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머리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불리는 1980년대에 순수예술은 미디어 문화와의 접촉빈도가 무척 잦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전통적인 예술매체인 문학이나 과거의 미술보다도 우리 주변을 항상 둘러싸고 있는 텔레비전, 영화, 광고 등의 대중매체가 미술가들의 1차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시대에 이르렀던 것이다.
각종 미디어들로 가득 차 어쩌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세상 속에 태어난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고급문화인 예술과 대중문화인 미디어 산업의 이분법적 구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원천으로부터 영향을 차등 없이 받아들이고 표현한다.
로버트 롱고(Robert Longo, 1953- )는 1980년대 미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화가, 조각가로서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하였고, 뮤직비디오와 영화의 감독으로서도 활약하였다. 경계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다양한 방면을 넘나드는 활동을 통해 고급문화와 미디어 문화, 미술과 문화산업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현대미술의 한 국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 미디어 문화를 차용하고 다시 미디어 문화가 예술을 차용하는 순환현상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아주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롱고의 작품세계 속에서 이러한 순환현상의 축도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예술계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산업계에 진출하여 문화산업의 생산자로서도 활동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롱고의 작품세계는 우리 시대의 시각문화가 보여주는 이런 상황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실재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구성된 현실, 즉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의 실재를 뒤덮고 대체해버리게 된 현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우리가 ‘하이퍼리얼리티’를 통해 현실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매체는 다름 아닌 텔레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드리야르는 텔레비전을 통해 현실이 구성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생활 속에 텔레비전의 용해와 텔레비전 속에 생활의 용해-분리해 낼 수 없는 화학적 용해”1)라고 일컬었다. 롱고가 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제작한 이른바 ‘컴바인’작품들과 뮤직비디오들은 바로 이러한 비전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하기에 이른 세계, 즉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롱고는 차용의 방법을 사용하여 미디어 문화의 이미지들을 취하고 다시 새로운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시각이미지들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재창조하였다.
이런 차용과 재조합의 방법론, 그리고 미디어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다시 미디어에 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만드는 전략은 많은 부분 1980년대 초반의 뉴욕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던 펑크문화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롱고는 펑크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펑크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고 뮤직비디오나 영화를 통해 록 음악인들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텔레비전 문화의 핵심부에서 활동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는 순수예술가로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문화산업계에서도 활약을 하여, 영화, 텔레비전 영화, 뮤직비디오 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특히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의 활동은 매우 독특한 이력이다.
뮤직비디오 연출을 통해 음악계의 인사와 유대관계를 쌓아나간 그는 1986년에 만나게 된 알이엠(R.E.M.)의 리더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와 뮤직비디오 작업을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어리나 브레인즈(Arena Brains, 1987)>에서도 같이 일하였다. 영화 <코드명 J(Johnny Mnemonic, 1995)>에서는 롤린즈 밴드(Rollins Band)의 리더 헨리 롤린즈(Henry Rollins)나 과격한 랩음악을 선보이는 흑인 랩퍼 아이스 티(Ice T)같은 음악인들과 작업하며 흥미로운 유대관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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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ean Baudrillard, “The Precession of Simulacra,”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Brian Wallis ed. (New York: The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1984),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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