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황규백, ‹하늘에 모자›(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유화 물감, 122x10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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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된 회화, 황규백 ‹하늘에 모자›
범속한 일상, 시적 도약을 꿈꾸다
푸른 하늘에 뜬 하얀 보름달, 모호한 수평선 아래 심연과 같은 바다-하늘이 아니라 바다라고 하는 이유는 가라앉는 듯한 나룻배 때문이다. 이 역시 배가 아닐지도…-, 대낮처럼 환한 발코니, 마주 보이는 견고한 성, 그리고 둥실 떠다니는 중절모. 황규백(黃圭伯, 1932년생)의 ‹하늘에 모자›는 사물과 배경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했지만, 일상성에서 살짝 벗어나는 것만으로 보는 이를 신비한 세계로 이끈다. 여기서 모티프가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라면 ‘이미지 그 자체’가 주는 신비,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해답과는 다른 차원의 해답을 즐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늘에 모자›는 오랫동안 뉴욕에서 판화가로 명성을 날리던 작가가 2000년대 초반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린 회화 작품이다. 일흔이 넘으면서 육체적 한계로 판화 작업이 어렵게 되자 작가는 자연스럽게 회화로 전향했다.
작가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메조틴트(mezzotint) 작품을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17세기 전후 유럽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메조틴트는 동판화의 일종으로, 약품을 이용해 판면을 부식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동판 표면에 로커(roker)라는 톱니 모양의 예리한 날을 지닌 조각도로 무수히 많은 작은 구멍을 만든 다음, 뷰린(burin)이라는 도구로 이미지를 새긴 후 동판 전체에 잉크를 덮고 그 위에 종이를 올려 강하게 찍어낸다. 오래된 동판화 기법인 에칭이 선으로 이미지를 만든다면 메조틴트는 흑과 백, 혹은 색조의 짙고 옅음(톤)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덕분에 회화와 같은 명암, 미묘한 톤의 변화, 부드러운 묘사, 표면의 광택 표현이 가능하지만, 제작 과정이 까다롭고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금은 소수의 작가, 장인만이 메조틴트를 제작한다. 전(前) 브루클린미술관 큐레이터 조 밀러(Jo Miller)는 독학으로 메조틴트 기법을 습득한 황규백을 “음각 판화의 위대한 실험자”라 부르며 “시적인 구도 안에서 인생을 관조한다”라고 평했다.
황규백, ‹잔디 위의 하얀 손수건›(1973)
종이에 메조틴트, 33.3x27.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 ‹분홍색 손수건과 달걀›(1973)
종이에 메조틴트, 42x3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 ‹사다리›(1979)
종이에 메조틴트, 66x5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늘에 모자›에서 보이는 신비, 서정성, 환상적인 분위기는 뉴욕 정착 초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리에서 3년 정도 머물다 미국으로 건너온 작가는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중 뉴욕 근교의 한 공원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평상시처럼 호숫가에 누워있던 어느 날 오후, 작가는 햇살에 눈이 부셔 손수건을 꺼내 하늘을 가렸다. 그때 하늘, 잔디, 손수건이 만들어 낸 이미지가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고, 이후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작품으로 튀어나왔다. 일상에서라면 낯선 조합인 손수건과 기둥, 손수건과 사다리가 그의 회화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며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하늘, 잔디, 손수건 외에도 그의 메조틴트 작품에는 해, 달, 구름, 돌, 꽃, 나무, 새, 나비, 악기, 커튼, 창문, 우산, 모자, 그릇 등의 모티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생물과 무생물, 낮과 밤이 무심하게 공존하고, 병치될 것 같지 않은 사물들이 우연하게 만나고, 때로는 한 사물이 기대되는 기능이나 역할에서 벗어나며, 크기나 위치 등 물리적 속성이 무시되는 등 황규백의 작품은 지금껏 무관심했던 일상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제시한다. 이로써 범속한 사물과 상투적인 일상이 시적인 차원으로 도약한다.
황규백, ‹우산›(1981)
종이에 메조틴트, 35x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 ‹안경›(1983)
종이에 메조틴트, 30x3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는 내 작품에서 사물을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가장 평범한 사물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것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황규백, ‹꽃-S(마그리트에게 표하는 경의)›(1976)
종이에 메조틴트, 33.3x27.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의 작품은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를 떠올리게 한다. 황규백 작가의 말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의 인용도 사실 마그리트의 것이다. 실제로 황규백은 마그리트를 직접 오마주 할 정도로 그의 예술세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 입체주의적, 미래주의적 작품을 발표했던 마그리트는 1923년 로트레아몽 백작(Comte de Lautréamont, 1846~1870)의 시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 de Maldoror)」를 회화로 재해석한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작품 ‹사랑의 노래(Le Chant d’Amour)›를 접하고 초현실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후 마그리트는 서로 상관없는 사물과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특유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의 작업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1924)에서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2-1966)이 강조했던 자동기술법(automatisme)을 과감하게 버린 것이었다. 또한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열광했던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이나 그러한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무의식보다는 현실의 신비에 집중했다. 현실에 대해 논리적,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마그리트는 유물론적인 초현실주의를 제창하며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초현실주의와 다른 길을 제시했던 벨기에 출신의 시인 폴 누제(Paul Nougé, 1895~1967)에게서 난제를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 마그리트는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로트레아몽의 유명한 시 구절을 소위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사용해 화면 위에 펼쳤다. 황규백의 작업 역시 사물의 이질적인 만남을 통해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작업이 그 모순과 역설의 정도가 극단적이고 철저히 이성적 과정에 의해 탄생하기에, 관습적인 기존의 사고를 부수는 ‘파괴 효과’가 더 강렬하고, 그만큼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이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면, 보다 평안한 분위기의 황규백의 작업은 서정적이고, 소음으로 가득한 시대에 –작가의 말대로-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사실 황규백의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가 파리에 머물 때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국 전쟁에 참전 후 상경하여 1954년부터 1967년까지 미술 단체인 ‘신조형파’와 ‘신상회’에서 활동했다. 새로운 창작에 대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1968년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 정착한 직후 작가는 ‘에콜 뒤 루브르(École du Louvre)’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영국 출신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Stanley William Hayter, 1901~1988)가 1927년 파리에 설립한 판화 공방 ‘아틀리에(Atelier) 17’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헤이터는 판화가 단지 같은 이미지를 대량생산하는 도구, 드로잉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통찰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위한 과정이라 간주했고 판화 제작 매 단계마다 미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공방이 오픈했을 때 피카소(Pablo Piccaso), 미로(Joan Miró), 에른스트(Max Ernst),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 만 레이(Man Ray) 등 초현실주의자들이 참여했고, 헤이터도 점차 “영감의 원천은 무의식”이라 여기고 학생들로 하여금 판화 작업 전에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자동기술적인 드로잉을 해 볼 것을 독려했다. 나치 침공으로 1940년대에 뉴욕으로 공방을 잠시 옮겼을 때도 아틀리에 17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아지트와 같았다. 세대와 국적, 전공을 뛰어넘는 협업과 다양한 실험이 가능했던 ‘아틀리에 17’은 명실공히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판화 공방으로 평가받는다.
황규백, ‹진화›(1969)
구리에 납땜, 새김, 52.3x4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 ‹역사의 기록›(1970)
구리에 납땜, 새김, 42.2.x38.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규백이 ‘아틀리에 17’에서 수학하며 제작했던 작품들은 한국에서 했던 회화작업과 연장선상에 있는 추상경향의 연작들이다. 구리에 납땜과 새김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들은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면서 얻은 우연적인 효과와 독특한 물성을 특징으로 한다. ‘진화’, ‘역사의 기록’이라는 제목처럼 이미지는 고대 언어인 상형문자나 오래된 탑을 연상시킨다. 화면 위 흔적이 작가의 상상력과 환각적 해석을 매개로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펼쳐지는 신비스런 효과는 에른스트가 시도했던 ‘프로타주(frottage: 돌출된 문양 위에 종이 등을 놓고 마찰시키는 방법)’나 ‘그라타주(grattage: 두껍게 물감을 칠한 다음 표면을 긁어내는 방법)’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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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디오에는 클로바더빙(CLOVA Dubbing)의 AI 보이스가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