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추상적인 면 혹은 바깥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 1993년


안규철(1955- )은 1980년대 중반부터 사진, 조각, 글쓰기 등의 다양한 활동을 매개로 사회비판적 시각의 개념미술을 보여주어 왔다. 그는 1980년대 이후 나타난 절제된 오브제(object)의 서사적 차용으로 특징지어 지는 독특한 개념미술 경향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그 남자의 가방>(1993)은 안규철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허구와 실재'라는 주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모두 11점의 드로잉과 그에 상응하는 글, 그리고 글의 중심 소재인 가방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미지의 남자가 맡기고 간 날개모양의 가방에 관한 이야기를 드로잉을 통해서 들려준 후, 마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그것이라는 듯 구체적인 날개모양의 가방을 선뜻 제시한다. 안규철은 이 작업을 통하여 실재와 허구는 그물망처럼 서로 엮어져 있으며 결코 분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남자의 가방>에는 우연히 마주친 어떤 남자의 부탁으로 맡게 된 그 남자의 날개가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열어 보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날개'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모순된 대상이다. 추상적인 관념으로서의 그것은 '꿈' 이나 '희망', '행복'과 같은 현실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그것은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로서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 날개는 타인의 것이자, 나에게 위임된 것이며, 내가 선뜻 열어보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날개 모양의 가방을 보면서 그것이 날개일 것이라고 믿는 감상자의 시선에도 역시 불확실함과 희망 섞인 투사(投射)가 뒤섞여 있다. 우리는 작가의 말을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등등... 추상은 부재(absence)의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 우리가 생산하는 특수한 관점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부족한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대상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형근, <옥빛, 한복을 입은 아줌마>, <웃옷을 어깨에건 아줌마<, 1997년


오형근(1963- )의 <옥빛 한복을 입은 아줌마>(1997)는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의 위치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자존적이고 주체적인 한 인격체로 인정되기보다는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구의 어머니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그의 사진들은 단순한 아줌마를 찍은 인물사진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 연작은 극도로 사실적인 인물 묘사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여성들의 정면 아래쪽에서 순간적으로 주어진 플래시 조명은 상대적으로 배경을 어둡게 만들면서 이들의 얼굴을 강렬하고 추상적인 면(面)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이들의 상체와 얼굴의 예민한 표정을 통해 작가는 '아줌마'라는 이름의 계층이 속하는 모호한 특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얼굴은 '하얀 판 위에 있는 두 개의 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권위 있는 기표가 아닐 경우 수많은 레이어들로 가려져 있는 투명한 막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미술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얼굴들은 이곳이 추상의 끊임없는 전쟁터임을 보여준다.


이용백, <천사-전사>, 2005년


이용백(1966- )은 디지털문화와 예술의 접점들을 탐구해온 작가이다. <천사-전사>(2005)는 퍼포먼스(Performance), 설치, 비디오 등의 작업방식이 결합되어 완성된 작품으로 화려한 인조 꽃이 인쇄된 천의 배경과 바닥, 같은 꽃무늬 천으로 된 군복을 입은 6명의 군인들, 그 앞 공간에 매달린 인조 꽃들의 세팅으로 구성되었다. 이 공간은 오직 화려한 인조 꽃들로만 채워져 있는 인공적 공간으로 '시뮬레이션(simulation)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그 안에 인조 꽃무늬로 완벽히 위장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전진하고 있는 상황 설정은 이 시뮬레이션 공간이 생존이 걸려 있는 극한적 전쟁터임을 암시한다.
군인들의 움직임은 집중하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다.군인들이 입은 군복에는 'Windows', 'Quicktime', 'Word', 'Explorer'등의 인터넷 로고들이, 명찰에는 '보이스', '피카소', '뒤샹', '백남준', '다빈치' 등 미술사의 대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예술의 진정한 생존과 위상 자체가 모호해지고 예술가는 독창적 창조가 아닌 복제물의 차용과 재구성이라는 시뮬레이션 형식을 빌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는 오늘날의 예술이 가상공간 속에서의 무수한 복제와 편집, 변형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전략적인 산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창열, <무제>, 1969년


1970년대 김창열(1929- )의 작품은 '동양적인 정신성'에 기초한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그는 정제된 화면 위로 투명한 물방울 그려 넣음으로써 캔버스라는 지지체와 일치되는 환영의 극한을 제시하였다. 비평가인 오광수는 이를 '자기 환원적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의 틀에서 이해될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회화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평면', 관념의 장으로서의 화면이 창출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김창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물방울 그림은 1972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려 우연히 발견하게 된 물방울의 맺힘과 흘러내림, 투명함에 매료된 김창열은 즉시 그의 캔버스에 물방울의 환영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화면은 바로 이 모티브에 의해 다양한 조형적 실험이 가능해지는 추상 회화의 영역에 다다르게 되었다.

1969년 작 <무제>는 작은 구형(球形)의 추상적 모티브들을 보여준다. 이보다 앞서 김창열은 거친 회화적 표면 위에 상처나 탄흔(彈痕)을 연상시키는 구멍들을 그리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 바 있다. 여기 보이는 보라색의 투명한 구체들은 마치 화면의 중심부가 변성을 일으켜 동그란 입자들로 변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적 표면이 유기적인 알갱이들로 바뀌기 시작하는 과정은 이후 캔버스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형태로 이어진다. 화면은 상처를 지닌 피부이면서, 그 상처에 의해 변성되는 유기적 표면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치 땀처럼) 물기가 배어나오는 힘의 응집의 장(場)이기도 하다. 회화적 표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같은 관념들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유한 기억과 경험들을 함축한다. 한국 근대사를 통해 경험된 고통과 상처에 대한 기억, 망각과 회상의 이중적 구조, 피와 땀에 대한 상징,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회화적 조건 속에서 형식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등이 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무제>는 그런 의미에서 이후의 '물방울 회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예외적인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기봉, <채식주의자>, 1995년


이기봉(1957- )의 <채식주의자>(1995)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서 말은 자연을 상징한다. 벽을 바라보고 있는 세 마리 말 중 한 마리는 소가죽이 씌어졌고 한 마리는 흰 바탕에 검은 색의 인간 형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다른 한 마리는 검정색으로 꼬챙이가 꽂혀 있으며 이 말들은 각각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소가죽이 씌워진 말은 유전공학에 의한 돌연변이의 가능성을 나타내며, 인간형상이 그려진 흰 말은 자연 속에 살면서도 그에 대해 끊임없이 항의하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초식동물인 말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무릇 어떤 '주의'라는 것이 인간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자연의 주어진 섭리에 대해 자신의 관념을 덧씌우는 인간의 아집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세 개의 말의 형상은 우리에게 친숙한 반면, 특이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던지 머리가 벽을 향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은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초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의도적인 말의 변형은 그것이 우리의 상상과 맞닿아 있는 관념적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의 표면은 다양한 인간의 그림자와 흔적들로 뒤덮여 있다. 초식동물인 말은 말장난처럼 언어를 의미하는 '말'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어로서의 '말'은 다른 관념들과 착종(錯綜)을 일으키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로 인해 얼룩진 용법을 지니거나 그것의 변용을 일으킨다. <채식주의자>는 다양하고 친숙한 관념들의 투사를 유도할 뿐 아니라 그것들의 연결접속을 통해 미묘한 의미의 조합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감상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I. 모호함과 비가시성    II. 일상 속의 추상    III. 추상의 기술    IV. 추상적인 면 혹은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