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정보사회론

이용우(고려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Ⅰ. 형식주의 미학의 한계
Ⅱ. 정보와 참여의 예술
Ⅲ. 고급문화 대중문화, 그리고 예술
Ⅰ. 형식주의 미학의 한계

진보사관의 위기를 진단하는 방법의 하나로 대폭 활용되는 「현실단절론」,「현실위기론」 포스트 모더니즘론자들이 즐겨 쓰던 용어이기는 하나 단정이나 위기의 정체플 파악하는 에너지가 현실역사에 있음을 밝혀주는 좋은 단서가 된다. 문명의 진보를 믿고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신뢰하던 낙관론이 쇠퇴한 지금, 문화와 문화의 생산양의은 위기, 단절 등 분절의 술어 대신 개별화되고 민족화되어 가고있다.

오늘날 편리하게 통용되고 있는 다원주의는 정체성을 파 괴하지 않고 민족주의를 자극한 얘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으나 민족주의, 분리주의, 반세계 주의 또한 진보사관의 적극적 대안은 아니다.

1950년대 미국의 문학작품들은 모더니즘의 통합적 진보사관에 대한 회의를 강하게 나타낸 다. 리차드 체이스(Richard Chase)는 미국소설과 그 전통(The American Novel and Its Tradition)」에서 2차대전 이후 급격히 증가하던 낙관주의는 사라지고 급진적인 단절과 파괴 상황만을 수용함으로써 현실문학의 존재와 에너지를 극대화시켰다는 의견을 내었다.

미국문 학은 실제로 50년대와 60년대 초를 통하여 종래의 경향과 차별되는 의미있는 논제를 발전시킴 으로써 체이스의 단절론을 됫받침한다.

추상표현주의는 퉁일되고 집약된 미술개념이며 구체적인 조형성에 근간을 둔 형식주의 미술 이다. 그러나 60년대를 통하여 제기된 형식주의에 대한 대응개념의 대두는 미술의 정신적 형 식적 한계에 신축성 있고 포용력 있는 논재를 제시하였다.

이 대응개념의 정체는 지금까지도 신원이 불분명하여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지속적으로 형식주의에 대한 이탈이나 역행, 대립개념으로만 이해되는 것도 문제는 있다.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이라는 한 세기 가까 운 진보사관을 뒤로하고 현대미술사에 불투명하나마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은 60년대 이후의 문제는 다분히 전략적이면서도 회고적이어서 대중적 친밀도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문제 는 단순히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식의 대립개념이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식 분류방식으로도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회화에 관하여 언급한 다운즈(R. Downes)는 모더니즘이 회화적 나르 시즘으로 전락하여 관념화되고 자아찬미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 더니스트들의 위기를 포착하였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가지나 모더니즘 의 위기에 관한 타당성 있는 설명일 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스트를 대체한 충분조건 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문명을 토대로 한 질적 도약의 문제가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되는, 다시 말해 20세기만의 표어가 될 수 업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보고 원만한 대안을 제시하여 승계한 시대정신으로 보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시하는 또 다른 형이상학적 논재들은 오히려 모더니즘의 자아도취 보다 도 훨씬 현란하고 집착적이다. 또 그 철학을 대신하는 조형적 형식도 엄밀하게 말하면 리얼리 즘의 또 다른 아류, 또는 표현주의적 문학성을 대부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말은 것이 사실이 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신원을 통괄하기 위하여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대립개념을 설 정하기보다 오히려 해석의 폭을 확대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념설정의 이분법적 구 도는 현상을 오히려 획일화하고 이분화하여 동시대적 삶의 문제까지 구분해야만 하는 패러다 임의 난맥을 유도해내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8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수그러들면서 오늘날 예술의 신원을 편의 상 구분해내던 미술사적 미학적 술어는 사실상 빈곤하다. 왜냐하면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을 대체할 시사적이고 포괄적인 대체어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의 예술논쟁은 세기말적 처세답게 대단원의 세계주의, 국적론과 세계시민론은 필요에 따라 늘 유효하며 다만 정치 사회경제 외교문화를 총괄하는 술어만이 거의 통일을 이룬 채 정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보의 공유현상은 모더니즘의 현상학적 접근 또는 아방가르드 미학이론으로는 해결 되지 않는 안티태제일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예술의 표현확대는 가히 우주적인 것이 며 마르크스적 반복이론이나 변증법의 체계를 초월하는 테크놀로지의 진보이다.

수정주의 사관이 위력을 발휘하던 1940년대에 이미 토인비(A. Toynbee)가 제시한 포스트 모던 사관은 역사의 걸쳐을 시사적으로 접근한 이례적인 예이다. 소머벨(D.C. Sommerbell) 에 의하여 1946년 출판된 「역사연구(A Study of History)」에는 서구역사를 암흑기와 중 서기, 모던,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4시기로 구분하였다.

토인비의 의도가 서구의 상징인 합리 주의의 붕괴를 지칭하기 위하여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차용하였다 하더라도 포스트모던이 관 념이나 합리주의 역사관을 떠난 서술적 용어로 미래를 설명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토인비의 역사관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비견할 수 없는 불안이 담겨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란 대립어를 삭제시키고 모더니즘시대의 퇴폐적 관념을 명쾌하게 떠날 수 있다면 역사는 현실이던 미래던 바로 보는 눈을 제자리에 위치시킬 방법이 있을 것이란 전 망이다. 1940년대 역사의 수정주의적 시각에 민감하였던 일부 시인들은 T.S 앨리어트식 모 더니즘 술어를 떠나기 위하여 일부러 포스트모던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문화의 책략은 늘 정치나 사회현장 보다 이상적 대체어를 찾아낸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현대미술의 현장은 포스트모던의 또 다른 설법이나 다원주의의 애매모호한 술어와 함께 한편으로는 역사현실에 대한 구체적 검증작업이 러시를 이룬다. 예술에서의 역사탐구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이는 포스트모던 논자들이 말하는 신화와 파 괴, 탈집중에 의한 지역주의적 사고와는 이질적인 접근이다.

역사를 현실로 파악하는 태도는 지역주의 첨실을 내새우는 제 3세계만의 관켐이 아니다.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치던 미국이나 문화의 중런끽 사고에 취해있던 유럼도 정도의 차이를 두고 각기 민족문화의 역사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국가부흥을 위하여 자유주의를 버렸던 독일현대사는 민족의 통합과 함께 다시 한번 다원주의의 자유스런 해방감을 격리시키며 21세기 게르만 현대사의 철학을 탐구하고 나 선다. 독일 신표현주의는 낭만적이고 문화적이며 우수에 찬 20세기초 역사와 우울을 노래한 것이지만 80년대 신표현주의는 모더니즘의 독일적 결실로 인식하면서 게르만 역사주의, 게르 만 민족주의의 결속을 상징허기도 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케네드 클라크(Kenneth Clark)가 맨하탄을 물질문명 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지구의 옹기로 묘사하였듯이 로마나 파리도 인간의 문명사에 비유되기 보다는 연속되는 역사의 한 돌출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현대사 속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평화의 파괴자일지는 모르나 민족주의의 가장 현실적 수행자인 셈이며 그 국민들의 상당부분 은 그렇게 믿는다.

루이14세가 이룩한 침략의 역사나 프랑스의 부강정책은 민족주의를 토대 로 하지 않고는 발판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구체적 민족주의의 발판위에 세계주의를 구축하자 는 논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이고 위력적이다. 다원주의는 정치의 단위화, 경제의 제국 주의화, 문명과 문화의 산업제국주의화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한 문화의 독자성 차별성의 문제는 역사의 현실적 인식이란 문화의 다차원적 구조를 물고옴 으로써 예술은 더욱 닫힌 문 속으로 파고든다. 천장부지로 치 솟던 미술품가격은 몰락하고 누구도 80년대 중반 뉴욕이 누리던 문화의 헤게모니를 다시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예술의 상업주의가 부적절한 유입으로 수술을 받게됨에 따라 문화의 보호정 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문화책략의 일환으로 예술에 투여하던 참여는 서서히 고감되 어 가며 90년대 선진국형 문화정책은 실험실의 예술가들을 아사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예 술이 호기심으로 작용하던 모더니즘기의 풍류는 이제 예술의 역사적 사회적 기능의 제고로 말 미암아 전위주의의 순수성을 버리고 오히려 대중적 전위주의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대중적 전위란 용어는 원래 열역학의 볼규칙파장론 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나 오늘날 예술속에 서는 대중매채의 확산으로 인한 정보의 개념으로 혼용되고 있으며 새로운 환경을 맞은 전환기 의 미술양의과도 동일개념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중적 전위란 대중문화와는 구별되며 대중문 화와의 관계와 급속한 패턴의 전위성, 대중적 감성의 예술적 접목과도 상통한다.

역사의 현실인식이나 지역주의, 민족주의와는 상관없이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은 예술의 소재개념의 광활한 탐구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본질적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사회의 본질을 꿰뚤어 본 것이 시인들이었다면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정보매체의 확산을 육신으로 체험하고 사회에 호소하는 것은 미술가들의 몫으로 로 산정된다. 산업혁명 당시 월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공장의 굴뚝과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고 '내 막내아들 사탄이여, 네가 할 일은 기재와 가마솥과 함께 영원히 죽는 것이다.' 라며 기계주의에 대한 경고를 보내었다.

또 시인 번즈(Robert Burns)는 카론(Caron)의 쇠
공장을 지나다가 마차의 유리창에 글을 썼다. "내가 더 현명해지려고 철공장을 온 것이 아니 라 지옥에 갔을 때 놀라지 않기 위해서이다."

19세기까지 예술의 빈번한 주제로 떠오르던 빈곤, 기아, 재난, 질병은 더 이상 필연적인 악 천후가 되지못하고 20세기의 문명에 사실상 굴복한 듯이 보인다. 세기말적 주제는 오히려 인 간이 이룩한 과학문명에 대한 질적 도전과 함께 문명의 위기론에 접근해 가고 있는 현상학적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이 문명론은 1차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지만 2차적 으로는 기계와 자연, 기계문명과 자연주의에 대한 역설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그 사이에 운명 적으로서 있는 인간의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 이후의 문제는 단순히 탈냉전 이나 탈중심, 탈구조, 탈고급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존재론적 파악을 서두르고 있는 셈 이며 석기에 국지적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나 지역주의는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다 차원적 색깔의 유형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