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2003년 드로잉전을 기획하며
이번 전시는 50대에서 70대의 원로작가들 중에서 드로잉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신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완숙한 자기세계로 천착해 들어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근원적인 발상과 행위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전시구성은 수묵의 드로잉, 연필 및 기타 드로잉으로 분류되며 이 글에선 분류기준에 따른 대표적인 작가들만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작가들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도록 하자.
1. 수묵의 드로잉
수묵의 드로잉에서는 수묵이라는 전통적 재료가 현대에서는 어떻게 수용되고 새로움을 모색하고 있는 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수묵의 드로잉은 문인화적 세계표현, 지필묵의 물성, 필선미, 제스춰적, 낙서화로 다시 분류된다.
문인화적인 세계를 표현한 작가로는 서세옥, 송영방 등을 들 수가 있다.
문인화는 원래 사실묘사보다는 의취를 나타낸 그림으로 작가의 의도적인 정신성을 담기 위해 간결하고 여유있게 표현된다. 서세옥(도판1)은 간결한 묵선을 이용해 대상의 본질적인 특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직관에 기초한 문인화의 전통과 맥을 함께 한다. 담묵과 농묵으로 된 선은 리듬감을 느끼게 하고 간결화된 선은 거의 추상화되는 조형감각을 느끼게 한다.
송영방(도판2)은 민화적인 소재의 새로운 해석이나 대상을 변형 요약해가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슬쩍 물에 적셔 표현한 물기 많은 먹색과 여백의 넉넉함은 바로 문인화가 지향하는 격조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지필묵의 물성(物性)을 탐구한 작가로는 송수남을 들 수 있다. 송수남(도판3)은 모필과 한지, 먹이 가지는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먹의 번짐, 여백의 강조, 번지고 스며드는 한지의 기본적 성질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극도로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정신적 풍요함을 느끼게 한다.
필선미를 추구한 작가로는 이철량을 들 수 있다. 이철량(도판4)이 추구한 세계는 전통수묵의 필법을 통한 다양한 변화이다. 경쾌한 필세는 마치 글씨를 써 내려가는 듯한 리듬과 일치한다. 이러한 운필의 자유로운 구성은 자동기술적이며 풍부한 변화를 보여준다.
제스춰적인 경향으로 김춘옥과 김호득을 들 수 있다. 김춘옥(도판5)의 작품은 추상적이며 또한 구상적이다. 경쾌한 운필과 수묵의 은은한 표현과 속도있게 가해지는 필선 그리고 우연적으로 떨어진 얼룩의 점들은 생명력있는 자연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김호득(도판6)의 작품은 붓질과 손의 제스춰,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먹의 흔적들이 반복된 행위 속에서 나타난다. 작가의 신체적 개입에 의해 직접성이 드러나 보이는 작업이다.
낙서화로는 심재영(도판7)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모든 행위의 기본인 긋기를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낙서화를 연상시키는데 칠하고 지우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해서 수묵과 호분, 치자물감으로 이루어진 갈색톤의 화면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탄생한다.
2. 연필 및 기타 드로잉
서양의 재료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우리 회화의 미의식에 바탕을 두고 선, 색 그리고 지필묵 등에 구조적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실험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이들은 문인화적이기도 하고 또한 서체를 작품에 도입하기도 하는 등 물질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린다’는 드로잉적인 충동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노크롬 경향이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경향에서나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가 있다.
연필 및 기타 드로잉은 제스춰적 경향, 서체적, 모노크롬적, 표현주의적, 콜라쥬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제스쳐적인 경향의 작가로는 윤명로, 이건용, 형진식, 이봉열, 강하진 등을 들 수가 있다.
윤명로(도판8)의 작품은 그린다는 행위가 뚜렷하다. 물을 많이 머금은 빠른 붓터치는 서양적이라기 보다는 동양적인 산수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에서는 형식을 떠난 자유로움을 느낄 수가 있다.
이건용(도판9)은 드로잉을 가장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작가이다. 그는 그리기를 소묘와 드로잉으로 구분하고 드로잉이란 우리의 활동이 사물에 부딪쳐 사물로부터 충격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팔을 뻗어 사물과의 관계에서 오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러한 신체의 표현이 바로 드로잉이 되는 것이다. 형진식(도판10)은 긋기만을 줄기차게 해 온 작가이다. 긋는다는 행위성으로 드로잉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미지의 추상적 표현이나 조형적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뻗친 선들은 속도가 있고 색이 있으며 공간이 느껴진다. 이봉열의 작품에서는 반복적인 선들과 면으로 대조를 이루는 이분화된 화면구조를 보여준다. 무채색을 띄고 있는 화면은 건조하고 무표정하기 쉬운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연관관계에 의해 풍요로운 회화가 탄생하고 있다.
강하진은 구겨진 천 위에 먹을 바르는 작업을 한다. 구겨지거나 접혀진 천의 리듬을 타고 먹을 바르면 작가의 의지와 천의 리듬이 서로 동화되며, 천과 작가와의 관계 안에서 작품의 결과가 이루어진다.
서체적인 작품으로 오수환(도판11)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선과 면이라는 이질적인 조형요소가 병치되어 있다. 서예를 연상시키는 굵은 획이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배경을 이루는 화면의 반은 전통 단청색인 초록, 검정, 주황 등의 색면으로 처리되어 이질적인 요소들간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노크롬회화로는 최명영, 김형대, 이정지 등을 들 수 있다. 최명영(도판12)은 회화의 평면성을 가능한 한 침범하지 않는 최소한의 색, 선, 형태를 사용한다. 캔버스의 크기와 형태는 신체 행동 반경의 한계와 연관되어 선자리에서 팔을 뻗어 화면의 상하좌우를 운동할 수 있는 정도이다.
색은 중성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의 평면구조를 마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형대는 색층을 만들어놓고는 안료가 채 마르기 전에 일정한 빗질을 가해서 섬세하면서도 일률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빗질은 횡, 종 한 방향으로 통일되기도 하고 마치 직조와 같이 두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마치 빛의 여운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정지(도판13)는 물감을 화면 위에 로울러로 여러겹 덮어가면서 회화가 평면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화면이 마르기 전에 나이프로 벗겨내고 다시 덮고 벗겨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 캔버스는 행위에 의해 운율적이며 생동하는 공간이 된다
표현주의적인 성향의 작가들로 이두식, 이강소, 최경한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표현적인 붓질, 번지기, 뿌리기, 얼룩 등을 통해 깊이있는 구성을 시도하는 작가들이다. 이두식(도판14)의 작품은 우연적인 붓놀림으로 묘사된 듯하다. 그의 작품에는 생명의 절정을 상징하는 꽃과 생명체 등 기호화된 여러 형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린다는 충동에 의해 제작된 작품은 강한 드로잉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강소의 붓질은 안개 자욱한 회색톤에 오리와 배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비워있으나 꽉차 보이는 그의 작품은 즉흥성과 속도감에 의해 이미지가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최경한의 작품은 어두운 무채색의 색조에 점들이 떠다닌다. 이것은 생동적이고 즉흥적인 표현감정에 의해 나타난 것들로 자연적인 현상의 생성감을 나타내고 있다.
콜라쥬 작업으로는 이수재(도판15)를 들 수 있다. 이수재는 건조된 꽃잎, 나뭇잎 등을 자연을 상징하는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작품의 요소가 된 자연의 색과 향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조된다. 말려서 바랜 색들은 오히려 영속적으로 보여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이렇게 이수재는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섬세하고 미묘한 색조와 풍부한 여백으로 서정적 회화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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