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도구 삼아 다채로운 색실로 직물을 장식하는 자수는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이천 년 역사를 지닌 한국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 훼손되기 쉬운 재료 특성상 현전하는 고대, 중세 유물은 지극히 적고, ‘전통자수’라 불리는 유물 대부분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작되었다. ‘자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전통자수, 특히 조선시대 여성들이 제작하고 향유한 규방공예 또는 이를 전승한 전통공예로서의 자수로, 근대기 이후에는 마치 자수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근현대 자수는 낯설다. 19세기 이후 자수의 역사, 즉 개항, 근대화=서구화, 식민, 전쟁, 분단, 산업화, 세계화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한 자수의 흐름은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전시는 알려지지 않은 자수 작가와 작품을 발굴, 소개하고 미술사에서 주변화되었던 자수 실천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관람객은 섬세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듯한 자수의 역사 뒷면에 순수미술과 공예, 회화와 자수, 남성과 여성, 창조와 모방, 전통과 근대, 서양과 동양, 공(公)과 사(私), 구상과 추상, 수공예와 산업(기계)공예,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등 여러 층의 실들이 엉켜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수의 재료인 바늘과 실은 마치 세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뒷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계보와 불연속성을 고찰하는 이번 전시가 자수라는 ‘바깥의 사유’를 통해 순수미술 중심으로 서술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1.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전시는 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자수로 시작한다. 조선시대 자수는 제작 주체에 따라 크게 도화서 화원(畫員)이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수방(繡房) 소속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宮繡)와 민간 여성들이 제작한 민수(民繡)로 나뉜다. 궁수가 정제된 문양의 도안 위에 천연염료로 물들인 색실을 사용하여 고아한 기품을 풍긴다면, 민수는 세련된 맛은 덜하지만 자유분방한 구도와 강렬한 원색대비가 두드러진다. 자수가 감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시대 숙종 연간 이후 본격화되었다. 격식을 따져야 하는 복식자수나 실용성이 우선인 생활자수에 비해 자수병풍(繡屛)은 조형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영역으로 산수, 영모화조, 장생, 수복, 감계, 기물 등 다양한 소재를 취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전통사회에 존재하지 않던 ‘공예’ 개념이 탄생하면서 자수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자수는 규방에서 자급자족되는 ‘여기(女技)’에 머물지 않고, 근대적인 문명국가를 가능케하는 기술, 공업, 산업으로 간주 되어 국내외 박람회에 출품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문화의 발달로 수병 수요가 증가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평안도 안주(安州) 지역에서 전문적인 남성 자수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가 급성장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대한제국 황실은 궁수를 대신해 안주수 병풍을 주문하거나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병풍을 사용하기도 했다.
2. 그림 갓흔 자수
2전시실에서는 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거듭난 자수 실천의 변화를 살펴본다. 자수의 근대화는 도안, 기법, 재료의 변화만큼이나 그 실천이 공적(公的) 영역으로 이동한 데 있다. 사적(私的) 영역에서 전수, 제작, 사용되던 자수는 학교령 공포와 함께 ‘수예(手藝)’중 하나로 여성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여성교육의 목적은 “여자에게 적당한 ‘우미(優美)’의 예술을 가르쳐서 안으로는 현모양처가 되고 밖으로는 문명을 보완하는 기술자 및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자수는 근대국가의 바람직한 국민으로서 여성에게 부가된 교양이자 노동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엘리트 여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를 공부했다. 유학지는 도쿄에 위치한 ‘여자미술전문학교’였다. 이들은 귀국 후 전국 여학교, 기예학원 등에서 전통자수와 전혀 다른 새로운 자수를 보급했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기존의 서예부가 폐지되고 공예부가 신설되어 공예품이 ‘미술공예’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제 ‘미술’은 문인의 ‘여기(餘技)’또는 장인의 ‘기술’이 아니라 개성적인 근대인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 자수는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한 회화 같은 자수가 주를 이루었다.
3.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
광복 후 자수는 ‘민족 정체성의 회복’, ‘왜색 탈피’, ‘현대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등 문화예술계 전체의 기치에 동참했다. 자수는 한편으로는 ‘추상화’,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전자는 주로 아카데미 안에서 후자는 그 밖에서 이루어졌다. 3전시실에서는 아카데미 안팎에서 진행된 소위 창작공예=현대공예로서 자수를 소개한다. 이 시기 자수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내 자수과가 설치된 것으로, 1980년 자수과가 섬유예술과로 통합되기까지의 과정은 변화하는 자수의 위상을 반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미술은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언어로서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 자수도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적극 수용, 1950년대 중반 자수 분야에서도 반(半)추상 형식이 등장했고, 1960년대 이후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한 이들은 물론 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는 자수 작가들도 비단 외 다양한 재질의 바탕천과 실, 그리고 의외의 재료를 사용하며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추상을 실험했다.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자수는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해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점차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
아카데미에서 자수의 위상이 줄어든 것과 달리 아카데미 밖에서 자수는 조국근대화, 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산업공예로, 그리고 보존·계승해야 할 전통공예로 부각되었다. 이때 주목받은 자수는 ‘동양자수’였다. 동양자수는 수출용, 혼수 및 예단용, 기념품용, 실내장식용 등 국내외로 인기가 높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솜씨 좋은 여성들이 수방(繡房)에 모여 분업 형식으로 수요에 맞추어 각종 자수품을 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일제강점에 의해 맥이 끊기다시피 한 조선시대 자수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수집과 연구, 전시로 이어지며, 전통자수와 근대 일본풍 자수가 혼합된 절충적인 자수가 동양자수라 불리던 상황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박영숙ᄋ허동화 부부가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유물을 토대로 1970년대 후반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고, 조선시대 자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서적이 발간되기 시작했으며, 1984년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이 지정되었다. 전통자수의 계승과 현대화는 열정과 신념을 지닌 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으며,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수공(手工)과 공예의 가치를 재고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