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어떤 장소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은 건축을 작동시키는 힘이다. 건축에서도 유토피아는 역사적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공했다. 이는 특히 세계전쟁 이후 근대화된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들의
비전에서 극대화되었다. 백지화된 상태에서 모든 것들을 재건해야 했던 변방의 한국에서는 이 유토피아의
실험방식이 매우 빠른 속도로 기이하게 가동되었다. 건축가와 정치가는 한 배를 타고 국가 개발의 이상을
향해 전진했다. 그로부터 50여년. 많은 것들의 욕망이 거세된 ‘기대 감소의 시대’인 지금 과연 우리 건축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건축가들의
이상으로 탄생하는 ‘아키토피아(Archi-Topia)’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가. 이것이 이 전시를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 건축·도시사에 흩어진 아키토피아의
흔적들을 다시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아키토피아의 욕망이 투사된 장소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 그리고 이런 과정을 탐색하는 행위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앞으로의
건축적 이상향을 짐작하리라 보았다. 시대별로 조금씩 양상을 달리하며,
당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아키토피아의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앞으로의 건축에 대한 이상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시에 소개하는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아트밸리, 판교단독주택단지는 건축이 도시적 규모로 개입하여
인프라가 되거나 마치 건축 전시장과 같은 모습이 된 장소들이다. 건축가가 도시를 대상으로 한 작업 중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근대적 이상의 기운을 펼치는 세운상가는 한 건축가와 정치가의 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밸리는 마스터플랜 류의 기존 도시개발 방식의 대안으로부터 출발한다. 공동성을
추구하는 문화 장소로 기획된 이곳은 건축 코디네이터 개념이 도입된 아키토피아이다. 판교단독주택단지는 2,000여 세대의 대규모 단독주택 지구로서 아파트 단지의 균질성과 폐쇄성을 탈피하고자 계획된 저밀도 신도시다. 많은 건축가들이 개별로 참여했지만 결국은 전체가 주택 전시장과 같은 모습이 된 독특한 곳이다. (서)판교의 집들은 새로운 중산층을 위한 욕망의 주거지로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고 있다.
이 장소들은 저마다 동기와 배경을 달리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장소를 그리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곳들은 건축가와 건축주의 미묘한 힘 겨루기를 거쳐 그 의미가
지속되거나 퇴색되었다. 국가 주도의 유토피아 건축 계획은 현재 시점으로 다가오면서 그것을 이끄는 특정
주체들은 희미해지고 개인들의 개별적인 욕망을 담는 그릇이 되어 간다. 세운상가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아트밸리와 같은 대규모 건축 작업의 기회조차 사라진 저성장 시대의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는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잔존하고 있다. 그
희미한 빛은 거대 건축이 사라지고 난 지금의 우리 건축이 모색해야 할 틈새를 비춘다.
이번 전시는 개별 건축물에 대한 소개보다는 건축 유토피아라는 어떤 이상을 담은 특정한 현상을 탐색하기
위한 레이아웃을 펼쳐 보인다. 사진, 드로잉, 영상, 그래픽, 텍스트와
같은 혼성적 요소들은 마치 잡지의 특집 기사를 보는 것처럼 적절히 시각적으로 배치하여 생생한 읽기 경험을 강조한다. 전시에 참여한 건축가, 사진가, 평론가,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아키토피아의 실험’을 포착하는 이미지 수집가이자 제작자로서 특정 시점에서 드러난 유토피아의 흔적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