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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몬의 유출 경위를 추수(TZUSOO)에게 듣다

전시정보

아가몬의 유출 경위를 추수(TZUSOO)에게 듣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우리는 커다란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낯선 존재들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연약한 피부에 털이 난,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낯설게도 느껴지는 조각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MMCA×LG OLED 시리즈 2025: 추수 –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조각 설치 ‹아가몬›과 이를 둘러싼 두 개의 영상 작품 ‹살의 여덟 정령›이다.
«MMCA×LG OLED 시리즈 2025»의 첫 주인공인 추수(TZUSOO)는 서울박스를 단순한 감상 공간이 아닌 정령과 아가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변모시켰다. 카펫을 딛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서 그들과 소통하는 셈이다. 관능적이고 기묘한 미감으로 구축된 추수의 세계속으로 들어가 그 서사와 메시지를 들어보았다.
전시 구성 및 작품의 배치가 인상적입니다. ‘서울박스’를 특정한 포털로 설정한 점도 돋보였는데, 이러한 구성을 생각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제목 ‹살과 여덟 정령›은 세 개의 아가몬 세계를 관장하는 여덟 정령을 가리킵니다. 정령들의 이름은 동양의 팔괘(八卦)에서 착안했고, 건(乾), 곤(坤), 감(坎), 리(離), 진(震), 손(巽), 간(艮), 태(兌)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죠. 각각은 동·서·남·북의 팔방을 지키는 수호자이고요.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는 그중 두 정령인 ‘간’과 ‘태’가 ‘잠금 해제’되며 관람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인데, 이 정령 외에도 여덟 정령 모두가 성(性)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이전부터 ‘여기(서울박스)에서 전시하기는 정말 어렵다’라는 인상을 받곤 했어요. 저에게는 구조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전시 공간이었거든요. 그래서 직접 이곳을 디자인하게 됐을 때, 관람객이 카펫을 밟고 들어서는 순간 마치 포털에 소환된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게임적인 상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죠. 실제로 대형 스크린을 남쪽과 북동쪽에 위치시켰고, 그 방위에 있는 정령들이 포털을 통해 깨어나고, 중앙의 아가몬 인큐베이터와 아가몬 역시 소환된 듯한 설치를 구상했습니다.
  • 추수, ‹살의 여덟 정령—간›(2025) 영상, 컬러, 사운드 음악: 마르텐 보스 / 3D 그래픽 팀: 로이드 마크바트, 지언 쾨니히 / 에디팅 어시스턴트: 김소희
    추수, ‹살의 여덟 정령—간›(2025) 영상, 컬러, 사운드 음악: 마르텐 보스
    / 3D 그래픽 팀: 로이드 마크바트, 지언 쾨니히
    / 에디팅 어시스턴트: 김소희
  • 추수, ‹살의 여덟 정령—태›(2025) 영상, 컬러, 사운드 음악: 마르텐 보스 / 3D 그래픽 팀: 로이드 마크바트, 지언 쾨니히 / 에디팅 어시스턴트: 김소희
    추수, ‹살의 여덟 정령—태›(2025) 영상, 컬러, 사운드 음악: 마르텐 보스
    / 3D 그래픽 팀: 로이드 마크바트, 지언 쾨니히
    / 에디팅 어시스턴트: 김소희
  • «MMCA×LG OLED 시리즈 2025: 추수 –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 전시 전경
    «MMCA×LG OLED 시리즈 2025:
    추수 –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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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수 –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 전시 전경
작가님의 작품에서 ‘성(聖/性)’은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성스러운(聖) 모성의 이미지와 섹슈얼한(性) 표현이 동시에 드러나는데, 어디에서 영향을 받으셨나요?
이 작업은 매우 관능적이고 섹슈얼한 작업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과, 꾸준히 다뤄온 모성, 임신, 출산이라는 주제와 깊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이러한 주제를 단순히 성스럽게만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성모 마리아와 같은 상징에서 모성은 지나치게 성화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저는 오히려 성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힘과 성스러움이 교차하는 지점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미술이나 문화적 표현 속에서 여성은 늘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왔다고 생각해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성녀–창녀 콤플렉스(Madonna–Whore Complex)’처럼, 여성을 숭배할 수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나 성적 대상으로만 소비되는 이미지로 구분해 온 것이죠. 디지털 세계, 게임, 그래픽에서도 유사한 방식이 반복되고 있고요. 하지만 제게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연결된 경험이라, 성스러운 것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굳이 나누고 싶지 않았어요. 이것들이 결국에는 다 우리의 삶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모성과 엄마라는 주제, 성적인 이슈를 함께 다루고 싶었고, 이번 작업 역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해 ‹아가몬›을 탄생시켰습니다. 그것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확장된 아가몬의 세계를 상상할 때, 자연스럽게 성과 연결됐죠. * 성녀-창녀 콤플렉스(Madonna-Whore Complex): 남성이 여성을 ‘존경할 수 있는 대상’과 ‘성적으로 욕망하는 대상’으로 이분화한다고 보는 이론
“저는 불편한 감각과 짜릿함,
귀엽지만 징그러운 감각의 간극에서 줄타기하는 걸 좋아해요.”
  • 추수 작가 ⓒ강민구
    추수 작가 ⓒ강민구
  • 추수, ‹아가몬 5›(2025) 우뭇가사리, 이끼, 피어싱, 15×13×18cm, 협업: 독립정원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추수, ‹아가몬 5›(2025) 우뭇가사리, 이끼, 피어싱, 15×13×18cm, 협업: 독립정원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살의 여덟 정령› 시리즈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두 층위로 나뉜 듯 보입니다. 섬과 정령들이 등장하는 구조를 어떻게 구상하셨나요?
영상은 섬들을 보여주면서 시작돼요. 여덟 개의 섬이 있고, 그중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개의 섬에서 ‘간’과 ‘태’가 깨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둘이 서로를 처음 발견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장면도 있고요. 각 정령은 성격과 가치관이 다른데, 예를 들면 ‘간’은 한 몸에 세 개의 성적 정체성이 혼합되어 있어요. 규범적 정상성과 퀴어성, 여성성이 충돌하는 캐릭터죠. 처음에는 머리 셋을 가진 캐릭터로 디자인했는데, 그 머리들이 한 몸에서 부딪혔다가 사회에 나오면서는 규범적인 머리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잘려 나간 거예요. 남은 머리들은 죽은 건 아니고 목에 입 같은 흔적으로 진화하여 여전히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이 외에도 디테일한 설정들이 있는데, 이번에는 보여줄 수 있는 만큼만 유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명도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이에요. ‘대백과’라고 하면 끝나야 하잖아요. 아가몬 세계가 유출되기 시작한 정황을 담고 싶었거든요. ‘태’는 가슴과 유두에서 진화한 캐릭터이고, 상처와 질병에 관련된 정령입니다.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좋은 면만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성병, 상처 같은 것도 큰 부분인데 잘 표현되지는 않죠. ‘태’는 오돌토돌한 돌기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예요. 여리고 겁이 많지만 동시에 호기심 많은 성격을 반투명한 몸으로 디자인했습니다. ‘간’과 ‘태’는 결국 섬들의 한 가운데 있는 통로로 빠집니다. 수면 아래에서는 무의식의 세계가 펼쳐지죠. 자유롭게 크기가 변하며 성행위를 은유하는 동작들을 보여줍니다. 저는 불편한 감각과 짜릿함, 귀엽지만 징그러운 감각의 간극에서 줄타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아슬아슬한 장면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다는 점이 제게는 도전이었습니다.
추수, ‹살의 여덟 정령—태, 간›(2025)
추수, ‹살의 여덟 정령—태, 간›(2025)
드로잉과 디지털 작업 방식을 교차해서 작업하시는 만큼 제작 과정도 까다로웠을 것 같습니다. 실제 제작 과정은 어땠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회화 기반의 작가예요.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다를 뿐, 그 안에서 나만의 스타일을 어떻게 구현해 내느냐가 아주 중요해요. 예를 들어 단순히 프로그램에 만들어진 풀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제가 그린 풀이나 꽃을 3D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직접 만들죠. 그래서 처음에는 손으로 드로잉을 많이 합니다. 그걸 바탕으로 3D 프로그램 블렌더에서 모델링을 시작해요. 뼈를 심고 근육의 움직임을 계산해서 만들고, 그다음에 피부의 질감이나 털의 색, 위치, 캐릭터의 투명도, 움직임의 방식까지 전부 설정합니다. 간과 태는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니까 움직임도 제가 직접 드로잉으로 다 구상해야 했어요. 점프, 비행 같은 동작을 손으로 그려 팀과 공유하면서 만들었죠. 물이나 빛의 반응도 수백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조율했습니다. 정말 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팀원들과 새벽까지 지지하며 일했어요. 상상했던 결과가 나올 때의 희열이 엄청나거든요.
작업을 드로잉으로 시작하면 실제의 조각으로 옮길 때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가몬›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아가몬› 시리즈는 컴퓨터 과로로 어깨와 허리, 골반이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을 때 디지털 세계에서 구축한 미감을 물리세계로 옮겨오기 시작한 조각입니다. 역시 드로잉을 먼저 합니다. 이끼 전문가인 독립정원이 흙으로 조형을 만들고, 석고로 몰드를 뜬 다음 우뭇가사리를 캐스팅하는 전통적 조소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이끼를 심고 잘 자랄 수 있게 돌보는 것이 우리 팀의 역할이죠. 실리콘이나 아크릴 소재는 이끼에 좋지 않아 해조류 성분인 우뭇가사리를 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늙고 썩어가는 조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끼는 무너진 ‹아가몬›의 몸에서도 살아갑니다.그런데 드로잉을 입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해석이 필요하다 보니, 이번 전시에서 출현한 다섯 번째 아가몬은 드로잉을 3D 그래픽으로 만든 다음 독립정원이 그대로 조각으로 옮기는 방식을 택했죠. 360도를 전부 돌려 볼 수 있으니 상상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오차가 적어졌어요.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 방식을 서로 보완하며 연약한 피부, 그 위에 난 털, 귀여우면서도 기괴한 특징을 가진 아가몬을 탄생시켰습니다.
전시실 중앙에 있는 아가몬 인큐베이터의 디자인도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이 디자인은 어떻게 구현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아가몬 인큐베이터›는 습도, 온도와 빛 공급으로 아가몬이 지구에서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안된 장치입니다. ‹아가몬 인큐베이터 5›는 디지털 세계의 정령들이 포털을 통해 인간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설정을 물리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죠. ‘*마법진’을 상상하며 분수 형태의 인큐베이터를 디자인했습니다.파이프 라인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공장에서는 그린 형태가 나오지 않아 아버지가 직접 파이프 구부리는 기계를 사서 수차례 씨름한 끝에 완성해 주셨습니다. 하트 피어싱 역시 수 번의 샘플을 거쳐 완성된 디자인이에요. 저는 관람객이 작품의 개념을 잘 몰라도, 그저 보기에 끌리고 미감적으로도 즐길 수 있기를 늘 바랍니다. * 마법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그리는 원형 혹은 다각형의 문양
“정령들은 깨어날 겁니다. 계속!”
전시실을 가득 채우는 영상 속 사운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가인 마르텐 보스(Maarten Vos)와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요?
서로 많이 싸우고, 또 웃으면서 작업했어요. 관능적이면서도 아닌 것 같고, 기묘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점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함께 많이 보냈습니다. 음악이 꽉 차면 이미지와 설치가 전부 충돌하기 때문에 저는 여백을 두자고 했어요. 섬을 소개할 때는 비우고,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쌓아 올린 뒤 다시 내려가는 식으로요. 베를린에서 작곡과 프로듀싱을 마치고 서울로 넘어 와 밤마다 미술관에서 직접 소리를 들으며 믹싱했습니다. 네 개의 스피커에서는 각자 다른 소리가 나죠. 너무 영화 음악처럼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관람객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 두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 추수 작가 ⓒ강민구
    추수 작가 ⓒ강민구
  • 추수 작가 ⓒ강민구
    추수 작가 ⓒ강민구
여덟 정령이 앞으로 모두 깨어난다면, 프로젝트는 어떻게 이어지게 될까요? 프로젝트에 대해 힌트를 주신다면요?
정령들은 계속 깨어날 겁니다. 작품 속 세계관도 계속 발전하겠지만, 또 개인적인 경험들이 반영된 캐릭터인 ‘태’와 ‘간’처럼 앞으로 나올 캐릭터들도 제가 그 작업을 할 당시의 경험이 반영 되겠죠. 어쩌면 임신, 출산 같은 경험일 수도 있겠죠. 이번에는 아무래도 공적 공간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다보니 수위를 조절해야 했지만, 향후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더 급진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사운드와 퍼포먼스도 확장하면서, 다양한 맥락에서 놀아 볼 꿍꿍이를 꾸리고 있습니다.
추수
추수(TZUSOO)는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판화과 및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조형예술대학에서 학석사 통합 과정 디플롬을 마친 뒤 현재 동 대학에서 강의 중이다. 작가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사이버 생태계와 현실이 교차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며, 영상, 설치,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작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