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드로잉의 의미
1. 서구적 의미
‘draw’의 사전적 정의는 ‘그리다’ ‘얻다’ ‘∼의 정수를 뽑아내다’ 등으로서 펜이나 연필, 목탄, 크레용 등에 의해 선을 위주로 하여 그리는 행위로 이해되기는 하나, 최근에는 어떠한 회화적 장르와도 구별하기 힘든 넓은 영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드로잉은 그림 그 자체로서의 역할, 더 나아가 하나의 미술작품 자체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3)
드로잉의 의미는 큰 변화를 보여왔다.
가장 중요한 변화로는 드로잉이 하나의 독자적인 미술형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고, 다음으로는 콜라쥬, 오브제 등을 수용하면서 혼합된 매체의 사용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에 따라서는 아직도 준비작업으로나 아이디어 탐구를 위해 드로잉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한 전혀 드로잉을 하지 않고 작업하는 미술가들도 있지만 아주 정교한 드로잉을 하는 작가들이나 회화, 판화, 사진과 혼합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4)
그러면, 드로잉의 주요 특징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첫째, 의도와 발상이다.
드로잉을 소묘 혹은 밑그림으로 생각하는 것은 발상 그 자체를 고착시켰다는 의미를 배제하고 결과물로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의도와 발상은 현대 드로잉에서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둘째, 직접성이다.
인간의 신체 자체가 육필로서 사용되어 인간의 힘이 붓을 통해 그 움직임이 전달된다. 드로잉은 신선도와 생생함이 생명이므로 다른 요소들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하여 즉각적인 정착이 필요하다.
세째, 과정이다.
작품의 완결성보다는 개인의 잠재의식을 정착시키는 과정이 중요시된다. 잠재의식을 끄집어 내고 신체를 통하여 작품으로 옮길 때 어떤 시점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옮기느냐 하는 시간성이 중요하다.
네째, 열려있는 상태이다.
작품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더 이상 수정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수정 보완이 가능한 열려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드로잉은 여러 가지 형식적인 면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미술계라는 사회적 통념상의 제도하에서 인정한 회화작품은 페인팅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드로잉의 개념을 확대 해석할 때는 모든 미술전반에 걸쳐있는 장르나 기법보다 앞선 발상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회화 전반에 걸쳐있는 여러 가지 작품 형태들이 드로잉이 될 수 있다.5)
이러한 현상 때문에 더 이상 드로잉과 회화의 차이를 완성도의 차이로 정의 내릴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는 오히려 회화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단 회화 뿐 아니라 모든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독립성이 무너지면서 혼합된 형태가 등장하고 있고 모든 매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6)
2. 동양화에서의 드로잉
동양화에서는 드로잉과 페인팅을 구별해서 지칭하는 용어가 부재하다. 동양화는 서양의 경우처럼 색채와 표면질감, 입체감 등을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선으로 작가의 아이디어를 대상의 형체로 바로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단계로서의 드로잉과 완성작품으로서 페인팅의 이분법적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그림(수묵화)’과 서양의 ‘드로잉’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생긴 사상과 감정을 주로 선에 의해서 이미지화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방법과 양상에 있어서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지만 선은 양자의 회화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중요시된다.
동양의 회화가 선의 예술이 된 특징 중 하나는 지필묵이라는 도구에 기인한다. 우선 붓의 털은 뾰족해서 선을 긋기에 적당하며 자유자재로 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먹은 단색이나 풍부한 변화가 가능하며 한지는 서양의 재료와는 달리 질료를 얹는 바탕이 아니라 먹을 흡수함으로써 하나의 정서적인 체계로 작용한다.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지필묵이라는 도구는 글씨와 그림에 동시에 사용된다. 글씨는 원래의 목적이 전달수단에 의한 표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필묵이란 매재를 사용하면서 점차 표기의 기능을 벗어나 글씨 자체의 고유한 미적구조를 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7) 앞서 ‘draw’의 개념을 ‘∼의 정수를 뽑아내다’로 규정하였는데 이를 동양의 서예기법에 적용하면 붓을 잡고 한번에 거리낌없이 써 내려간다는 행위와 통한다. 이것은 내면의 직접적인 표출을 의미한다.8)
서예와 회화가 그 출발에 있어 같은 범주에 있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른 것과는 달리 서예와 회화의 동체설을 아직도 진하게 보유하고 있는 장르가 다름아닌 문인화라고 할 수 있다. 문인화에서 주로 ‘그린다’라는 드로잉적 충동이 가장 잘 나타난다.
여기서의 문인화란 단순한 화목(畵目)으로서의 의미에서보다 항시 일격(逸格)의 방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군자와 같은 내용의 그림으로써 문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필만이 구사할 수 있는 드로잉적 충동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문인화란 이같은 드로잉적 충동을 가장 표면적으로 대표해 주는 양식이다. 오늘날 문인화를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 양식으로의 복귀를 위함이 아니라 문인화 속에 잠재된 우리의 근원적 의식-선묘위주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9)
---------------------------------------------------------------------------------------------------
3) 권여현, 『드로잉의 세계』, 도서출판 재원, 1999, p.30.
4) 서울여대 조형연구소 공편, 『드로잉』, 시공사, 2001, pp.20-21.
5) 권여현, 앞의 책, p.15.
6) 서울여대 조형연구소 공편, 앞의 책, pp.20-21.
7)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의 미의식』, 도서출판 재원, 1995, p.177.
8) 권여현, 앞의 책, p.31.
9) 오광수, 앞의 책, p.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