.1) 비록 귀국 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작가로서보다는 미술교육가나 정치가로서의 비중이 더욱 컸지만 그가 남긴 초기의 추상작품들은 당시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매우 실험적이며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3년 시도한 최초의 추상화 작품들은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단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추상화를 제작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영광을 놓치고 말았다. 본 글은 그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입문하기 전, 그의 나이 18세에 제작했던 추상화 <파란>(1923)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파란>은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화풍의 추상작품으로 1930년대 김환기와 유영국에 의해 시도된 전위적인 추상작품보다 앞선 것이었다.
또한 1923년은 주경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1928)을 떠나기 전이며 그가 주로 연필화와 수채화 등 미술의 기초적인 화법(畵法)만을 익혔던 시기임을 감안할 때 여러 가지 궁금증이 증폭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주경의 초기시절 화가 입문기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 그리고 당시의 미술경향들과 시대상황을 살펴본 후, 그처럼 전위적인 추상작품을 제작하게된 동기와 작품 제작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하며 <파란>의 제작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Ⅱ. 주경의 성장배경과 화가 수업
주경(朱慶)은 한일 합방전인 1905년 서울 종로 8동 58호에서 아버지 주한영(朱翰榮)과 어머니 장자화(張子華) 사이의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2) 그의 본명은 재경(載慶)이며 아호는 태소(泰素)이다. 주경의 할아버지인 주인섭(朱寅燮)은 가선대부(嘉善大夫)(정삼품)라는 관직에 있어 궁(宮)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공급하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중앙서관과 미곡무역상을 경영하였으며 중동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서예도 가르쳤다. 당시 생활에 대해 주경은 “생활양식은 구식이었으나 가장 현대화한 이념으로 개방되어 있었다.”라고 회고한다.3) 주경은 당시의 국내 초기 서양화가들이 대부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유복한 가정에서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취미생활을 누리며 그림을 시작했다. “주경은 소학생으로는 처음 서울에서 먼저 구두를 신었고, 학교는 자가용 인력차로 통학을 하였다. 또한 집에서는 2명의 가정교사를 둘 정도였다.” 그의 친구였던 정길원 박사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 주경은 풍부한 부의 혜택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4) 또한 그의 백부(伯父) 자운(紫雲)은 명필로 덕수궁 포정문, 해인사 홍위문 등 전국 명승지, 사찰에 판휘호(板揮毫)가 많았으며 당시 화가로 외숙부(장영진)가 있었고 바로 그 직계 장운봉은 외사촌간으로 개화된 부모의 사상과 예술을 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림에의 길로 가는데 무리가 없었을 것으로 본다.5) 주경은 보통학교 재학 시 그림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를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학교에는 귀찮은 것으로 공연히 왔다갔다하고 보통학교 2년부터 필기시간에 재미 붙여 그리는 붓 장난은 다른 것은 다 변변치 못했으나 5년 동안을 통하여 갑이하(甲以下)를 받지 않게 했다.”6) 이렇듯 그는 수하보통학교 3학년 재학 시 화우 심영섭과 연필화 및 수채화를 일본인 교사(야마모도 유소)를 통해 처음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부친과 친교가 있었던 춘곡 고희동에게 사사(師事)하여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구본웅, 심영섭 등과 함께 미술동우회를7) 조직하여 고희동과 마침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종우에게 지도를 받았다.8) 1925년 YMCA에 미술과가 창설되자 그는 이곳에 나가 데생(당시 김복진, 이한복, 공진형, 김창섭 등이 지도)을 주로 하였으며 이후 1928년 중앙 고보를 졸업한 후 동경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삼단화학교(三端畵學校) 소묘과에 입학하여 주로 데생을 익히었다.9) 그곳에서 그는 이마동, 구본웅, 심형구, 손일봉, 이인성, 김인승 등과 함께 수학하게 된다. 이후 그의 동경유학생활은 14년 간 지속되며 조선미술학우회(백우회 전신), 백우회(후에 재동경미술협회로 개칭)를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당시의 일본 내 상황에 대해 평론가 이경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동경에서 미술공부를 할 때 일본화단은 한참 유럽에 새로운 미술사조가 물밀 듯이 들어왔다. 그것은 문화의 후진이 겪어야 할 혼란으로서 19세기적인 고전파, 낭만파, 사실파 그리고 인상파를 비롯하여 20세기적인 야수파, 입체파, 추상파, 구성파 등 그야말로 유럽의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이 동시에 일본이라는 땅으로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러기에 신 미술을 공부하려고 일본에 건너간 미술학생들은 그 많은 것 중에서 자기의 체질에 맞는 것을 골라야만 했다. 그러나 예비 지식이 없고 전근대적인 한계에 머물고 있었던 당시의 한국화단에서 성장한 젊은 화가들은 선뜻 좋은 것과 나쁜 것,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모처럼 일찌감치 동경화단에 진출하여서 고작 몸에 지닌 것이 백년 전에 이미 파리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을 채택하는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중에서 주경은 가장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을 올바르게 보고 그것에 관한 기초적인 실험을 동시에 하였던 것이다.”
주경은 일본 유학시절 프랑스 유학을 위해 준비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회화 이외에 조각(시미즈다가시선생문하에서 3년), 판화(히라쓰 가응이찌선생 문하에서 2년)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였다. 1942년 14년 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주경은 대구 계성중학교에 미술, 공작, 교사로 부임하여 이후 대구 지역에 정착하여 교육가로서 그리고 정치가(국무총리 비서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10)
 |
<파란>(도판1)은 주경이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기도 전인 1923년 그의 나이 18살에 제작된 추상 작품이다. 비록 그가 1919년 수하동보통학교 3학년시절 일본인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다고는 하나 1923년 고희동과 이종우에게 지도를 받기 전까지는 미술에 대한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당시는 1910년 고희동의 유학을 위시하여 서양화 1세대 작가들이 유학을 마친 후 귀국 후학을 양성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평론가 윤범모는 “<파란>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숱한 곡선과 직선이 각기 교차하면서 강렬한 표현의지를 화면 가득히 담은 매우 ‘복잡하고도 어려운 그림’이었다. 특히 작가는 이 작품을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그렸다.
신 미술의 기본조차 익히기 전에 벌써 조형적 실험을 구사했다는 것은 새삼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도 속출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며 <파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그림’이라는 말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당시의 우리미술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파란>의 구성과 운동성, 선과 곡선의 복잡한 얽힘, 색채의 표현성 등의 확기적인 내용은 “과연 이 작품이 1923년 작(作)이 맞는가?” 라는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다.
주경의 <파란>은 제작 이후 선전이나 재동경미협전 등에 출품된 기록이 아직 없으며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경복궁시기)에서 개최한 『한국 근대미술 60년』 전에 출품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1974년 고희 기념 회고전(미술회관 개최)에 정물, 인물, 풍경 등의 60여 점과 함께 전시되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아니! 우리나라에 추상미술이 들어 온 것이 얼마나 되었기에...” 라며 놀라워했다.11) 그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공간(空間, 1974년 9월)지에 개재된 주경의 특집기사에서 이경성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파란>은 유기적인 구성이라든가 역감(力感)적인 대각법 그리고 주제된 물체의 유동적인 복합 등 참으로 극적인 화면 효과에 성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입체파와 표현파 그리고 구성주의가 혼연일체가 되어 커다란 조형의 미를 이룩하고 있다. 다른 화가들이 인상파의 달콤한 아류(亞流)에 만족하고 있을 때 이와 같은 대담한 현대미술의 실험을 한 것을 참으로 놀랄만한 사실이다....중략...이 그림의 원천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유동하는 물량의 질서 정연한 폭동 속에 20세기 초기의 미술위험(美術胃險)을 간취(看取)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색감도 청에서 적에 이르고 황색이 눈에 띄우는 몹시 선동적인 색가(色價)의 세계이다.” 또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한국근대미술 60년』 전에 출품된 주경의 작품을 보고 미술사가 최순우(崔淳雨)는 “당시로서는 몹시 새로운 것이었고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주경의 <파란>에 대한 논란은 그 작품이 과연 예술적 의지와 실험의 결과냐 아니면 단순한 모방이냐 라는 문제와 함께 그를 최초의 추상화작품을 제작한 선구자로 지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형성되어졌다. 이 문제에 대해 1979년 계간미술 10호에서는 ‘작가들을 재평가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루고 있다.
이 기사에서 주경은 고희동, 천경자, 이종우, 장욱진, 이인성 등과 함께 과대 평가된 작가 군으로 묶여져 있다. 주경이 남긴 20년대의 두 작품 <파란>과 <생존>을 두고 주경을 최초의 추상화가로 지목하는 것이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작가로서의 진정한 평가는 다른 면에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점의 작품을 근거로 단번에 그를 최초의 추상화가로 지목하는 것은 지나치게 기록만을 앞세우는 문헌주의자들의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관된 의식 하에서 이루어진 것 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사조를 자기 나름대로 베껴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두 작품에서도 어떤 일관된 시도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라는 것이다. 평론가 윤범모 역시 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린바 있다. “주경의 작품 속에는 지나칠 정도의 경쾌한 리듬이 넘치고 있다. 이는 미술입문의 배경이 풍요로운 삶의 기반 위에서 비롯된 연유와도 무관치는 않을 듯싶다. 1920년대에 이룩했다는 추상적 요소의 유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본격적인 추상미술운동의 일환으로 제작된 고통의 산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연성이 결여된 상태의 어린 미술학도의 사적 세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12)
이처럼 <파란>은 작품성과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이 지속적으로 그 양식을 시도하지 않은 사실로 인해 평가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운명이었다. 이런 안타까움은 이경성의 글에도 잘 나타나있다. “<파란>은 구성주의 적인 작품에다가 밑바닥에 낭만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은 난파된 배의 기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격동과 강렬한 운동감이 마련된 작품이다. 이것은 후기의 이른바 기하학적인 구성과는 다른 초기적인 경향의 것으로서 화면 가득한 힘의 상태가 놀라웁다. 다만 주경이라는 선각적인 화가를 생각할 적에 아까운 것은 그가 모처럼 이와 같은 좋은 작품을 시도하고 그것에 눈이 간 데 비해서 그 후의 작가로서 하나의 양식을 들고서 끝까지 탐구하는 인내력과 지속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조(後彫)처럼 새로운 것을 쫓아서 여기저기 옮겨가다가 나중에는 자기적인 구상의 세계에 머무르고 그것도 생활에 져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좌절된 것이 아까울 뿐이다.”13)
|
|
<파란>이 제작된 시기는 1923년으로 당시 국내 미술계에서 이처럼 획기적인 작품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당시에는 추상화라는 인식이 아예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며 더욱이 작품에 나타나는 속도감 있는 선과 색채의 강렬함 등은 20세기 초 이탈리아 미래파의 화풍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주경이 서구 전위미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1920년 초의 시대 상황은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등 초기 양화가 들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후학들을 가리키던 일본을 통한 서구미술의 초기 수용단계에 그치던 시기였으며 실제 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인상파풍의 아카데미즘적인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1919년 독립운동이후 신문화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최열의 글은 의미심장하다.14)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앞선 시대의 미술론을 돌아볼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고 서구의 여러 미술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스러운 것으로 개조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에 들떠 일본미술 및 서구 근대주의미술의 양식과 이념, 방법에 열광했다. 그들은 ‘낡은 것을 없애고, 서구의 모든 신사조를 받아들여’ 식민지 조선사회를 개조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은 서구 근대주의 미술사조를 각종 지면에 소개하는 데 애를 썼다.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주로 예술지상주의였다.
아무튼 이 같은 서구화 지상주의는 안중식, 조석진의 연이은 죽음과 맞물려 보다 세차게 우리 미술동네에 영향력을 끼쳤다. 젊은 미술지망생들은 거리낌없이 일본 유학 길을 떠났다. 서구화 지상주의를 꿈꾸며 밀어붙이는 문화운동론을 바탕에 깐 이른바 ‘신문화운동’ ‘신미술운동’가들은 대부분 전통 폐기론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선이 왜 서구를 닮지 않았는가를 불행하게 생각했다...중략...서구문명에 대한 이해 없음, 서구미술에 대한 비판 따위에 대해, 그것을 뒤떨어진 것, 무지의 소치, 문화의 야만으로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경향은 동경유학 1세대들에게 깊이 인식이 되어있었다. 고희동, 김찬영, 나혜석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주경이 고희동을 사사한 해가 1921년부터이므로 스승의 이러한 인식은 어린 주경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918년 동경 유학 길을 떠났던 이종우가 1923년 귀국하면서 바로 주경을 가르쳤던 사실은 당시 일본의 미술계를 휩쓸었던 전위적인 운동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1920년 초 서구 미술을 소개한 자료로는 김유방의 “현대미술의 對岸에서-회화에 표현된 포스트 임프렛쇼니즘과 큐비즘”, 《창조》 제8호(1921,1월호)와 노자영의 “미래파의 예술”,《신민공론》 제3권 1호(1922, 1월호)가 있는데, 노자영은 이탈리아의 미래파 운동을 비판하면서 자세히 소개했다. 노자영은 그것이 ‘치열한 근대생활’의 자극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실제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의기(意企)한 최고 가치의, 회화의 장대(莊大)를 시인할 수는 없다’고 부정한다.15) 그러나 그의 글에는 “미래파들에게는 혼탁(混濁)과 동란(動亂)이 가장 적절한 그들의 제목이었다.” “마음의 상태를 그리는 회화라야 한다.” 라는 문구가 주경으로 하여금 마음의 상태를 그리게끔(추상적 형태) 유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자영의 1922년 미래파를 소개하는 글은 주경의 <파란>을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준다. 적어도 당시에 국내에 미래파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주경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미술계의 경향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한 미래파의 영향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일본의 전위 예술 운동에도 미래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1920년 ‘미래파미술협회’가 창립되었으며 동경과 오사카에서 전시를 개최하였다. 또한 당시는 이종우가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중(1918년 - 23년) 이었으므로 당시의 미래파 미술을 접하였을 것이다. 국내 귀국 후 이종우는 선배 고희동의 배려로 중앙학교의 도화교사에 취임하였으며, 당시 심영섭, 김영선, 구본웅 등과 함께 미술동우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했던 주경을 고희동과 함께 지도했다.
그러므로 당시 동경에서 유학 후 막 귀국한 이종우에게 미래파에 대한 도록이나 신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1928년 중앙중학교 졸업한 주경은 일본 동경 천단화 학교에 입학하여 4년 간 수학하게 되는데 천단화 학교는 일본의 미래파 미술협회를 창립한 普門 曉(FUMON, Gyo, 1896-1972)가 수학했던 학교이기도 하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아귀가 잘 맞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미술사가 김현숙은 1923년대는 한국 양화의 초기단계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주경 역시 화가 입문 초기 단계였다고 말하면서 이 작품이 20년대 일본에서 전개되었던 전위미술운동 중 미래파의 화풍을 시도해본 것이라 지적했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낸 숙련(熟練)되고 자신감 있게 쓴 선의 표현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언급했다.16) 위와 같은 여러 정황과는 달리, 주경은 후일 「공간」(1974년 9월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신 미술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화실방문기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서구미술(추상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음을 언급하면서 추상화를 그리게 된 동기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빚어진 자기의 비탄에 찬 감정이었다고 말한다. 즉 그의 가정은 구한말 귀족의 가문으로서 그가 미술에 관심을 나타내던 시절은 지금의 종로 중심 가의 일대 호상(豪商)의 보호를 받는 팔자 좋은 귀공자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신흥상인층의 등장으로 주경의 가정이 자체 내의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분열됨으로써 점차 몰락의 일로를 달리게 되었다. <파란>이나 <잔명(殘命)>은 모두가 이러한 비참하게 된 가정환경을 토대로 쓰여진 즉흥시라고 말한다. 또한 주경은 자신의 초기 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17) “전위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던 시절의 작품이라, 내 일일이 말 할 수도 없으며 어쩔 수도 없는 심경을 형상화하고 색채 화하며 하나의 분위기로 조성, 한풀이를 한 감회의 흔적이 작품이 되었고 구상(사실)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였던 일이 됐다. 그때, 내 나름으로는 내 딴은 세상을 초월한 심경에 꿈을 지녔다고는 혼자만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은 당하는 인생고민에 스스로 자탄(自嘆)하여 마지않는 사촌기의 번민(煩悶)과 무슨 그 동경(憧憬)말이다! 무언 지는 몰라도 눈에 선히 보이며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쑤군거리면서 꼬드기는 것이 있었다. 그 무렵이면 마치 제 서식처 아닌 모래밭 위에 생선처럼 죽을둥 살둥 제 살 곳을 찾듯이 팔딱팔딱 온갖 힘을 다해 튀어 공중으로 솟아 봤던 것이다. 그 연유는 추상화의 시발점으로, 폭약인 심지 첨단역할이었다. 이제 사 자리잡아 안정을 기하니까 호(呼) 추상화라고 명명하듯 하나 무엇이라던 간에 어쨌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경의 주장에는 약간의 모순이 나타난다. 물론 그의 14년 간 동경유학시절 후 귀국 시 그의 가정이 파탄하였음에 대해서는 사실이라 인정하더라도 1923년부터 1928까지 초기 수업시절은 위에서 예기한 몰락이니 파탄이니 하는 말들을 증명할 만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친구 정길원의 회고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가 동경 유학 14년 간에 영국신사형이며 제일 가는 멋쟁이가 되어 돌아 왔다. 미술연구 외에 그 후 다양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중략...조원(造園)을 위시하여 승마, 수영, 무용 등 나중에는 그라이다-교관(글라이더) 노릇도 하여 이름이 높았었다.” 이렇듯 무엇하나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주경이 1923년에 제작한 <파란>이라는 작품이 회한과 비탄의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내포하고 있다.
<파란>은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당시 시대상황과 주경의 경력을 비교해볼 때 너무 세련되고 치밀한 구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작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모한(?) 가정을 몇 가지 사실에서 유추해 낸 다는 사실이 무리일 수도 있지만 <파란>이라는 단 한 점의 작품이 가진 특이성은 평범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인에게도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시에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 주경이 후기에 제작한 작품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 유추해 보자.
|
|
파란(波瀾)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격렬한 운동감과 속도감을 보이는 화면 구성을 갖고 있다. 추상화에 대한 인식(認識)이 없었던 시기였기에 이 작품은 더욱 놀라워 보인다. 또한 작품 속에 드러난 속도감 있는 직선의 표현과 요동치는 곡선 그리고 강렬한 색채의 효과는 20세기 초반 미래파 화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선의 모양과 흡사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년대는 일본에 미래파미술협회가 창립되는 등 전위운동이 한참 진행되었던 시기였으며 국내에서도 미래파의 사조를 소개하는 글이 발표되는 등 당시에 미래파에 대한 소개가 활발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위에서도 언급했듯 주경이 신사조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상태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미술사가 김현숙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 나타난 선의 능숙한 표현과 구성의 치밀함 등은 미술에 입문한 초기 학생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색과 면, 그리고 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상의 구체적 이미지를 발견하는 대신 순수 기하학적 요소의 종적·횡적 그리고 평면적·입체적 배열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18) “<파란>은 구성주의적인 작품에다가 밑바닥에 낭만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은 난파된 배의 기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격동과 강렬한 운동감이 마련된 작품이다.”19)
위에서 언급된 평론가들의 글에서 알 수 있듯 <파란>은 화면에 가득 찬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대각선들로 긴장감과 속도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커다란 창 끝 같은 흰색 선은 바탕의 선과 반대방향으로 운동하면서 화면에 안정감과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화면의 전면(全面)에서 구불거리며 꿈틀거리는 곡선은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화면에 생기와 율동감을 주고 있다. 화면의 아래쪽 3/2지점을 가로지르고 있는 수평선(?)과 화면의 오른쪽 3/1부분을 절단하며 그어진 검정선 역시 치밀한 구성에 의해 전체 화면에 균형을 주고 있다.
전체화면의 배경 색으로 쓰인 청색은 화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불거리는 황색 선을 두드러지게 한다. 화면에 나타나는 붓질의 효과 역시 당시의 아카데믹한 분위기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짝 마른 붓에 물감을 묻혀 화면을 스치듯 지나간 선의 흔적이라든지 화면의 생기를 위해 자를 대고 슬쩍 그은 듯한 작은 황색 선들의 표현 등 유화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아주 익숙하게 물감을 다루는 숙련된 손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한 모방으로 보기엔 그 특징이 남다르다. 즉 <파란>의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당시 일본의 미래파 작품과 이탈리아 미래파 작품을 비교해보면 주경의 작품이 가진 특징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루이지 룻솔로(Luigi Russolo)(도판2,3)의 작품과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도판4)의 작품에서 보이는 속도에 대한 찬미는 당시에 획기적으로 성장한 자동차 등의 현대문명과 관련이 있다.
이들이 화면에 속도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들은 바로 반복적 형태와 일정한 선의 구도, 청색과 적색 등 강렬한 색채의 대비였다. 룻솔로의 작품에 나타나는 삼각형 형태의 선의 형태와 방향성, 지아코모 발라의 작품에 보이는 면의 분할과 마른 붓으로 그어댄 듯한 선의 요소 등은 <파란>에서 찾을 수 있는 미래파적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파란>이 가진 주제의 요소는 기계문명과 속도에 대한 예찬과는 반대의 주제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파란>에서 보이는 선들은 파괴와 해체의 선이며 구불거리는 곡선은 파괴된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과도 같다. 작품의 오른쪽 배경에 보이는 단속적인 선들은 연기 속에서 공습을 감행하려는 폭격기들이 궤적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단순히 형식적인 면을 베끼는 것 외에 <파란>이 보여주는 구성이나 주제적 측면은 미래파와는 대조되는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다. 또한 당시 일본의 미래파 미술을 이끌었던 普門 曉(Fumon, Gyo 1896-1972)의 작품(도판5)은 주제와 형식의 측면에서 미래파와 함께 청기사파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도판6)와 비슷한 화풍을 보인다. 위와 같이 당시 이탈리아와 일본의 미래주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파란>이 단순히 형식을 베껴본 작품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굉장히 치밀한 구성 계획 하에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파란>은 작가가 이야기하듯 단순히 비참하게 된 가정환경에서 사춘기의 번민(煩悶)으로 제작된 작품, 어찌하다보니 만들어진 그런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렇듯 끊임없이 의문이 떠오르게 만드는 요인은 당시 주경이 <파란>과 같은 형식의 작품을 단 한 점 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1923년 당시 그린 다른 작품들은 어떠했을까?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選集)」의 표지에 실린 1923년 작 <정물>(그림7)은 당시의 전형적인 구도의 정물화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파란>을 그린 작가가 그림 솜씨로 보기엔 구도나 표현 방법이 다소 미숙(未熟)해 보인다. 작은 황갈색 단지와 유리컵, 과일을 받치고 있는 검정 표지의 책은 원근법(遠近法)이 맞질 않고 뒤쪽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유리컵을 억지로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물체의 그림자 표현도 허술하여 화면 오른쪽의 책과 과일 유리컵을 연결하는 그림자는 서로 어정쩡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또한 테이블이 끝나는 지점과 책의 끝선, 작은 단지의 왼쪽으로 슬그머니 내려간 선의 표현 역시 어설프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유리컵이나 작은 단지의 책의 표지의 질감 등이 제대로 표현되었으며, 물체들을 위로 배치하고 하단부분을 비워놓은 배치는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그림은 전형적으로 유화에 입문하고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훈련으로 제작된 초기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당시에 제작된 다른 작품에서는 도저히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주경의 후기 작품 중 1959년 작 <경음악(輕音樂)>(도판8)은 유일하게 <파란>에서 보이는 선과 면으로 구성된 추상회화이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음악을 표현한 것이다.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면들은 큐비즘 양식으로 해체되어 구성된 피아노 혹은 건반악기를 연상시킨다. <파란>과는 달리 수직으로 내려긋는 선들은 규칙적이며 간혹 대각선으로 그어지는 선들이 겹쳐지면서 불빛의 효과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규칙적이며 경쾌한 리듬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그러나 <파란>에서 보여주는 치밀한 구성이나 운동감, 색채의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도판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어 색채에 대한 감각을 확인 할 수 없으나 <파란>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칠해진 단순한 구성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경은 <파란>의 제작 이후에, 1930년 <생존>이라는 앵포르멜 계통의 순수 추상작품을 제작하였으나 이후 주목할 만한 추상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고 주로 자연을 주제로 한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리게 된다.
|
|
주경은 <파란>외에도 1930년에 또 다른 획기적인 경향의 작품인 <생존>(도판9)을 제작하였다. <생존>(1930) 역시 1930년 당시 미술계의 상황으로 보면 굉장히 획기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50년대 후반에 나타난 앵포르멜적 경향의 혁신적인 작품이다.20) 주경이 당시로서는 유래가 없었던 이런 획기적인 작품들을 화가 입문 초기수업 단계에 제작했다는 사실은 의구심이 들만큼 너무 앞선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국내 미술계는 <파란>이나 <생존>과 같은 추상화 작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주경의 추상화가 주목받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주경의 초기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너무 획기적인 작품을 단지 두 점 제작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논의대상이 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일관된 작품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이 확보되어야함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작품을 제작했더라도 단지 모방하는 차원에서 한번 시도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평가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경성도 주경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끌어나가지 못한 사실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1)
“다만 아까운 것은 이와 같은 작업이 계속되지 않고 이 한 점(생존)의 작품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1930년대 하면 한국미술 전체가 모방(模倣)기라서 모든 사람이 서양의 현대미술을 모취(摸取)하든 때이라 주경 역시 서양의 어느 작품에 자극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시각으로서 이 앙휘르멜계의 작품에 눈이 갔다는 것은 주경의 시각(視覺)이 그 만큼 앞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주경이 이와 같은 전위적 작업을 그만두고 사실의 세계로 돌아갔는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추측하건대 그의 특론(特論)에도 있듯이 자연에의 애착이 있기에 모처럼의 전위적 실험을 그만 둔지도 모르겠다.”22)
본론의 글에서도 언급했듯 주경의 <파란>은 1923년 그의 나이 18살, 화가 수업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는 능숙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파란>은 제작이후 1974년 개인전에 출품될 때까지 전시를 갖거나 공모전에 출품했던 기록이 없다. 그리고 화면의 왼쪽 아래편의 사인은 영문과 한문으로 이름이 적혀있으며 영, 한문 이름 중간에 넣어지는 제작연도는 확인이 곤란할 지경으로 훼손(毁損)되어있다.
또한 제작 당시 상황에 대한 주경의 기억 역시 너무 모호하다. 위의 글에서도 언급했듯 그의 스승이었던 동경 유학생 이종우의 가르침과 전위운동을 소개한 여러 기사에서 추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되나, 작가는 당시 전위 미술(추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의혹을 갖게 한다.
또한 당 해 년도에 제작된 <정물>과 비교해 보았을 때 표현방법과 붓질의 표현 등은 한 작가가 같은 시기에 제작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1959년 작인 <경음악>과의 비교에서도 <파란>의 제작당시 보여줬던 극적 구성과 치밀한 선의 표현, 표현적인 강렬한 색채 등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1974년「공간」지의 주경 특집에서는 주경의 1970년대 추상회화 <祈求>(도판11), <겨울은 나를 보고 있다>(도판12)와 를 소개하고 있다. 넓은 색면(色面) 추상 계열의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과는 또 다른 경향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경의 몇몇 작품들은 주경이 가진 여러 취미활동과 같이 다양한 경향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
|
1) 백우회는 주경이 일본 유학 중 1932년 김용준 이마동 등이 귀국한 후 조선미술학우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을 가진 것이 시초이다. 이후 1935년 백의민족의 소같이 굳센 힘을 뜻하는 白牛會로 명칭이 바뀌어
발족하게 되었으며 1937년 일제의 압력으로 재동경미술협회(在東京美術協會)로 개칭되었다.
백우회는 1943년 제 6회 전시를 마친 후 국민총력연맹에 흡수되었다.
2) 이애재, 『주경의 예술과 생애』 성신여자 대학교 대학원, 1988, p.3. 주경의 일기 재인용.
주경의 출생지에 대해 이경성은 공간74년 9월호의 글 ‘주경의 생활과 예술’에서 서울 종로 2통 5호라고
기재하고 있다.
3) 위의 책, p.3.
4) 그의 집안에 대해 그의 친구였던 정길원 박사는 1974년 공간지 9월호에 ‘주경형과 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부친은 개서( 書)에 능하였고 중앙서관을 이관, 종로 3가를 선대육형제가 주씨
가로 누비어 번영(繁榮)을 이루었다. 우이동에 별장과 파주에 별장이 있었고, 서울 장안에서 민간으로
와기(瓦期), 수도, 전화를 처음 지닌 집안도 또 불로정(不老亭)이란 양요리(洋料理)집을 낙산봉산에 처음
건립하고 씰크햇에 연미복 차림으로 지난 일, 한때는 단성사 화신자리에 금은 보석상, 지물포, 포목상,
무역상 등 다채로웠다.”
5) 이애재, 『주경의 예술과 생애』 성신여자 대학교 대학원, 1988, p. 4
6) 위의 책, p. 4
7) 그는 1922년에 심영섭등과 「동무회」를 조직하였으며 1923년 그것을 확대하여 「미술동우회」를 조직
하였다. 동인으로 구본웅, 심영섭, 김연선, 이길수 등이었다.
이경성, “주경의 생활과 예술,” 공간(74년 9월), p. 17.
8) 이렇듯 주경은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당시 최첨단 엘리트였던 동경유학생 출신 화가들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하였다. 주경의 추상 작품인 <파란>의 제작연도가 1923년이므로 바로 이시기에
주경이 서구 추상미술을 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를 가르친 고희동과 이종우, 그리고 당시의 잡지
등에 개재된 서구 미술동향을 소개하는 글 등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조에 대한 이해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9) 주경은 초기 화가 입문 기에 주로 데생을 익혔으며 일본 유학 후에도 천단화학교에서 4년간 주로 데생을
위주로 공부했다. 아마도 당시 이종우와 김복진을 비롯하여 주경을 지도한 교사들의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지며 1927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종우에게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
어진다. 또한 주경이 천단화학교 4년 수학 후 프랑스 유학을 위해 준비한 것도 이종우의 프랑스 유학을 접
하면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10) 그의 친구였던 정길원 박사는 공간(1974년 9월호, “주경형과 나”)지에서 “그는 동경유학 14년간에 영국
신사형이며 제일 가는 멋쟁이가 되어 돌아왔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경의 다양한 방면에 대한 관심에
대해 “미술연구외에 그 후 다양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문자에도 조예가 깊어 춘원(春園)선생의 총애(寵愛)
를 받았다. 영화(자막, 포스터, 월간지표지도 많이 휘호(揮毫)함) 조원(造園)을 위시하여 승마, 수영,
무용(舞踊)등 나중에는 그라이더(글라이더)-교관 노릇도 하여 이름이 높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렇듯
주경은 당시 뿐 아니라 지금도 고급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었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음
을 알 수 있다.
11) 윤범모, “현대미술 100년<29>”, 한국일보 1983년 10월 29일
12) 윤범모, 『한국근대미술의 형성』 미진사, 1988, pp. 327-333
13) 이경성, “현대의 미술(현대미술관회 뉴스 32호) : 근대미술 감상9”, 현대미술관회, 1984
14)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800-1945 한국미술사사전)』 열화당, 1998, p. 123
15) 앞의 책, p.151
16) 동아시아 근대 유화 - 유화의 탄생과 전개(Oil Painting in the East Asia - Its Awakening and
Development)전 도록, 靜岡현립미술관, 兵庫현립근대미술관, 德島현립근대미술관, 宇都官 미술관,
福岡아시아미술관, 1999, p. 140
17) “주경의 추상”, 「공간」, 1974년 9월, 1974, p. 22
18)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55, pp. 52-53
19) 이경성, “현대의 미술(현대미술관회 뉴스 32호)”, 1984, p.1
20)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공간(空間, 1974년 9호)지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930년작 <생존>은 더욱더 놀랄만한 전위작품이다. 노란 바탕 위에 화면 가운데를 대각으로
흐르는 움직임을 주고 그 움직임을 빨간색과 황*색으로 처리한 그 표현은 바로 20세기 후반에 세계를
휘몰아친 앙휘르멜(앵포르멜)의 대표작가 뽈스(도판10)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조형적 효과(구도
색감, 마치엘, 정신성)가 그대로 낱낱이 실현되지 않았는가. 앙휘르멜 운동이 시작도 되기 전 뽈스의 작품이
나오기 전에 이와 같은 작품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사실이고 한국근대미
술사의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21) 이경성, “주경의 생활과 예술”, 『공간』, 1974년 9호, p.18
22) 주경은 화가로서의 일생에서 자연을 예술의 모체(母體)로 그의 순수한 활용 속에만 예술은 성립된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의 피조물로서 언제나 자연에 대해서 겸허한 자세로 대하며 자연을 그렇게
믿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순화되었을 때 그것이 “실상”이며 실상을 표현해야 한다.”라는 그의 말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 고 문 헌
* 단행본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5
윤범모, 『한국근대미술 -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 한길아트, 2000
------, 『한국근대미술의 형성』, 미진사, 1988
이경성,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석남고희기념논총간행위원회 편, 1988
지오반니 리스타, 정진국역,『미래파』, 20세기미술운동총서 10, 열화당, 1988
최 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800-1945 한국미술사사전)』, 열화당, 1998
* 도록 및 신문기사
근대를 보는 눈(한국근대미술 : 유화), 국립현대미술관, 삶과 꿈, 1997
윤범모, “현대미술100년-주경”, 한국일보 1983년 10월 29일(토요일)자 기사
주경회고전(1974.10.13 - 19),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1974
주경초대전(1976.11.23 - 12.5), 맥향화랑, 1976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집, 42권 - 주경, 삼성출판사, 1977
한국근대미술 60년, 국립현대미술관, 1972
* 잡 지
이경성, “근대미술 감상 - 주경의 「파란」”, 현대의 미술 32호, 1984
“주경의 추상(특집기사)”, 공간 1974년 9월호, 공간사, 1974
“작가들을 재평가한다”, 계간미술 1979년 10호, 1979
“1930년대 동경유학생과 아방가르드 - 재미작가 김병기 화백 증언”, 공간 1994년 7,8월, 1994
* 논 문
이애재, 『주경의 예술과 생애』, 성신여자대학교대학원, 1988
전수경, 『주경의 작품 세계에 나타난 표현의 근원과 특성』 경북대학교대학원, 1998
* 외 서
日本の 近代美術7(前衛美術の 實驗), 大月書店, 1993, pp.49-58
동아시아 근대 유화 - 유화의 탄생과 전개(Oil Painting in the East Asia - Its Awakening and Development)전 도록, 靜岡현립미술관, 兵庫현립근대미술관, 德島 현립근대미술관, 宇都官미술관, 福岡아시아미술관,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