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예술작품의 질적 판단에 있어서 보편성과 특수성
우리는 예술작품을 대할 때 마음에 든다. 감동적이다. 우수하다. 훌륭하다. 교훈적이다 등
어떤 방식으로든 판단을 한다. 만약 이 판단이 주관적인 취향이나 기호(嗜好)의 문제로 환원
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이 과연 존
재 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 판단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작품이 질적으로 우수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사 전체를 관류하는 보편적이고 항구적이며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전제
는 작품을 제작한 작가들의 의도와 생각, 방법과 실현과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입장,
당시대의 취미기준과 세계관, 신념, 종교, 물적 조건 등에 의해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예컨
대, 고대 그리스시대의 고전조각이 수학적 비례에 바탕한 조화와 균제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
이라면, 중세시대의 종교조각은 신앙의 신비와 은총이란 기독교적 상징이 실제를 얼마나 훌륭
하게 재현했는가 하는 문제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스적 아름다움과 다른 종류와 성질의
미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미술은 그리스적 규범으로 볼 때 어색하고 지나치게 공
식화된 특징이 있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플라톤으로부터 지지받았다.
굳이 과거의 미술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현대미술 또한 고전과 다른 맥락에서 예술작품
의 본질과 가치를 천착하여 왔음을 미술사는 밝혀주고 있다.
특히 현대미술의 맹아를 보여주
는 근대의 세기말적 풍조를 돌이켜 보면, 고전기를 풍미했던 통일성과 안정, 형식적 완결성
등이 의식적으로 거부되고 키이츠(J.Keats), 바이런(Byron), 위고(V. Hugo), 로트레아몽
(Lautreamont), 보들레르(C. Baudelaire), 랭보(A. Rimbault) 등의 문학가와 고야(F.
Goya), 뵉클린(A. Bocklin), 모로(G. Moreau), 클림트(G. Klimt), 쉴레(E. Schiele), 고흐
(V. Gogh), 뭉크(R Munch) 등의 화가에게서 볼 수 있듯이 불안, 폭력, 광기, 좌절 파멸 등
의 격정적이고 퇴폐적인 감정의 분출을 발견할 수 있는 바 이것을 플라톤적 독단주의의 척도
로 재단할 수는 얼을 것이다.
만약 이들의 작품 속에 질적인 진정성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독창적 예술성과 그 시대를 관류하던 정신적 흐름, 사회적 조건이란 다양한 스펙트
럼에 의해 총체적으로 분석된 자료에 근거하여 그것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미
술을 평가하는 기준이 주로 대상을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했는가 - 물론 플라톤은 모방을 열
등한 것으로 보았지만 - 하는 것에 맞춰졌으나 현대미술은 기술적 숙련에 기초한 재현을 덕
이상 유효한 평가의 척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현이 지배하던 시대에 예술가들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자신의
예술가적 소명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근법을 발견한 이탈리아 르네상
스 시대에 맡은 예술가들이 세계의 단순한 재현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알베르티(leone Ballista Alberti)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은 무엇보다 자연의 모방을 강조하였으나, 그것이
외양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그속에 내재한 질서의 모방을 강조하였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플라톤적 규범이 새롭게 되살아나는 이러한 신 플라톤적 태도는 예술의 완성을 위해 자연의 모방뿐만 아니라 과거 거장의 작풍을 모방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어쨌든 재현의 시대에 많은 예술가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나 대상(혹은 법칙)의 모방을 통
해 그 세계가 지닌 본질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미술이 세계의 재현이란 굴레로부터 벗어나 독
자적인 가치표현의 활동으로 인식된 이후 질·량·감(質 量 感)은 미술가들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끊임없는 문제의식을 제공해준 요소임에 분명하다.
예술이 자율성을 확보함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인증하는 기준은 모방의 능력이 아니라 독창성이 되었으며, 그
의 작품이 독창적이냐를 가름하는 행위가 그것이 질적인가를 따지는 것과 동등한 평가의 척
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의 창조적 과정은 매체의 사용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에 질적
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예술가가 매체와 타협하거나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어떻게 실천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하지만 예술의 질적인 가치평가가 결코 매체사용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는 형상과 표현이란 보다 불가해한 특질이 존재하며, 예술가는 작업과정에서 이러한
커다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스테판 페퍼(Stephen Pepper)는 예술을 '특질의 고
양'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때 미적 특질이란 순수한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 느껴진 특질을 의미
한다.1)
그런 점에서 질·량·감이란 예술의 본질적인 국면과 관련된 가치표현으로서의 예술은
성질의 객관적 복합요소,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 주관과 객관의 물질적 연관성이란 문제와 필
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화가였던 왕유(王維)가 후아산을 그리기 위
해 전전긍긍하다 기어이 필법을 깨닫게 되었다는 일화는 예술가가 자연이나 예술작품들을 수
동적으로 모방하는 것에 의해서 창조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산을 그리기 위해 그 산을 직접 찾아가서 산의 외양과 구조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러나 그
가 그리고자 한 사상(思想)과 형태가 관찰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그는 산의 형
상에 대한 오랫동안의 사색끝에 불현듯 거의 무의식적이라 할만한 상상력에 의해 결정(結翁)
되어 의식을 통해 분출되는 진정한 산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즉 그는 잘 알려진
바대로 8세기경 당대의 뛰어난 화가이자 시인으로서 시 서·화 · 거문고에 능했으며, 특히
동진 이래의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의 풍경을 계승하는 한편 수묵산수화를 창시하는데 중요
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왕유에 의해 시와 그림이 결합되는 형식 즉,
그림은 소리없는 시(無聲詩)요, "시는 소리있는 그림(有聲畵)이라는 비평이론을 낳았다는
점이다. 3)이것은 서구세계에서 고대로마시대의 시모니데스가 했던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시
는 말하는 회화'기는 금언과 더불어 호라티우스의 그림은 시처럼(ut picture poesis)란 말
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 재현이 외양의 복사가 아닌 어떤 정신적인 것의 표출임을 상기시켜
준다.
마치 물에 가라앉은 고체의 체적이 넘쳐나온 물의 체적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레
카'(Eureka)라고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나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깨달음'을 연상시키는 이 일
화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를 사색하는데 하나의 준거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문화의 꽃이라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이 우리 사회의 문화수준을
드러내는 창조활동의 하나라는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는 이즈음 미술의 창작과 비평 및
수용 전반에 걸쳐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행위가 더없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미술'95>전의 주제로 "질·량·감'을
설정하여 이미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이 글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술에 있어서 질량감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의도로 집필된 것으로서 기왕에 도록을 통해 발표하였던 필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
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제는 미학자나 예술철학자의 학문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필자와 같은 현장종사자에게 매우 부담스럽고 위험한 일이 아
닐 수 없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이·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금껏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가치고 집필하였으나, 필자의 무지와 논리적 비약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지 모른다는 우려
를 떨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의 질적 측면을 되짚어보고 그 정체가 무엇인
지 알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매우 포괄적인 이 주제영역에 대한 개념적 접근
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이 글을 서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질·량·감은 비단
현대미술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개념이므로 이 개념
을 현대미술에 어떻게 대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질과 양은 분리, 양립될 수 없는 통합적
개념이란 점, 그리고 심리학에서 규정하다시피 감(Sensation)은 대상(Object)에 대한 흥미
(Interest) 아래 성립가능하므로 질과 양을 포괄한다는 문제 즉, 감(S)=흥미(I)+대상(O)이
란 공식을 수립할 수 있으므로 감은 대상과 미적 흥미 사이에서 도출되는 관계(Relation)이며
반응(Response)이기 때문에 예술의 특질이 결국 감에 맞춰져야 한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질·량·감이란 개념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실제 예술작품의 평가에 이런 개
념이 얼마나 유용한가를 따져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