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郭仁植, 1919-1988)은 1937년에 일본으로 가서 1941년에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学校)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도쿠리쓰미술협회전(独立美術協会展)에 참여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42년에 귀국했다가 1949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카텐(二果展), 요미우리 앙데팡당(読売アンデパンダン) 등의 단체전에 출품하였으며, 1960년대부터는 거의 매해 1~2회 이상 개인전을 개최하며 독자적인 작품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제2회 시드니 비엔날레(1976) 등 국제전에도 참여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인물을 소재로 구상 작업을 했으며 1950년대에는 신체 이미지를 과장되게 묘사하여 초현실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화면의 마티에르를 살리는 앵포르멜 기법과 모노크롬적 요소를 적용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 위에 오브제를 붙이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는 유리 작품을 시작으로 놋쇠, 철, 종이 등 단일한 오브제를 작품으로 제시하여 사물의 물질성에 주목했다. 그는 1976년부터 돌, 점토, 나무, 종이 등의 표면에 흔적을 남겨 각 사물이 가진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곽인식은 1960년대 도쿄 거리에서 커다란 쇼윈도 유리를 보고 “섬뜩하지만 불가사의한 유리. 투명감이 있고 밉살스러운 만큼 예쁘다. 그러한 유리에 나는 끌린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유리의 물질성에 주목하여 유리 자체를 작품화했다. 우선 그는 깨야 할 유리판의 크기만큼 마당에 땅을 판 후 그 속에 유리를 넣었다. 그 후 쇳덩이를 이용해 유리를 깬 다음에 유리 조각을 주워 패널에 본래의 상태로 세밀하게 붙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균열이 나올 때까지 유리를 깨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작품〉은 천이 덮인 패널 위에 원 형태로 금을 낸 유리를 부착하고 철 그물로 고정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곽인식의 유리 작업 중에서 작가의 의도와 가장 잘 맞는 균열의 형태를 보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단일한 소재에 주목하여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곽인식 작품 전체의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그의 물질에 관한 본질적 탐구는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