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들어가는 말
20세기의 벽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에서 만나고 이용하게 되는 하찮은 사물들과 미술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의 문제는 예술가들에게 주요한 화두 중의 하나로 자리잡아왔으며, 이 문제에 관해 작가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해왔다.
입체파의 콜라주에서부터, 미래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다다,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누보 레알리즘, 팝 아트, 아르테 포베라, 미니멀리즘, 비물질화를 탐구하는 개념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의 사물과 미술이 만나왔던 양상을 추적하다보면, 우리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되밟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미술 속에 등장하는 일상의 사물이 보여준 변전의 모습은 그 자체가 바로 현대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갖가지 특징들 역시 미술에 일상적 사물들이 도입되어 초래하는 상황들 속에 망라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화와 균형, 통합된 체계를 추구하였던 르네상스의 전범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계가 보여주는 긴장된 시각을 추구하였던 데 있다.1) 20세기의 미술에서 일상의 사물은 작품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기보다는 이런 갈등양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존재양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일시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점 또한 현대미술에서 주목할만한 요소이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반해, 현대미술은 특히 오늘날에 가까울수록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일상의 사물을 작품에 도입했을 경우에도 역시 그러한데, 그러한 미술작품이 잠시동안만 존재했다가 곧 사라진 대표적 사례는 기계부품을 사용한 장 팅겔리의 <뉴욕에 대한 경의>(1960)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콜라주 이래로, 일반적인 미술재료가 아닌 사물을 작품 속에 도입할 때는 깎거나 빚어내는 전통적인 방법보다 주로 접착이나 접합의 방법을 사용하게 됐다. 이런 방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장기간 보존될 경우, 그 수복에 있어서 상당한 난점을 초래하게 된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수복을 해야할 상황이 생기게 된다면 제작 당시에 접착 혹은 접합을 위해 사용된 물질이 문제로 떠오른다. 당시의 물질을 원형 그대로 구할 수 있느냐의 여부, 또 비슷한 물질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물리적·화학적 환경이 변한 이후에 그러한 물질을 사용하게 된다는 변수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러한 작품들이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보다 장기보존에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17-8세기의 회화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 반면, 19세기의 사진은 형체를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희미해진 현상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나듯이, 사진 역시 복잡한 화학적 공정이 개재된 터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또한 현대미술은 그 초창기부터 통속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발전하여 왔다.2) 피카소나 브라크의 콜라주에서 대량생산된 인쇄물이 등장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현대의 미술가들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사물들을 끌어들이면서 대량생산된 통속문화의 산물들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오기도 하였던 것이다.
본 연구는 현재 기획되고 있는 전시인 《일상의 연금술》전을 위한 사전연구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며, 전시의 도입부랄까 전주곡 혹은 서곡의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다. 《일상의 연금술》전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은 제목에도 직접 지시되어 있듯이, ‘일상’과 ‘연금술’의 두 가지 주요어이다.
‘일상’은 앞서 제시하였듯, 본 전시가 미술 속에 끌어들여진 일상의 사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연금술’은 이미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등 현대미술의 주요 거장들을 익히 사로잡았던 개념인 바, 예술가들의 작업과 상상력을 통해 범상한 사물이 비범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에 주목한 용어이다.
20세기의 현대사회는 산업사회로 불리는 만큼,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사물들은 대부분 산업생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도 이러한 현대사회의 대량생산물들에 주로 주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이제 산업사회의 모습에서 벗어나 정보화사회의 단계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기에,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된 사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철지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제 디지털화된 지식기반사회로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예술의 모습도 변하고 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노동집약적인 예술보다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정보집약적인 예술, 지식기반예술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예술에 있어서도 디지털화의 물결이 거센 오늘날에는 이런 양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예술은 그저 ‘정보’의 형태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작품을 구성하는 사물의 존재시효가 소멸된 먼 미래에는 이러이러한 작품이 존재했다고 기술한 기록물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겠기 때문이다. 작품의 이미지도, 그 모습을 기록한 사진마저 사라진 이후에는, 디지털화된 정보로서의 이미지만 남아있을 것이다. 이 때의 예술은 그야말로 0과 1로 환원된 정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울러 재제작이나 복원은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원전연주와도 비슷한 개념이 될지 모른다. 원래 어떠한 모습의 작품이었다는 정보가 악보의 역할을 하면, 훗날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기술에 의해 작품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고, 그 미래에 존재하는 물질들이 아니라 작품이 존재했던 시대의 물질들을 찾아 재구성하게 되면, 이는 원전연주를 방불케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삼스러이 사물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미술에 있어서 ‘사물’의 문제에, 마침표는 아니라 하더라도 쉼표정도는 찍어주고 넘어가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먼 미래의 미술사에서, 지금 우리의 시대는 사물로서의 예술에서 정보로서의 예술로 옮아가는 전환기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대한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일상의 사물은 어떠한 식으로 그 흐름을 일구어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Diane Waldman, Collage, Assemblage, and the Found Object, Harry N. Abrams, New York, 1992, p.11.
2)이 주제에 관해서는 Kirk Varnedoe and Adam Gopnik, High & Low: Modern Art and Popular Culture,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9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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