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현대미술의 흐름을 수놓은 일상의 사물들
20세기의 장이 열린 이후, 일상의 사물이 미술 속에 도입된 가장 초창기의 사례는 피카소나 브라크를 위시한 입체파 작가들이 1910년대에 창시한 콜라주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가들은 대상물의 재현을 다루는 2차원의 평면 속에 신문지 또는 입장권, 벽지 혹은 노끈 등의 실제 사물을 끌어들여, 평면의 환영과 실제 사물을 통합하였다.(도1)
이들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환영과 실재의 통합과 함께 일어나는 충돌과 긴장에 관한 조형적 관심이었다. 조화와 안정보다는 긴장과 충돌을 내세운 새로운 미학을 통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국면들을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또한 이 콜라주들은 20세기의 미술에서 대중문화의 요소를 끌어들인 초창기의 예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평범한 물건들을 화면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예술과 생활의 구분을 파기하고 고급예술을 민주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미술을 민주화하려는 생각은 피카소가 철판으로 제작하는 <기타>의 제작안을 판매하는 것에 관해 언급하기도 한데에서 알 수 있듯3), 예술에 있어서 결과물보다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태도와도 관련을 맺게 되는데, 입체파의 작업은 미술에서 개념을 중시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20세기 초의 시도들은 하찮은 재료들을 도입하고, 빠르게 제작을 마치고, 결과물보다는 아이디어를 강조함으로써 예술을 민주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콜라주 기법은 미래주의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는데, 뒤이어 다다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콜라주 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풍자나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의 도구로까지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다다와 표현주의자들의 포토몽타주를 조형적 측면의 포토몽타주로 보고, 러시아의 포토몽타주를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포토몽타주로 보아, 양자간의 차이를 강조하며 대비시켰다.4) 하지만 다다의 작가들이나 러시아의 작가들 모두 공히 정치적 발언을 위해 그것을 활용했다.5)
다다진영의 예술가들은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기에 이른 구시대의 사회문화에 대해 반발했다. 그들은 회화나 조각의 전통적인 방법을 경멸했으며, 생활 속에 존재하는 하찮은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기존의 체제가 보여주는 사회문화에 대한 야유나 풍자 등 개념적 관심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던 작가들은 예술개념 자체를 재고해보는 단계에까지도 이르렀는데,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아 기성품의 사물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하였던 뒤샹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겠다.(도2, 3)
오늘날은 예술창작에 있어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단일의 사물을 특정한 상황 아래 제시하기만 하는, 즉 기성품에 개념만 덧입히는 행위는 그리 쉽게 찾아보기 힘든 듯 싶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시’하기만 하는 뒤샹식의 원형 그대로의 작품은 여간해선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해서는6) 뒤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다.
다다운동과 관련된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무의식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에 가담한 작가들의 작품은 일종의 시학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어떻게 보면 무의식의 시학이라 표현할 수 있을만한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다.(도4)
이런 시적인 분위기는 조셉 코넬로 이어진다. 추상표현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조셉 코넬은 여러 가지 사물들을 그러모아 개인적인 기억의 시학을 창조해냈다. 또한 그의 <메디치 슬롯 머신>은 도박용 놀이기구에서 그 아이디어를 따오기도 했는데, 미술에 게임기라는 사물을 모티브로 도입하는 현상은 훗날 외이빈드 팔스트룀의 작품들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오늘날의 우리 미술에서도 전자오락기의 화면을 작은 조각으로 입체화한 권재홍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5, 6)
한편 초현실주의가 풍미하던 1930년대에 우리 미술에서도 오브제를 활용한 모습들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팔레트 위에 유화를 그린 서동진의 작품이나, 유영국의 부조 구성물들이 주목된다.(도7, 8) 하지만 이 작품들은 ‘반예술’과 같은 특정한 목적의식이나 기치 아래 집단적 목표를 향해 전개된 운동의 일환이 아니고 개별적으로 시도된 특수한 경우의 산물들이란 점에서 체계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한 감이 있으며,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서구의 사례들과 구별된다.
추상표현주의 이후 세대로서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는 네오 다다이스트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주로 조형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뒤샹이 제기한 문제를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조형어법을 창출해냈다. 특히 재스퍼 존스는 깡통이라는 기성품을 동으로 주조했는데, 이것은 일상의 사물을 모조한 것으로, 오브제의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 있겠다.(도9)
일상적 사물의 시뮬레이션은 앤디 워홀의 작업에서도 나타나는데, 브릴로 상자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도10) 팝 아트의 작가들에게 있어 일상의 사물은 현실세계, 즉 소비사회의 풍경을 환기시키고 새로운 조형영역을 구축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모티브이자 이미지였다. 또한 그들은 소비사회의 현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하고 냉랭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 서부지역의 작가들은 종종 매우 사회비판적인 태도를 지향하였으며, 키엔홀츠 같은 작가의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 작가들은 대량생산된 제품의 폐기물들을 집적하는 방법을 통해 산업사회에 대해 화석화된 비가(悲歌)를 노래했으며, 공업화된 사회를 새로운 자연으로 보고 그로부터 나온 사물을 미적대상물로 탈바꿈시켰다.(도11)
한국에서는 1957년경부터 이승택이 돌이나 노끈 등 평범한 사물을 사용하여 작업을 한 가운데, 1960년대 초에는 돌을 화면에 도입한 안상철이나 돗자리를 이용한 평면작품을 보여준 안동숙 등의 선구적 작업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도12, 13) 그러나 이 사례들에 나타난 사물들은 산업사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민속적인 성격이 짙은 것이라 서구의 예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상황에서 아직 전근대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던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1964년 제 2회 《악뛰엘》전에서는 캔버스를 찢거나 로프를 사용한 예들이 나타나며, 그 해 열린 《원형회》전에서 이승택이나 조성묵이 다다전통을 상기시키는 사물이나 기성품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작가들이 반예술의 의도를 가지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통해 일상적 사물을 도입한 것은 1967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해에 무(無)동인은 이라는 이름 아래 오브제전을 열어 한국 최초의 반예술 전람회라 보도되기도 했다.7) 또한 같은 해 <무동인>, <오리진>, <신전(新展)>이 연합하여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은 한국현대미술에서 일상의 사물이 차지하는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 , <앙데팡당> 등의 집단으로 이어지던 이 흐름은 그러나 사회의 몰이해 속에서 잊혀지게 되고, 미술시장에서도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다.(도14, 15, 16)
제 1차 산업혁명의 핵심적 발명의 하나인 역직기(力織機)가 영국에서 특허를 얻은 지 116년이 지난 1901년 한국에 처음 도입된 데에서 드러나듯이, 제 1차 산업혁명은 영국보다 1세기 이상 뒤졌고, 그나마 주로 일본에 의해 이식되었는데, 19세기 말부터 구미에서 전기, 화학, 자동차산업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 2차 산업혁명은 1세기를 지나지 않은 이 1970년대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의 힘으로 달성된다.8)
이에 따라, 당시의 미술은 한편으로 고도성장을 통해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의 당시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과 같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듯, 당시 한국의 미술에서는 자연의 사물들을 활용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이 점이 서구의 팝 아트나 누보 레알리즘과 크게 다른 점이라 하겠다.
이 시기 우리의 미술을 아르테 포베라나 모노하의 작품들과 더욱 가까워 보이게 만드는 이런 특질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의 모습과 전근대적인 환경이 혼재하고 있었던 사회상황과 일정 부분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아르테 포베라는 대지미술, 플럭서스 등과 함께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개념을 구축하기 위한 방도로서 사물을 활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술의 역사는 다시 한번 뒤샹에게로 회귀하게 되는데, 미니멀 아트는 작품의 준거를 작품자체로9), 사물자체를 작품으로 만듦으로써 미술개념의 새로운 차원 획득을 추구했다. 사물에 개념을 덧입혔던 뒤샹에 대해, 로버트 모리스는 “사물은 사물일 뿐”이라고 응수했다.(도17, 18)
한편 다소 변주된 형태이긴 하지만 기성의 사물을 제시하기만 하는 뒤샹식의 방법이 오랜만에 다시 나타나는데, 조셉 코주스는 개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 의자의 실물, 그것의 사진적 재현, 그리고 그것의 사전적 정의를 병치하였다.(도19) 개념미술가들은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미술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사물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그 때 그 물질은 본래 주어진 의미를 떠난다.
사물의 세계를 떠나 관념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물질로부터 떠나려 한 시도가 오히려 기존의 물질과는 다른 새로운 물질을 미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결과하기도 한다.
미술에서 사물의 문제는 사물의 부정과도 깊게 얽혀왔다. 다시 말하면 미술작품들은 종종 미술이라는 종류의 사물이 아닌 것이 되고자 하여 왔다. 전통적으로 미술의 재료라고 생각되어왔던 물질이 아닌, 미술의 세계에서는 낯선 일상적인 물질들을 미술의 세계에 도입하는 것은 한편으로 미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또 한편 미술의 폭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미술세계의 물질이 지니는 외연을 넓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질에서 벗어나려던 것이 그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다시 물질의 세계로 귀환한 것이다.
미니멀리즘 이후, 미술의 외양은 그 영향 아래 크게 바뀌었다. 일상적 사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중에서 미니멀리즘의 양식적 유산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작가 중 하나가 토니 크랙일 것이다.
용도폐기된 산업사회의 잔재들을 재활용하는 토니 크랙의 작품에는 일정한 단위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미니멀리즘의 어법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도20) 또한 1980년대를 풍미한 미술은 워홀식의 팝 어법으로 다시 회귀하는데, 역시 미니멀리즘의 양식적 영향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산업디자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외양, 속된 표현으로 “뺀질뺀질한” 모습을 띠는 경우가 잦다.
토니 크랙과 같이 영국 조각의 전통에 서 있는 작가들이 대처시대의 물질만능주의 경향을 비꼬는 태도를 보이는데 반해, 제프 쿤스를 위시한 미국의 작가들은 상업문화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방법까지 미술에 적용시켜, 훨씬 더 “뻔뻔스러운” 경향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도21, 22)
한국에서는 1960-70년대의 실험미술이 한때의 열기로 사라진 이후 단색회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80년대에 들어 미술계의 상황이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구도로 요약되면서 미술에 일상의 사물을 도입하는 것은 중심적인 문제로 떠오르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다만 , <메타복스>, <난지도> 등의 소집단들을 통해 조금씩 탐구되던 일상적 사물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전면에 부각된다. 이는 권영우(도23), 조성묵(도24)과 같은 원로작가의 90년대 작품들이나, 80년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성장한 노상균(도25), 이불, 최정화 같은 작가들의 급부상으로 드러난다.
3)Diane Waldman, 앞의 책, p.19.
4)위의 책, p.90 그리고 p.324의 주13 참조.
5)위의 책, p.92.
6)뒤에 논의할 개념주의자 조셉 코주스의 경우, 사물을 제시하되 그 언어적 개념이나 재현물 등과 함께 제시하면서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하였기 때문에 설치작업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적 맥락 속에서 단일한 사물을 ‘제시’하기만 했던 뒤샹과 차이가 있다. ‘신개념주의’란 범주 속에 포함되어 다루어지기도 하는 제프 쿤스의 경우에는, 기성제품에 상점 디스플레이의 방법을 덧입혀 제시하거나, 작가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주문제작의 공정을 개재시킨다. 아주 평범한 상황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예술행위의 경우에도, 상황 자체는 ‘레디메이드’일지 모르나, 그러한 상황을 특정한 예술적 맥락 속에서 제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는 맥락 속에서 특정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조작과정이 개입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p.21.
8)이헌창, 『한국경제통사(제2판)』, 법문사, 2003, p.568.
9)윤난지, 「미니멀 아트에 나타난 “오브제”로서의 작품 개념」, 『이화여대대학원논문집』 제 1집,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88,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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