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은 2010년 이후 수집한 국제 뉴미디어 작품을 소개하는《2021 뉴미디어 소장품 기획전: 불합리한 환상극》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남아프리카 출생인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 인도 출신의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 1946~), 중국 출생 양푸둥(Yang Fudong, 1971~)의 대표작으로 구성된다. 세 작가의 작품은 사회, 정치적 현실의 쟁점을 연극, 오페라, 소설, 고사 등에서 영감을 받아 서사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전시회의 제목《불합리한 환상극》은 참여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 작업 노트에서 발췌한 문구이다. 세 작가가 작품에서 차용한 ‘환상’ 장치는 실제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동시에 모순된 진실을 도출한다. 이를 통해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당면한 개인이 느낀 불합리함 또는 갈등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동시대 작가들이 현실에 당면한 문제를 작업으로 어떻게 구현하는지 살펴보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뉴미디어 대표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윌리엄 켄트리지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
2008, 8채널 프로젝션, 컬러, 사운드, 6분, ed. 2/1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비디오 작가이자 미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온 작가이다. 그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던 백인 가정에서 성장해 사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작업은 목탄 드로잉을 섬세하게 삭제하거나 수정하고 스톱 모션(stop motion)으로 촬영한 후, 연속적으로 필름을 영사하여 애니메이션 형태의 드로잉을 화면에 투사해 영상으로 제작된다. 이러한 그의 영상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의 이야기들은 연작 형식을 띠고 있다. 제목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잘못을 부정하는 의미의 러시아 속담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이 1837년 쓴 러시아 소설 『코(The Nose)』에서 출발하였다.
윌리엄 켄트리지
<코1(가위)>
2007, 청동, 30×16×14cm, ed. 1/2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윌리엄 켄트리지가 연출한 영상작품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에 등장하는 코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다. '가위'라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낸 매우 우화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어느 날 한 남자가 자신의 코가 없어진 것을 알고 코를 찾아 도시 이곳저곳을 헤매다 남자가 마침내 자신의 코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자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간 그의 코는 그와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려다 체포당한다. 작품 속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코가 없어진 당황스러운 사건이 꿈이라는 걸 깨닫고 안도하게 된다.
양푸둥
<죽림칠현 Ⅲ>
2005, 단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53분, ed. 1/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양푸둥(Yang Fudong, 1971- )은 개인의 기억, 경험, 신화, 역사 등을 혼합하여 독특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그는 근대화·산업화· 도시화로 변한 사회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뇌, 심리, 불안을 시적이고 몽환적인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림칠현’은 중국 위·진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에서 벗어나 죽림에 모여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 일곱 명의 선비의 고사에서 출발한다. 양푸둥은 근대화·산업화라는 혼돈의 시대를 사는 젊은 도시인을 ‘죽림칠현’에 비유하며, 현대판 <죽림칠현> 5부작을 제작하였다. 그 중 <죽림칠현 Ⅲ>은 일곱 명의 젊은 남녀가 도시에서 떠나 농촌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보여준다.
날리니 말라니
<판이 뒤집히다>
2008, 턴테이블 32개, 마일러 실린더, 할로겐 라이트, 사운드, 20분, ed. 2/3(A.P.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 1946- )는 회화, 벽화, 비디오 설치,그림자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시도했다. 인도 태생의 작가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촉발한 복잡한 정치, 사회적 분쟁 사안을 복합적 매체로 설치작업에 담아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판이 뒤집히다>는 작가가 2008년 시드니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제작한 작품으로, 이전부터 꾸준히 발표해온 그림자 연극의 형식을 띤 작품이다. 전쟁과 산업혁명과 관련된 이미지는 바닥에 30여 개의 회전하는 형체로 놓여 외벽에 영상이 투사되며 심리적 문화적 요소들을 결합한 공감각적인 감정을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