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성립과 후원자의 역할 - 역사적 전개와 의의 -

이 은 기(목원대학교 교수)


Ⅰ. 序 - 후원자와 미술사가와 행정가
Ⅱ.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관과 후원자
Ⅲ. 우피치미술관의 성립과 후원자
Ⅳ. 他문화 미술품에 대한 관심 - 대영박물관
Ⅴ. 뉴욕 현대미술관 설립의 세후원자와행정가
Ⅵ. 結-앞으로의 후원에 대하여

V. 뉴욕 현대미술관 성립의 세 후원자와 관장

뉴욕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15)은 성립과정, 미술관의 성격, 사회적인 역할, 미술사에서의 중요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20세기 미술관을 대표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1929년에 설립되었을 매부터 지금까지, 미술품의 보물창고가 아닌, 현대생활과 함께 살아 움 직이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공동사회와 함께 동조하며, 시대의 변화와 관심에 대응하는 것이다.

설립 초기부터 조각과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상업디자인 영화, 사진 등 현대생활 속에서의 미술,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하며, 단순한 전시만이 아닌 교육의 장이 되고, 또한 식당이나 휴식공간을 갖춤으로써 교양 있는 엘리트만 찾는 곳이 아니라 모든 대중의 만 남의 장소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 자체출판사, 대형서점, 유명한 작품을 생활 용구에 적용시켜 제작한 디자인상품 가게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서 단순한 미술품 전시실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생활 안에 들어와 있는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이다.

그리고 이 글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자나 국가가 아닌 일반 후원자에 의해 설립되었 다는 사실과, 어떻게 해서 현대 미술사조에서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그렇게 많이 소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미술사학자 샘 헌터는 미술관이 설립된 지 54년이 지난 1983년에 편집된 「뉴욕 현대미 술관」이라는 척에서 지금의 이 미술관은 공익정신을 갖은 진보적인 세 후원자와 명석하고 비 젼있는 초대관장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블리쓰 양(Miss Lillie P. Bliss)과 설리 반 부인(Mrs. Sullivan) 그리고 록펠러 부인(Mrs. Rockefeller)인 세 후원자와 알프레드 바아(Alfred Barr) 초대관장을 말함이다.

릴리 블리쓰(도판 7)는 직물제조업자의 딸로,1929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개관되었을 때는 후기 인상주의와 현대미술품의 수집가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13년에 열린 아모 리 쇼(Armory Show)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인 아더 데이비스(Arthur B. Davis)와 가까운 친구였으며 아모리 쇼에서 다섯 정의 회화작품을 산 것이 그의 첫 미술품 수집이었다.

그 후 블리쓰는 가까운 현대미술 수집가들과 함께 인상주의에서 초기 큐비즘까지의 현대미술 전시 회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 열고자 추진하였다. 그 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현대미술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였기 때문에 박물관에서의 전시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진보적인 경향에 대한 기존 미술관의 거부감은 바로 독립된 현대미술관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설리반 부인(도판 8)은 인디에나폴리스에서 성장하여 결혼 전에는 뉴욕에서 미술선생님을 하였다. 유명한 변호사이며 회귀한 장서와 회화작품 수집가인 코르넬리우스 설리반(Cornelius J.Sullivan)과 결혼한 후 수집을 시작하였다. 남편의 친구이며 현대미술품의 수집가인 퀸 Oohn Quinn)의 권유로 설리반부인은 아모리쇼의 작품들을 구입했으며 이는 설리반부인의 소장품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록펠러 부인(도판 9)은 로드 아일랜드의 상원의원이었던 올드리히(Senator Nelson W.
Aldrich)의 딸로 유럽 미술품의 수집가였던 아버지는 딸이 어렸을 때부터 유럽의 미술관을 보여주곤 하였다. 록펠러 부인은 후일 현대미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구입하기 시작했 으며, 미국은 옛 작품만이 아니라 당시의 유럽 미술품들 특히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역시 수집가가 된 부인의 아들 넬슨 올드리히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는 그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에서 어머니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어머니는 항상 반 고흐(Van Gogh)의 비극을 예로 들면서 새로운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어요. 후기 인상주의의 위대한 선구자이지만 37살의 나이에 극빈자보호소에서 죽은, 빵을 사기 위 해 작품을 팔고자 했으나 사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죽은 후에야 위대함을 알아준 반 고흐를 항상 생각하셨죠.

어머니가 새로운 미술관을 세우고자 한 목적은 작가의 창작과, 위대한 작품 을 평가하는 대중사이의 시간적인 갭을 줄이고자 하는 데 있었지요" 당대 미술가에 대한 그 의 관심은 곧 그의 수집에 직결되어 그는 미국의 현대미술가 작품들을 많이 수집하고 이를 뉴욕의 54번가에 있는 자기 집 맨 윗층에 전시하였다. 남편은 이 집을 1937년에 헐고 현대미술 관에 기증함으로써 현대미술관의 첫 야외조각전시장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후일 부인 또한 수집품을 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위의 세 사람이 새로운 현대미술관을 세우고자 의논한 것은 블리쓰와 록펠러부인이 이집트 여행길예서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후 설리반 부인과도 뜻이 통하자 세 사람은 대담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넬슨 록펠러는 "세 사람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어요. 그들은 재원도 있었 으며, 재치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 또한 높았죠. 더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미술 에 대해 찬반의 논란이 많고, 또 무지했었는데 세 사람은 현대미술의 경향을 대변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어요"라고 기억한다.

세 사람의 뜻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 사람은 그들이 뽑은 관장 알프레드 바아(도판 10)였 다. 당시 27세 밖에 안된 바아를 이 중요한 일에 소개시킨 사람은 하버드의 포그박물관(Harv- ard University's Fogg Museum)에서 박물관의 강의를 맡았던 싹쓰(Paul J. Sachs)교수였 다. 그가 경험도 없는 이 젊은이를 소개한 것은 알프레드 바아가 박학한 학자적인 소양보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바아는 현대미술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으며, 몰입하는 집중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박스는 세 후원자에게 "모험적인 새로운 미술관을 세우려 하 면서 늙은 사람을 원한다면 새로운 미술관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알프레드 바아를 관장으로 추천한 싹스 교수와 이를 받아들인 세 위원의 결정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알프레드 바아는 프린스톤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다녔는데 그때 그가 가장 흥미 있어 하던 과 목은 중세미술사였다. 바아는 그 과목을 맡은 모레이(Charles Rufus Morey)교수의 강의를 "건축, 조각, 회화, 필사본, 공예품 등 모든 시각자료를 문화사의 기록으로 생각한 중세미술품 에 대한 탁월한 종합력"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 후 하버드로 전학하여 그 곳에서 박스교 수의 박물관학을 수강했으며, 졸업 후 웰슬리대학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로는 이례 적인 대우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대미술사를 강의했는데 그 강의에서 바아는 20세기의 회화와 조각만이 아니라 영화, 사진, 음악, 연극, 건축, 산업디자인 등 전 예술방면을 다루었다. 모레이 교수의 중세미술사 강의 방법을 20세기 미술사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현대 미술관의 계획에도 강력히 추진되어 미술관은 소위 순수미술뿐만이 아니라 사진, 영상, 상업 미술 등 여러 분야를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다영역 시스템'(multi departmental syste- m)이라고 불렀다.

처음 몇년간에 이루어진 <세쟌, 고갱, 쇠라, 반고흐전>, <19명의 미국현존작가 회화전>, <도 미에와 코로전> 등을 유럽에서 빌려오거나, 후원자들의 소장품으로 치룬 운영진은 항구소장품 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1931년 릴리 블리쓰가 타계하면서 그의 주요 소장품들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바아는 "항구소장품은 시간을 통과하는 가오리 같아서 코는 전진하는 현재에 두를 꼬리는 언제나 50년 내지 100년이 지난 과거에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현재 진보적인 작품도 50-100년이 지나면 과거에 속한다는 뜻이리 라. 그는 창구소장품들을 되도록 빨리 사야한다고 말하면서 "만약 이 정책이 확정되지 않으 면,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라는 이름은 아마 '전시미술관'(Exhibition Gallery)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19)

그는 항구소장품을 수집하는데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미 유명한 전시대의 작품은 피했으며, 새로운 현대미술사에서 꼭 거론해야만 하는 중요작품들을 선정하 여 구입하고자 했다. 작품의 소장을 주로 기증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중요작품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의 소유자가 기증할 의사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 다. 바아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여 추진시켰다. 즉 작품을 기증받을 때, 기증받은 작품을 팔 거나 다른 작품과 교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놓고 나중에 팔아서 더 중요한 다른 작품을 구입할 자금을 마련하는 길이었다.

이 정책은 사실 실행시키기에 쉽지 않았다. 기증자는 자기의 기증품이 현대미술관에 소장되 어 항상 꼬리표에 기증자 이름이 따라 다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더욱 어려운 점은 많은 작 품을 함께 기증하며, 이 작품들이 흩어지지 않고 다 함께,그리고 기증자의 이름과 함께 전시 되는 조건으로 기증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그럴 때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기획에 기증 작품을 활용할 수 없으며, 기증 작품이 전시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증자는 기증을 하면서도 학문의 연구나 공익정신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물론 큰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경우이겠으나,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기증품은, 특히 많은 작품 을 함께 기증받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점차 작품 한 점 한 점의 가치와 시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분리하여 협상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현대미술관을 창설한 세 후원자 중 한사람인 릴리 블리쓰는 이에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1931년 그가 타계하면서 기증한 모든 작품은 나중에 더 필요한 다른 작품을 사기 위해 팔아 도 되고, 또 다른 작품과 바꾸어도 좋다는 사항을 관대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공익정신 덕 분으로,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아비뇽의 아가씨들> (도판 11)이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릴리 블리쓰가 유품으로 기증한 드가의 그림과 바꿈으로써 1939년에 구입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마도 현대미술관은 가장 혁신적이며,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사랑 받는, 피카소의 큐비즘을 거론하는데 결정적인 작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증자의 공익정신과, 미술사가의 연구결과, 그리고 행정가의 현명한 운영 이 잘 조화되어야 훌륭한 미술관을 이를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 는 릴리 블리쓰의 공익정신과, 그 작품의 가치와 필요성을 아는 연구자이며 동시에 구입 가능 한 방법을 강구한 알프레트 바아의 행정력이 있었기 때문에 미술관의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지게 된 것이다.

현대미술관은 1929년에 창설된 후 처음 몇 년간은 일시적인 전시만을 기획하다가 소장작 품을 늘리고, 또 임시 전시장에서 1939년에 현재의 새 건물에 자리잡으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도 초기의 후원정신과 모험적인 운영방식을 지속시킴으로써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미술관으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