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미술 장르의 확장 및 장르 간 균형 강화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판화, 판화, 판화》전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재발견이 필요한 장르 중 한국의 현대 판화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그동안 판화는 오랜 역사를 지니며 한국의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장르로 평가받았으며,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판법의 발전과 함께 작가들에게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매체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미디어아트, 융복합 예술 등 새로운 동시대 미술의 홍수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전시는 판화를 주요하게 다루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이러한 ‘판화’라는 특수한 장르이자 매체, 개념이자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전시는 크게 ‘책방’, ‘거리’, ‘작업실’, ‘플랫폼’의 4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접해왔던 장소의 명칭과 특징을 빌려와, 판화가 존재하고 이어져온, 앞으로 나아갈 자리들을 장소의 개념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한편 ‘판화’라는 단어가 거듭 반복되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복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판화의 특징을 담아내고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타 장르에 비해 낯설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접해본 판화, 여전히 자기만의 고유한 매력을 지닌 판화, 작가들의 주제의식과 기술 속에서 계속 이어질 판화에 대해 강조하여 살펴보려는 전시의 의도를 반영하였다. 이번 《판화, 판화, 판화》전을 통해 판화라는 장르가 지닌 가치를 재확인하고, 소외 장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요 작품 1
김상구, , 2005, 30x180cm, 목판화, 8/20, 작가소장 (위)
김상구, , 2001, 26x163cm, 목판화, 10/20, 작가소장 (아래)
김상구는 한국 추상 목판화를 대표하는 원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50여 년 동안 30회가 넘는 작품 전시 활동을 이어가며 목판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제작해 왔다. 1,500여 점의 대량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 현대 목판화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2005)와 (2001)은 가로로 길게 만들어진 판화 작품이자 표지와 내지로 이루어진 판화 아티스트 북이다. 한지 위에 유성 잉크와 수성 잉크를 함께 사용하여 목판화의 다양한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 푸른빛을 지닌 새와 녹색의 대나무 이미지는 김상구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들이다. 작가는 형태가 모호한 대상이 아닌 구체적이고 친근한 생물들을 작품에 끌어 들여와 기호처럼 단순화시켜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이러한 김상구의 작품이 지닌 형식적 특징과 대표적인 소재, 서정성과 대중성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와 은 같은 작품의 다른 에디션이 미국 버밍험 미술관(The Birmingham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주요 작품 2
강행복, <화엄>, 2019, 목판화, 86x122cm, 작가소장 (왼쪽)
강행복, <화엄(아티스트 북)>, 2019, 21x15x18cm, 1/2, 작가소장 (오른쪽)
강행복은 광주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미국 등 국내외로 활발히 활동하는 목판화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꽃과 나무, 구름, 길 등의 형태가 그래픽 디자인의 패턴처럼 빼곡히 새겨져 있다. 강행복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일상적 소재를 단순화하여 재해석하고 수행과 명상의 과정으로 찍어내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화엄>(2019)은 20권의 아티스트 북을 이어 붙여 설치 미술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동일하게 찍어낸 판화들을 모두 하나의 책으로 제본하여 아티스트 북의 형식으로 제작한 두 가지 형식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판화의 과정을 마친 뒤 산사에 들어가 바느질로 제본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파편으로 흩어져있던 수많은 이미지와 형태, 기억 등이 하나로 모이고 엮이는 의미가 덧입혀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품의 제목인 <화엄>은 이처럼 작은 것들이 엮이고 묶여 더 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판화 아티스트 북은 읽고 해석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책이 아닌,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고 확장시키는 작업의 중요한 매체가 된다.
주요 작품 3
오윤, <도깨비>, 1985, 리놀륨 판화, 91x218cm, 개인소장
오윤은 짧은 생을 작가로 살아가며 민중을 향하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예술을 지향하였다. 판화는 이러한 오윤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매체로서, 매체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복수성, 인쇄와 결합하는 성질, 프린트를 통해 나오는 강렬한 표현과 오윤의 칼을 쓰는 자기만의 기법, 화면 구성 등이 맞물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게 되었다.
‘도깨비’는 오윤이 말년에 관심을 가진 소재 중 하나인데 이를 통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세계가 신명과 주술이 지배하는 영역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고무판으로 제작한 대작 <도깨비>(1985)는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통상적으로 도깨비는 농민을 못살게 구는 존재, 탐욕이나 비리의 인물, 사회악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민간 설화의 도깨비는 친숙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오윤은 사회를 비판하거나 현실을 드러낼 때에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 도깨비와 같은 상상의 존재로 은유하는 상징적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오윤 작품의 면모는 웃음과 해학을 통해 비판하려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두려운 상대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긍정적 반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요 작품 4
홍선웅, <제주 4.3 진혼가>, 2018, 목판화, 62x182cm, 작가소장
홍선웅은 민중 목판화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작품 속에서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거나 다시 해석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조선시대 민화나 팔만대장경 등 전통회화와 판화의 영향을 받았고, 작가 자신이 직접 문화유적을 방문하여 문헌을 연구하는 등 작업과 판화 연구를 병행하며 민중 목판화의 새로운 전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 4.3 진혼가>(2018)는 홍선웅이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단색목판화이다. 화면의 중앙 하단에는 1947년 제주 4.3 사건 당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제주도민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당시 항만으로 모여든 군함들, 경찰과 군인들의 행렬 모습, 전투 장면, 피난처로 이동하고 있는 제주도민들의 모습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무덤에 망자의 넋을 달래준다는 의미를 지닌 꼭두인형이 등장하여 사건을 지켜보는 증인의 역할과 바다에서 살풀이 춤을 추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달래주는 역할로 등장하여 작가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주요 작품 5
이영애, <내 날개 아래 바람 1>, 1995, 애쿼틴트, 120.5x171cm,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
이영애는 50여 년 간 꾸준히 동판화 작업을 이어온 대표적인 한국 여성 판화가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애쿼틴트 기법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여성 판화가들로 이루어진 서울 프린트 클럽의 핵심적인 구성원으로 활동해왔다.
<내 날개 아래 바람 1>(1995)은 이영애의 애쿼틴트 기법의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판형이 정해져있는 판화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화면을 지니고 있으며, 가늘고 섬세한 선으로 작가가 주로 다루는 자연의 소재인 낙엽, 나뭇잎 등을 표현하였다. 애쿼틴트는 동판화의 일종으로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 기법 중 하나이다. 작가에게 고난도의 기술과 노동을 요구하기에 애쿼틴트를 주요 매체로 국내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많지 않다. 이영애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애쿼틴트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세필로 그린 듯 치밀한 묘사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보는 사람의 눈앞에 익숙했던 자연물을 크게 확대하여 제시함으로써 이미 죽고 말라버린 생명을 반대로 생생하고 생경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주요 작품 6
임영길, <기호풍경-신의주>, 2017, 실크스크린, 1/29, 53.5x76.5cm, 작가소장
임영길은 판화를 주요 매체로 다루는 작가이자 대학에서 판화를 가르치는 교육자이다. 그는 판화라는 기본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한 판화의 현대적 확장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의 <기호풍경-신의주>(2017)는 시리즈로 제작된 <한국의 기호풍경> 중 신의주를 나타낸 것이다. <한국의 기호풍경>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6개 지역을 기호 혹은 상징을 통해 재현한 작품이며, 적게는 10판에서 많게는 19판까지 많은 색을 입혀 찍어낸 다색 실크스크린 판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며 바라본 한반도라는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산과 강부터 도로와 건물, 하늘의 별자리와 지역과 관련된 조류까지 각 지역의 특징을 담아낸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일종의 지도이자 회화인 <기호풍경>은 백두산 삼지연, 풍계리, 신의주부터 서울, 인천, 부산, 제주 등을 물리적, 정치적 구분 없이 데이터화 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역사적 담론과 쟁점, 자연의 상징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보는 사람에게 가보지 못한 풍경에 대한 상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작품 7
강동주, <커튼>, 2018, 목판인쇄, 유성잉크, 사포, 각 79x54.5x(61)cm, 작가소장 (왼쪽)
강동주, <1시간 58분 3초의 땅>(2015.1), 2015, 연필, 23.5x16.5x(37)cm, 작가소장 (오른쪽)
강동주는 종이와 연필, 먹지 등을 주로 사용하여 자신이 담아내고자 하는 대상과 그것을 향하는 시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대상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다. 그에게 판을 긁어내 종이에 찍어내거나, 종이를 눌러 대상을 떠내는 판화의 과정들은 자신의 드로잉에 시간과 움직임을 담아내려는 작업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동주의 <커튼>(2018)은 4개월 동안 작가가 머물던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밤의 풍경을 기록한 61장의 판화 작품이다. 같은 장소, 밤이라는 동일한 시간대,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매일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판화의 느린 호흡으로 그렸다. 한편 작가가 도시를 걷다 멈춰선 순간의 지면을 기록한 <1시간 58분 3초의 땅>(2015.1)(2015) 또한 이동과 기록, 시간과 기억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땅바닥 드로잉> 시리즈 중 하나인 이 드로잉은 작가가 2015년 1월에 1시간 58분 3초 동안 멈춰선 서른여덟 번의 순간과 그 땅의 질감을 기록한 것이다. 전시실에는 그가 담아온 다양한 순간들이 다시 벽면에, 바닥에 펼쳐지며 새로운 시간의 장면을 만들어낼 것이다.
주요 작품 8
김인영, <매끄러운 막>, 2019, 아크릴, 수전사, 스캐노그라피, 210x105cm, 작가소장
김인영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시간의 중첩이 물리적으로 드러난 풍경과 그 사이에서 나타난 조형의 변화에 주목한다. 작가는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납작한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지닐 수 있는 물성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매끄러운 막>(2019)은 투명한 아크릴판 위에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수전사와 스캐노그라피(scanography)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특히 이 두 판화 기법을 통해 디지털의 계산된 체계에 미세한 오류들을 개입시켰다. 그는 직접 그린 원본의 이미지를 스캔하여 변형과 왜곡을 통한 변주를 만들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를 선택하여 수전사 기법으로(물과 특수 용액의 화학작용으로 지지체에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법) 입체 작품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의도적으로 탄생한 왜곡들은 디지털과 수공적 기술의 역전된 상황과 함께 이미지 자체가 아닌 매체와 물성을 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김인영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신진 작가의 작품 속에 판화의 기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