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의 질적 판단에 대한 비평철학적 고찰

최 태 만(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Ⅰ. 예술작품의 질적 판단에 있어서 보편성과 특수성
Ⅱ. 질·량·감의 인식론적 접근
Ⅲ. 정서의 표현과 가치의 발견
Ⅳ. 미술사적 접근

Ⅳ. 미술사적 접근

문헌으로 알려진 것 중에서 예술작품의 질적 평가에 대한 기록은 고차사학자 플리니우스 (Plinius)의 「자연사」 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기원전 3세기 초에 활동했던 그리스 화가 재욱시스(Zeuxis)에 대해 소개 하고 있는데,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들고 있는 소년을 그렸을 때 새가 와서 그 포도송이를 쪼아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제욱시스는 소년만 남기고 포도송이를 지웠다는 바 이 일화는 화가가 눈속임의 질(Quod Smilius)보다도 깊이있는 질(Quod Helios)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질과 양의 문제에 대해 최초로 규명하고자 했던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일 것이다. 그는 '과학이 사물의 양을 생각하는 반면 예술은 사물의 질을 생각한다'고 주 장함으로써 단순히 기술(technf)에 불과하던 회화를 거의 신성(神性)에 버금가는 것으로 끌 어올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질, 양, 위치, 형상을 회화의 주요한 부분으로 분류하여 질은 모든 정도의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그늘(陰)라고 파악했던 반면 양은 음들의 크기이자 다른 음들에 비해서 얼마나 큰가하는 관계를 의미하며 위치는 음들이 형상에 대해 어떻게 위치해 야 하는가 하는 구도를, 형상은 음의 기하학적 형식이라고 말했다.

레오나르도가 회화의 질 을 그늘로 주장했던 배경에는 음에 대한 그의 특별한 선호가 작용했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 다 르네상스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원근법에 대한 그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콰트로첸토 르네상스 때 정립된 선원근법은 세계탐험을 통한 신대륙의 발견, 물리학 과 지리학의 혁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자치도시의 공격적인 시민들에게 지리학적 인 세계와 교통에 관한 실질적인 지식이 믿을만한 체계 안예 공간적 연대관계를 나열하는 방 법을 낳았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알베르티의 과학적 원근법을 색채, 대기, 선원근법이란 세 가지로 세분화 하였으며, 음의 단계적 변화를 통한 미적 표현은 색채원근법과 관련이 있다. 그 결과 (동굴 속의 성모)와 같은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것은 화면이 꽉찬 듯한 시각 적 효과까지 거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인문주의자이자 과학자이며 뛰어난 예술가였던 레오나르도가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할지라도 회화가 과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레오나르도가 주장한 회화 의 질적 차원은 보다 형식적인 것에 치중한 것으로서 앞의 인식론적 접근에서 분류한 방식에 충실하자면 양에 가깝다. 세잔 역시 충만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거장들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다.

들라크르와처럼 그는 루벤스와 이탈리아 거장들로부터 웅장함을 물려 받았는데 그것은 화면의 크기가 아니라 변화의 복잡함이나 무게와 관련된 웅장함이라고 할 수 있다.

빛과 색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찰나적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던 인상주의자들이 시간 의 유동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형태가 점차 파괴되는 것을 보고 세잔은 화면 위에 견 고한 구축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은 본질적으로 세 개의 형태로 환원된다는 이 론을 낳았으니 세잔은 예술의 질과 양에 대해 신중하계 생각했던 화가임에 분명하다.

회화에 국한할 때 회화의 형식적 조형요소 중 본질적인 것을 들라면 무엇보다 평면이란 공간을 주목 하지 않을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평면 속에 마치 대기가 통하는 것처럼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원근법을 창안했으나, 그것은 사물과 세계의 외형에 대한 발견에 불과하며 게다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외양적 접근에 머물고 있다.

이에 비해 세관은 화면의 견고성을 위해 수 세기 동안 유럽회화를 지배해왔던 원근법조차 과감하게 버렸으며, 결과적으 로 입체파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추상미술의 형성은 그림의 가치가 이제 더이상 영웅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을 표상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을 낳았다. 사피로 (Meyer Schapiro)가 말했던 것처럼 미적인 것의 자율성과 절대성이 추상미술을 통해 비로 소 순수한 객관성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바(Alfred Barr)는 구상미술과 추상미술 의 논리적 대림을 부각시키며 재현은사물의 수동적 반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예술적인 반면 추상미술은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자체의 영원한 법칙에 바탕을 둔 순수한 미적 행위란 가정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재현이 세계의 표현에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비예술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편견이며 또한 추상만이 순수한 미적 절대성에 도 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가정 역시 아씬 질을 가늠하는 척도로서는 부족하다.

재현이든 추상이든 다같이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가능한 방범들로서 문제는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 진정성(authenticity)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을 대했을 때의 충격, 무게감, 생각하게 만드는 여유, 자기신념에의 충실, 새로운 세계의 발견 재료사용 및 표현에 있어서 방법적 혁신 등은 예술의 생명력을 지탱시켜주는 요소임과 아울러 예술가들에게 부여된 동기가 구체적으로 구현되었을 매 제공받을 수 있는 미적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또 하나의 전환기에 예술이란 행위가 정말 가치 있는 활동인가를 되짚어 본다는 행위는 미래의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전망하는데 필요한 과정이자 사회환경과 제도에 의해 무력해진 예술의 현재 위치를 반성하고 새로운 갱신의 기틀을 마련 하기 위해서라도 깊이 생각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질량감이란 주제가 가장 특수한 언어 인 미술이 보편적인 언어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도록 촉매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후기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해체란 하나의 위기적 징후를 바라보며 예술의 의미 를 반성해본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소 보수적인 개념에 기초한 것이 지만 질·량·감에 대한 이 초보적인 논의가 사회변화와 제도의 매카니즘에 굴복하지 않고 진 지하게 자기세계를 일궈가고 있는 작가들에게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