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Ⅲ. 드로잉 개념의 흐름
드로잉의 개념은 오랜 역사를 거쳐 한편으론 지성적이고 관념적으로, 또 한편으론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과정을 거쳐왔다. 이러한 드로잉은 시대에 따른 방법상의 경향성은 존재하지만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 없이 진행되어 왔다.
현대적 드로잉이란 이 두 부분을 모두 포괄한다. 즉 의도성이라는 지성적 부분과 우연성이라는 감성적 부분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대와 역사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던 드로잉 개념의 흐름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오래된 드로잉은 고대의 흔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암벽에 윤곽선으로 소나 해를 묘사했던 것이 다름아닌 드로잉이었다. 소를 그려 사냥의 성공을, 해를 그려 풍작을 염원하는 주술적인 의도로 그림이 그려졌다. 이것은 지극히 관념적인 차원에서 그려진 것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감수성의 표출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16세기인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 데생(Dessin)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10)
이 용어는 습작, 밑그림, 초벌그림의 의미로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밑그림에 나타나는 ‘윤곽선’이란 것은 해부학적인 조형연습을 위해 인간의 지각으로 형성된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다. 이러한 드로잉의 의미는 회화작품의 절대적 완결성이라고 하는 전통이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띄기에 이른다.
이후 19세기인 인상주의 시기에 오면 회화는 완성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개념에 변화가 생긴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순간적으로 화면에 표현하여 자유로운 붓터치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흔히 인상파의 작품을 두고 스케치풍의 그림이라고 헐뜯는 것도 이 같은 사실 때문이다.
순간의 필치를 화면에 남긴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드로잉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시각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라는 드로잉의 주된 기능은 점차 감소하게 되었으나 드로잉의 역할은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20세기 전반에 드로잉의 개념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콜라주기법이었다.
1912년에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시도되어 ‘가위로 그리는 드로잉’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던 이 기법은 신문이나 벽지 등의 종이들을 잘라내어 그 종이조각이나 형태를 캔버스 위에 병치시켜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입체파 작가들은 각종 콜라쥬의 방식으로부터 오브제의 수용에까지 표현영역을 확산시켜 정신세계의 내면적 드로잉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면서 드로잉이 갖는 묘사적 기술의 중요성은 더욱 감소하게 되었다.11) 이후 1920년대 초현실주의에서는 자동기술법에 의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주창한 자동기술법은 무념(無念)의 상태에서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무의식의 형상화 작업을 의미했다.
이 때의 드로잉은 개인적이고 자기 고백적이라는 개념을 극대화시켰는데 이렇게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선들은 묘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거의 자율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에 와서는 물감을 뿌리거나 붓을 휘두르는 식의 표현이 화면에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표현의 직접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하나의 스케치이지 완성된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완성된 작품으로 이끌어가려는 모든 노력과 생각이 통합되어 작품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완성된 회화와 드로잉은 같은 상태가 될 것이고, 드로잉은 회화의 방식을 취하는 하나의 과정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서의 작품이란 것이다.12)
추상표현주의 세대 이후에도 ‘그린다’는 개념에 대한 사유는 계속된다. 1960년대 미니멀리즘에서는 작품의 ‘내용’을 최소화하는 것과 ‘예술작업’을 최소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제작을 외부에 맡겼다.
그리고 1970년대 개념미술에 와서는 물리적인 대상보다는 아이디어를 강조하여 미술가의 사고는 회화나 조각과 같이 구체화된 대상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가장 개인적인 매체이고 개성의 표현으로 생각되어온 드로잉의 개인적 터치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드로잉에 대한 개념적 사유는 현대미술 속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 드로잉의 개념은 변천되어왔던 두 개념, 즉 화가의 사고가 투영된 가장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매체로서 회화, 조각, 건축의 밑그림 역할을 한다는 개념과, 작가의 아이디어가 직접적이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가장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매체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13)
---------------------------------------------------------------------------------------------------
10) 권여현, 앞의 책, p.23.
11) 권여현, 앞의 책, p.26.
12) 이일, 좥드로잉에 대하여좦,『한국판화·드로잉대전』, 고려서적주식회사, 1980, p.42.
13) 서울여대 조형연구소 공편, 앞의 책, pp.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