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미술관의 사회적 기능

최태만(학예연구사)

Ⅰ. 현댸사회의 문화적 징후들
Ⅱ. 미술관의 역사
Ⅲ. 미술관학의 역사와 이념		 Ⅳ. 문화적 참여제도:개방적 미술관의 요청
Ⅴ. 미술관문화 정립의 몇 가지 조건들
Ⅵ. 문화발전론에서 본 국립현대미술관과 미술관의미래
Ⅱ. 미술관의 역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값진 물건이나 전리품, 신에게 봉헌할 물건들을 모아 보존한 역사는 참으로 오래되며 그것이 인간의 박물(博物)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세계에서 형성된 미술관이란 용어의 어원을 고려해 볼 때 미술관의 역사는 기원전 600년경 헬레니즘 시대의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 스 왕조가 학예의 여신 뮤즈를 경배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신전인 뮤제이은(Mu- seion)으로까지 거슬러 을라간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종교 적 이유로 값진 물건을 무덤 속에 부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신전 한 켠에 시민들이 신에게 헌납한 봉납물을 모셔놓는 보물창고(Opistodom)가 있었으며 이러한 저장행위가 수집 및 보존이란 맥락에서 미술관의 발생에 대해 암시해 주는 측면이 있으나 오늘날 서구에서 미술관이란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MUSEUM'의 어원이 뮤제이온이었음을 주목할 때, 또한 이곳에 신전 뿐만 아니라 도서관, 강당, 강의실, 동 ·식물원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시설을 포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이야말로 대학이나 연구소의 전신(前身)이며 아울러 최초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는 종교적, 제의적(祭譏的)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차원에서 문화재를 수집하고 집안이나 정원을 장식하는 일이 성행했으며 그것은 대 체로 권세가들의 권력이나 부, 명예를 자랑하기 위한 물신숭배적, 속물근성적 성격 을 띠었다.

이민족 국가를 정복하였던 로마제국의 장군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집 안과 정원을 전리품들로 치장함으로써 숭리를 회고함은 물론 권력과 명예를 과시하 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탈할 수 있는 문화재의 수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조각작품을 복제했다.

그리스에서 포로로 잡혀온 수많은 장인들에 의해 복제된 조각품들이 오늘날 그리스 조각의 원 형을 연구하는데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신학이 지배하던 중세시대는 당연히 보물창고의 역할을 교회와 수도원이 담당했 었으며, 특히 수도원은 우상파괴운동을 거치면서도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화재를 잘 보존하였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문화의 '재생'이란 의미를 지닌 르네상스미술의 형 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이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미술관의 맹아가 나 타났다.

교황 식스투스 14세가 로마의 중앙청(Capitole)에 조성한 '고전 유물 보관 실' (Antiquarium)이나 토스카나 공작이 바사리(G, Vasari)에게 의뢰하여 자신의 집무실을 전시장으로 꾸민 '우피치갤러리아' -우피치란 집무실을 의미하며 이것으로 부터 오늘날 화랑을 지칭하는 갤러리란 말이 탄생한다- 그리고 17세기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당시 재상이던 콜베르에게 명하여 루브르에 마련했던 '아폴로화랑' (Apollon Galerie) 등이 초기 미술관의 대표적인 유형이었던 것이다 이런 전시장의 경우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것이라기 보다 제한된 특권층만을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미술관의 전형을 갖추었 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최초의 미술관 역사는 프랑스 혁명기에 국민의회가 루브르 궁을 접수한 후 이를 개조하여 중앙미술관(Musee Central des Art)으로 개관, 과거 왕족이나 귀족이 독점하다시피 한 문화재나 보물, 미술품들을 일반시민들에게 공개 하면서 시작되었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일반시민들의 교육을 위해 공 개한다는 것은 물론 계몽주의자들의 발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후 서구사회에서 미술관 설립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이미 1683년에 최초의 대학박물관이자 인류학박 물관이라 할 수 있는 옥스포드 애쉬몰럼박물관(Ashmoleum Museum)의 뒤를 이어 1753년에 설림된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관이 탄생하였 다. 그러나 그때 이미 테오필 토레(Theophile Thore)와 같은 진보적 계몽주의자에 의해 미술관이 (미술의 공동묘지)로 비판받았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즉 수집 보존 에만 주력하는 보물창고로서의 미술관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이 의제기가 미술관 설립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설립의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광범 위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영국은 1845년 (박물관법)을 제정, 미술관이 단순 히 보물창고로서가 아니라 시민의 공공교육 기관이자 사회 봉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라는 점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프랑스 대혁명과 산 업혁명에 의해 유럽사회가 보다 발전적인 양상을 보이자 미술관 또한 급속하게 확 산되였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에 힘입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식민지개척에 앞장설 당시에 인류학박물관이 많이 창설되었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하게 만든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오늘날 빅토리아와 알버트미술관으로 잘 알려진 수정 궁(Crystal Palace)의 건립이었다. 1851년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유리와 철 골구조를 주로 사용하여 건립한 이 건축물은 당시로서 가장 최근의 혁신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경우 1773년에 미국 최초의 차스톤박물관(Chareston Museum)이 개관한 이후 1846년에는 국립스미스소니언박물관(Smithsonian Museum)이 설립되었고 1870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개관하였다. 새로운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계획은 20세기 초반 경제적 부흥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미국에 서는 정부가 직접 미술관을 설립한 경우보다 산업화의 성공에 따라 등장한 신흥재벌의 지원에 힘입어 수많은 미술관들이 양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설립된 경우가더 많았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수한 미술관으로 알려진 뉴욕근대미술관(Museum ofModern Art, 1929)이 록펠러 등의 기업가의 후원에 힘입어 개관하였으며, 미국 미술을 진흥하기 위 해 당시 현대미술의 후견인이자 수장가였던 휘트니여사가 휘트니미국미술관(Whiney American Museum of Art, 1931)을 설립하였고 뒤이어 구겐하임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1937)과 재무장관을 지냈던 앤드류맬런이 자신의 소장품을 미 술관 설립기금과함께 기증함으로써 워싱턴에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1941) 이 이 시기에 세워졌던 것이다.

미국에서 이렇게 많은 미술관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겠지만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신대륙으로 몰려들었고, 뉴욕에 노동력 및 자본의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국제도시로 급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편 으로는 경제적인 팽창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험미술에 개방   적이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과 달리 미술의 전통이 극히 미약한 미국에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과 미술관의 설립이 기업가의 사회적 지위를 보호하는데 더 없는 장 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술관의 팽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자 미술관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에노(上野)의 국립 서양미술관, 동경도미술관(車京都美術館) 등과 더불어 비교적 최근에 기업들에 의해 설립된 하코네미술관(箱根彫刻の森) 등 일본의 일본의 각 현 (縣), 시립미술관은 물론 사립박물관 ·미술관까지 합치면 그 수는 1980년대 중반 현재 약 4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미술관의 양적 증가가 미술관문화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충분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술관의 팽창이 미술문화의 보급과 확산이란 긍정적 인 측면을 지님과 동시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제기가 이미 계몽 주의 시대와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몇몇 문필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우 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단적인 예로 과거에는 종교적 맥락으로 제작되고 특정 한 장소에 봉납, 경배되었던 신성한 물건들이 오늘날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으로 보 존되는 것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논법을 빌리자면 예배가치(kultwert) 로부터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로 그 가치가 전도되었음을 의미한다. 벤야민과 다른 차원에서 발레리(Paul Vallery)는 미술관이 미술작품에 고유한 유일성을 보편성 이란 이름 아래 폐기시켜버린다고 경고하였다.

개별작품에 대한 발레리의 미적 물 신주의는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의 역사주의에 의해 지양되었던 바 그는 미술 관이 지닌 속성과 미술관이 풍기는 권위적 분위기에 대해 주목하고 시공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벽이 없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상상미술관)(Musee Imaginaire)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이 미술관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던 것은 문화의 특수 성이 아니라 보편성이었으며 우주적이고 영원하며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지닌 걸 작들을 이 세계 속에 모두 담고자 했다.

그러나 복제기술에 바탕한 말로의 상상 미술관이 원작의 분위기(aura)를 얼마나 보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는 여전히 논란 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게다가 (앙코르와트) 로부터 (윈깡석굴)에 이르기까지 상상 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말로의 상상미술관은 디드로식의 계몽주의적 이상, 즉 진보 의 연속성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공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항구적인 문화적 가치물 로서의 예술작품이란 이념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예술의 신비화를 더욱 가중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