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테크놀로지

강태희(경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Ⅰ. 여는 말
Ⅱ. 테크놀로지와 미술의 관계
Ⅲ. 1960연대 테크놀로지 아트展과 그 이후
Ⅳ. 닫는 말

Ⅲ. 1960연대 테크놀로지 아트展과 그 이후

과학과 미술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여하에 관계없이 과학과 테크놀로지 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미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나 이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이 고조된 것은 테크놀로지의 영향으로 미술의 모습이 크게 변화한 이후의 일이다.

즉 미술이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통적인 공간예술 또는 시각 예술적인 한계를 벗어던지거나, 또는 미술은 靜的이라는 철칙을 깨고 움직임을 도 입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테크놀로지의 대변자는 말할 것도 없이 기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1968년도의 (기계시대의 종말에서 본 기 계 (The Machine as Seen at the End of the Mechanical Age))전은 여러모 로 시사적인 전시회였다.

이 전시는 새로운 전자매체의 등장으로 종전의 기계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을 증 언하는 것으로 미술에서 기계의 사용을 역사적으로 개괄해 본 것이다. 전시록의 未 尾는 그때로서는 가장 첨단적인 비디오 아트를 제시하는 것으로 앞으로는 전혀 다 른 테크놀로지가 미술과 접목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폰터스 훌텐(Pontus Hulten)은 현대와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의지로 조정할 수 없는 자체적 인 발전을 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테크놀로지가 지배할 미래의 사 회는 미술에서 중시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감, 또는 인간의 능력등을 고려하는 것 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화된 테크놀로지를 말하는 것인데 그 모델을 미술에서 추구되는 가치에서 찾고자 하고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행복하고 조화로운 공존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는 시대와 사조에 따라 변해왔다. 20세기에서 양자의 결합에 대한 첫 시도는 미래주의의 테크놀로지 예찬 을 필두로 유럽에서 선행되었다. 이는 1920년대의 다다이스트들의 기계에 대한 풍 자와 해학 섞인 비판과 이에 대비되는 구성주의자들의 열성적인 관심을 거치고는 1930년대의 비관론으로 이어졌다.

테크놀로지가 본격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 기 시작한 20세기 후반에 와서 미술과 테크놀로지를 다룬 역사적인 전시회로는 파 리에서 열린 1950년대의 마르셀 뒤샹, 알렉산더 칼더 등이 참여한 (움직임(Le Movement))전과 1960년대 초반의 암스텔담에서의 최초의 (국제 미술과 모션전 (International Exhibition of Art and Motion)>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바로 키네틱 아트와 빛과 움직임을 주제로 한 많은 테크놀로지 아트전으로 연결되며 또 새로운 비디오 아트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져서 1960년대 후반은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전성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테크놀로지 아트에 대한 관심은 6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전파된 것으 로 1966년이 그 중요한 고비가 된다.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던 뉴욕 아모리 (Armory)에서의 (아홉개의 밤: 劇과 엔지니어링(Nine Evenings : Theater and En- gineering))도 1966년 가을 스톡홀름에서 기획되었던 (미술과 테크놀로지)축제의 미국판 행사였다.

미국의 테크놀로지 아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벨(Bell)전 화 회사에 근무하던 스웨덴인 빌리 클뤼버(Bitty Kluever)박사를 논하지 않을 수 없 는데, 그는 50년대에 암스텔담에서 홀텐의 키네틱 아트展의 자문 역할을 하던 사람 으로 미국에 있는 쟝 팅글리(Jean Tinguely)의 유명한 自爆 미술 (뉴욕에의 경의 (Homage to New York)) (1960)를 위한 기술 고문역으로 등장하여 여러 다른 미술 가들과도 연관을 맺게 되었다.

그는 존 케이지, 로버트 라우센버그등과 함께 (아홉개의 밤)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미국 최초의 퍼포먼스와 엔지니어링을 결합한 시도는 미술가와 엔지니어가 동등한 입장에서 협동작업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초점이 있었다.

주요 출품작으로는 리모트 콘트롤로 조작되는 기계화된 무용 무대, 오디오로 연결된 테니스 경기, 어둠 속에서 관중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적외선 TV 세트, 각종 오디오 회로와 확성기 또는 TV 영상과 소리를 매체로 한 일종의 테크 놀로지 콤바인 등이 있었다. 이 행사는 많은 비용과 청중을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술적 고장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대체적인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마도 이 (아홉개의 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부산물로 결성된 EAT(Experi- ments in Art and Technology)일 것이다 1966년 말에 클뤼버와 라우센버그의 주도 아래 그 결성이 공고되고 이듬해에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된 이 단체는 미술과 테크 놀로지의 본격적인 접합을 시도한 것으로, 미술가들에게는 필요한 테크놀로지를 제공 하는 서비스 기관을 자처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미술가와 엔지니어 모두의 대단한 호응을 얻어 전성기에는 6,000명이나 되는 회원수(미술가와 기술자 반반씩)를 자랑 하였고 요긴한 정부 후원과 기업의 지원을 받았다. EAT의 두가지 중요한 업적으 로는 대개 부루클린 미술관에서의 (또 다른 시작(Some More Beginnings))전과, 1970년의 일본 오사까 엑스포 '70에 참여한 미술과 테크놀로지館인 펩시-콜라 전시 관의 건설을 든다.

그러나 성공에 더불어 지원금에 대한 회원의 불만 등 말썽도 적지 않았던 이 단체는 펩시-콜라社와의 경비를 둘러싼 마찰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와해되 는 운명을 겪었고, 한때 많은 미술가와 기술자들에게 테크놀로지 미술의 협동제작의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문제점을 노정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EAT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미국에서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시도한 또다른 기관으로는 1968년 초에 출범한 MIT의 「Center for Advanced Visual Studies」가 있 다.

1940년대 초반에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밑에서 시카고 바우 하우스의 사진부를 이끌었고, 당시 MIT의 시각 디자인科의 과장이던 헝가리 태생 의 기오르기 케페스(Gyorgy kepes)교수가 책임을 맡았던 이 센터는 모홀리-나기의 생각을 충실히 구현하는 이념을 가졌고 MIT 외에도 인근 지역의 여러 산업체들의 지원을 받았다.

1969년에는 키네틱 또는 라이트 아트로 잘 알려진 오토 피네(Otto Piene), 타키스(Takis), 웬 잉 차이(Wen-Ying Tsai), 잭 번햄(Jack Burnham) 등이 이곳에 연구원으로 초대되었다.

이들은 MIT에 있는 과학자들과 장비 등의 이점을 바탕으로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주제로 한 개인적 작품이나 또는 대규모의 그룹 작품을 제작할 것을 의도했는데, 실제 성과는 홀로그라피 시각 물리학, 마이 크로스코피 등의 사진과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센터의 업적에 대해서는 상 반된 평가가 있는데 직접 초대되었던 번햄은 센터의 설립목적이 표면적인 것과는 달리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 성과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다음으로 논의할 만한 60년대 말의 중요한 테크놀로지展은 1944년에 처음 만들 어진 컴퓨터의 창조적인 사용에 초점을 둔 <사이버네틱 세렌디피티(Cybernetic Serendipity) >전이다.

영국의 I.C.A.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에서 1968년에 개최된 이 전시회는 사이버네틱을 컴퓨터나 인간의 신경조직과 같은 복잡한 전자 기계에서의 조정과 의사소통을 다루는 과학으로, 또 세렌디피티는 행복한 우연의 발견을 하게 하는 기능으로 각기 정의하였다.

이 전시는 테크놀로지와 창의성의 결 합을 시도하여 컴퓨터가 만들어낼 수 있는 미술, 음악, 시, 영화 등을 선보인 것으 로 굳이 미술가와 과학자 또는 엔지니어의 손의 구별을 명시하지 않았다. 출품작은 컴퓨터로 출력된 악보, 컴퓨터가 디자인한 무용, 시, 텍스트 등이며, 그외에 사이버 네틱과 디지틀 컴퓨터의 발전사 등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미국으로 순회전을 가 졌는데 처음에는 스밋소니안(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유치할 계획을 했다가 공간 과 기술의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고 추후에는 워싱턴의 코코란(Corcoran)미술관으로 옮겨졌으나 규모는 훨씬 축소되고 기계가 파손되는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어 종 국에는 I.C.A.의 기획자가 이 전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였다.

쥬이쉬 미술관(Jewish Museum)에서 있은 (소프트웨어 (Software) ) (1970) 전은 또 다른 컴퓨터와 첨단 과학전이었으나 그 역시 말썽과 논란속에 막이 내렸다.

전시를 기획했던 번햄에 의하면 이는 전술한 (기계시대의 종말에서 본 기계)전의 연속으로 전시 이념을 MIT의 수학자였던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교수의 사이버네틱 이론에 두고, 미술관 안에서의 첫 컴퓨터化한 미술환경의 창조를 목표로 삼았으며, 미술을 특히 강조하기 보다는 교육적이고, 관람자 참여와 정보처리 과정을 보여주 는데 치중한 것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개막 전야에 일어났던 뜻밖의 불상사와 기술적인 고장 문제 등으로 당초 의도한 모습의 전시회가 되지 못한 사정도 있었지 만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MIT의 건축기계그룹(Architecture Machine Group)이 제작한 (찾기(Seek))(1969-70)라는 작품이었다.

이것은 2인치의 정방형 의 상자들이 쌓여있는 속이 들여다 보이는 플렉시글라스 상자 안에 실험용 쥐 (gerbils)들을 넣고, 그들이 그 상자를 움직이면서 재배치하는데 따라서 컴퓨터가 그 들의 뜻에 맞도록 환경을 보완, 배치하는 장치였으나, 컴퓨터의 고장으로 쥐들은 흐 트러진 환경 속에 갈팡 질팡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특히 이런 종류의 전시회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동물 보호 차원에서 강력한 항의와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전시의 후유증으로 미술관의 관장이 자리까지 잃게 된 이 사건은 미술과 테크 놀로지의 결합 시도에 찬물을 끼얹은 효과를 냈다고 보겠다.

이러한 일련의 테크놀로지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전시회는 로스앤젤레스의 카 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과 테크놀로지(An and Technology))(1971)전이었다.

총책임을 맡았던 모리스 터크만(Maurice Tuchman)은 당초에 남가주 지역에서 37 개의 기업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약속받고 22명의 미술가를 선정하였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예산은 엄청나게 초과된 가운데 기업과 미술가의 마찰로 미 술가가 작업을 포기하거나 또는 기업이 지원을 포기하거나 하는 결과가 일어나고, 무엇보다 미술이 자본과 유착한다는 비판이 비등한 가운데 결국 최후까지 남아서 작업을 한 작가의 수는 16명으로 줄게 되었다.

전시 리뷰를 쓴 번햄에 의하면 참여 작가는 세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테크놀로지 아티스트요, 다른 하 나는 이미 명성이나 있는 작가들로 클래스 올덴버그나 앤디 위홀 등이고, 나머지는 잡다한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 이름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대개는 기존의 자 신의 작품에 테크놀로지를 가미한 정도이고, 엄청난 경비를 들인 것에 비해서는 진 정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예는 드물다고 보았다. 결론적으 로 그는 이 전시회를 끝으로 당분간은 대규모의 미술과 테크놀로지전이 시도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미술과 테크놀로지전들이 대개는 실패로 끝난 1960년대 후반의 상 황에서 脫-기계 시대의 대변자인 전자(electronics)미술 비디오가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디오 자체가 특히 초창기에 는 가내 수공업 정도의 개인적인 기술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분야였고 또한 편집이 나 특수 효과를 별로 살리지 않는 다큐멘타리 등이 예술이라는 명칭을 달지 않은 채 등장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는 처음에는 1960년대 후반의 키네틱 아트의 일부로, 또는 라이트 아트의 한 종류로 소개되었고 따라서 조각으로 분류되었다. 이 당시에 주로 유럽의 테크놀로지 아트를 미국에 소개하는 창구역할을 한 하워드 와이즈 (Howard Wise) 갤러리에서의 <궤도의 빛(Light in Orbit)>(1967)이나 <빛의 축제 (festival of Lights)>(1967) 등의 전시회는 라이트 아트를 다룬 것이었지만 백남준을 위시한 참여했던 많은 미술가들이 후에 비디오 작가가 되었다.

와이즈 화랑에서의 최후의 중요한 미술과 테크놀로지전은 TV 미술에만 국한된 것으로 1969년에 개최된 (창조적 매체로서의 TV(TV as a Creative Medium))전은 비디오 미술가들을 최초로 결집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의 부랜다이스 대학 의 로즈(Rose) 미술관에서의 (비젼과 텔레비젼(Vision and Television))전은 미술관 에서 개최된 최초의 비디오 전시로 비디오 아트의 확립을 예고한 것이다.

비디오 아 트는 1970년대 초반에 다룬 테크놀로지 아트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가장 큰 전성기 를 맞았고 점점 기술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소위 예술 비디오(State-Of art Video)가 만들어지고 개인적인 차원의 비디오 테크놀로지는 비용과 장비면에서 방송국에서 제작되는 것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비디오의 장르면에 서도 단일 테잎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비디오 인스텔레이션 분야가 개척되어 종래의 靜的인 조각개념을 타파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발전하는 첨단의 기술을 미술 이 공유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비디오 아트에서 특히 진보한 테크놀로지를 성공적으로 활용한 예는 비디오 합성 기(Synthesizer)의 제작으로 백남준이나 여타 작가들이 만든 합성기들이 이후 컴퓨 터 미술의 전조가 된 획기적 사건이다.

이미지 프로세싱(image processing)이라고 불리우는 이미지의 형태적인 조작에 관심을 가진 비디오 작가들은 머지 않아 컴퓨 터를 비디오에 사용하게 되고 1980년대 초반에는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Siggraph(Special Interest Group in Computer Graphics)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의 극점을 이룩한 예로는 백남 준의 위성을 사용한 비디오 쇼를 들 수 있는데 1984년에 처음 제작된 (안녕하세요, 오웰씨(Good Morning, Mr, Orwell))를 선두로 비슷한 후속작품들이 제작되어 미술 의 개념을 뿌리채 뒤흔든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외에도 최근의 미술에서 활용되는 테크놀로지로는 레이저와 홀로그램, 또는 최 첨단의 VR(virtual reality, 가상의 실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이저는 1960 년에 발견되어 일찌감치 미술가들을 매료시켜 왔다.

로버트 휘트만(Robert Whitman)이나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등이 미술관에서 이를 사용한 바 있고 1969년에는 첫 중요한 레이저 전시회인 (레이저 미술전(Laser Art Exhibition))이 신시내티 미술관에서 열렸다. 홀로그램은 레이저를 이용한 3차원의 미술로 초기에 는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이 주로 이를 이용한 작품을 발표하였고 1969년 에 (N-차원의 공간(N-Dimensional Space))전이 핀치(Finch)대 미술관에서 열렸 다.

가장 최근의 VR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그 실제감을 극대화한 예가 되겠는 데 이것은 관람자가 수동적인 감상의 위치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테크놀로지 조작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리얼리티의 재현이 그 현실과 환상의 한계를 거의 초월 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앞으로 테크놀로지가 더욱 완벽해진다면 우리의 현 실감각까지를 조정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분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