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컴바인
80년대 중반기 롱고의 작업을 특징짓는 작품들은 롱고가 스스로 ‘컴바인’이라고 부르는 류의 것들로서, 각기 다른 평면 및 입체 이미지들 몇 개가 병렬되고 겹쳐지면서 구성되는 작품들이다. ‘컴바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들은 로버트 라쉔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향하고 있는 것들이다.(도판1,2,3,4,5)
또한 이 작품들은 이미지들의 병치로 구성되면서 그 병치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효과의 큰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Sergei Eisenstein)이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방법론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롱고 작품들의 구성은 “점프 컷(장 뤽 고다르의 특징적 기법)과 몽타주(에이젠쉬쩨인의 특징적 기법)의 결혼”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2)
장 뤽 고다르의 ‘점프 컷’이 영화매체의 표면과 결을 그대로 거칠게 노출시킴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매체의 허구성을 깨닫게 하고 영화를 영화로 받아들이며 현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만들려 하듯, 롱고가 보여주는 이미지 병치는 서로 다른 시각적 언어를 병치시켜 충돌시킴으로써 시각언어가 가진 관습이 문화적 구축물임을 폭로하게 된다.
뉴욕에 있는 롱고의 스튜디오에는 4개의 텔레비전이 있고 그것들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데, 그의 작업장에는 두 개의 작은 창 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텔레비전 세트가 세상을 보는 창과 같다.3) 이 세트들 속에서는 콘 프레이크 광고가 계속되는 동안 옆에서 거리의 살인이 난무하고, 시츄에이션 코미디가 진행되는 옆에 테러리즘의 생생한 현장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롱고의 말을 빌자면 “문화적 활력의 용광로(the plasma of the culture’s vitality)”이다.4)
80년대 전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재즈의 대가(Master Jazz)>(도판3), <스틸(Still)>(도판4), <빛을 위한 움직임(Rock for Light)>(도판5), <죽음과 세금(Death and Taxes)>(도판10)등의 소위 ‘컴바인’작품들은 텔레비전 문화 속에서 이러한 동떨어진 이미지들의 난데없는 공존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내용적으로 별 관련이 없는 시각 이미지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혼합하여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방법론은 동세대 작가 데이빗 샐리(David Salle, 1952- )의 작업경향과도 비슷하다.(도판6) 두 사람은 공히 베이비 붐 이후 세대로서 영화에 대한 관심과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롱고는 1976년 당시 대안 공간 ‘아티스트 스페이스(Artists Space)’의 관장이었던 헬렌 와이너(Helen Winer)를 통해 데이빗 샐리와의 만남을 가졌고, 이후 1977년 무렵에는 데이빗 샐리 뿐만 아니라 비판이론가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작가 토마스 로슨(Thomas Lawson, 1951- ) 같은 이들과 근거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즈음에 샐리가 참여하는 그룹전을 기획하기도 하였다.5) 같은 세대로서 비슷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데다가 이러한 교류관계를 통해서 샐리와 롱고는 서로의 작품세계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1933- )는 팝 아트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콜라주식 구성을 적용, 미국적 소비자 천국의 모습을 과장돼 보일만큼 깔끔하게 디자인되고 잘 포장된 혼돈의 이미지로 표현해 내었다.6)(도판7)
미술사적 관점에서 볼 때 데이빗 샐리나 롱고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구성의 양식은 또 한편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콜라주식 구성을 그 선행양식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7) 그래서 작가 겸 비평가 데이빗 로빈스(David Robbins)는 롱고의 작품을 “로젠퀴스트식 빌보드-콜라주의 입체화”라 표현하기도 한다.8)
연관성 없는 이미지들의 병치로 이루어진 롱고의 컴바인 작품들은 텔레비전의 분열증적 불연속성에 대한 모조행위라 할 수 있다.9) 또한 채널을 마구 돌리는 짧은 순간들 동안 명멸하는, 서로 무관하면서도 시공간적으로 인접하는 이미지들의 응결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10)
이 작품들 앞에 선 관람자들은 소위 “다중적 네트워크의 단말기”11)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작품을 통해 롱고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 의식의 어떤 층위든 가리지 않고 파고드는 이미지와 정보를 단속적으로 폭발시킴으로써, 우리가 지금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복제한다.12)
이와 같이 그가 소위 “몽환적 키치(Dream kitch)”들을 조각내어 묘파하고 있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적인 세계이다.13)할 포스터(Hal Foster)는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원용하면서 롱고가 8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렇듯 “스펙터클이 내파”하기 시작한 세상임을 지적한다.14) 이러한 세상은 모든 것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가혹하고 가차 없는 불빛에 노출되어 버리는 외설성/지나친 드러냄의 세계다.15)
즉, “매트릭스가 삶을 대체”하고 “혼돈상태가 신이 된” 세계, “카피의 카피의 카피의 카피의 카피가 내용이 되면서 역사는 죽어버린” 세계, “핵폭탄처럼 폭발하는 거짓말의 전장”이다.16) 그렇기에 롱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전날 나는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보그』지가 펼쳐져 놓여 있었고 『뉴스위크』지는 내 왼쪽에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또 몇 장의 폴라로이드를 보면서 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완전히 ‘재현’의 세계 속에서 산다는 걸 깨닫는다... 내 현실감각은 바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현실 속에 있을 시간이 없다.”17)
롱고는 여러 가지 매체를 혼합하여 제작한 이런 유형의 작품들을 영화를 위한 스토리보드처럼 읽혀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 스토리보드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작가 스스로가 지적하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갈 수도,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갈 수도 있다.
어느 방향에서 시작하여 어느 방향으로 읽어나가도 상관없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이 끝없이 순환하는 이미지의 연속적인 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속에서는 어떤 이미지도 다른 이미지의 우위에 있지 못하며, 어떤 의미도 다른 의미의 우위에 놓이거나 초월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이미지들은 단지 다른 어딘가에서 나타났던 이미지들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을 뿐이므로 그들로 구성된 결과물은 ‘작품’보다는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그 흐름을 따라 의미와 욕망이 꼬리를 물고 달리는 기표의 연쇄인 이 텍스트의 바탕에는 실재세계의 기원이 아니라 또 다른 ‘그림(picture)’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18) 그리고 이 속에서 원작/원본은 항상 연기된다.19)
우리는 흔히 구상적 이미지들을 퇴행적인 것으로, 추상적 이미지를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에 익숙해 있으나 이들 작품 속에서는 그런 선후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며, 구상적 이미지들과 추상적 이미지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 자체를 위협하는 모조행위 속에서 “모델들의 궤도적인 순환과 차이들의 허구적인 생산만을 가능하게 하는”20), “대기도 없는 하이퍼스페이스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21)로서의 ‘하이퍼리얼리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컴바인 작품들은 공적인 공간 등 좀더 보편적인 지시내용을 가지는 시각이미지들과 작가 개인에게 더 큰 의미를 갖는 사적인 시각기호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성물에 드러나는 이미지들 사이의 충돌양상은 “사회적 메타포와 개인적 상징” 사이의 갈등을 드러냄으로써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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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nthony Leo Bannon, “Robert Longo: A Practice of Art,” Ph.D. dissertati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1996, p.88.
3) Paul Gardner, “Longo: Making Art for Brave Eyes,” Artnews (May., 1985), p.65.
4) Howard N. Fox, “In Civil War,” Robert Longo, Howard N. Fox et al. (Los Angeles, California: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 New York: Rizzoli, 1989), pp.31-32.
5) Howard N. Fox et al., 위의 책, p.173.
6) Carter Ratcliff, Robert Longo (New York: Rizzoli, 1985), p.23.
7) Donald Bacigalupi, “Pretty Vacant: Neo-Expressionist Painting, Situationist Theory and Punk Rock,” Ph.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1993, 132 그리고 Timothy W. Luke, Shows of Force: Power, Politics and Ideology in Art Exhibition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2), p.206.
8) David Robbins, “ABC TV,” Artforum (Oct., 1999), p.160.
9) Howard N. Fox, 앞의 글, p.31.
10) Timothy W. Luke, 앞의 책, p.203.
11) Jean Baudrillard, “The Ecstasy of Communication,” The Anti-Aesthetic: Essays on Postmodern Culture, Hal Foster ed. (Seattle, Washington: Bay Press, 1983), p.128.
12) Howard N. Fox, 앞의 글, p.31.
13) 따옴표 속의 두 문구는 Hal Foster, “Atrocity Exhibition,” Howard N. Fox et al., 앞의 책, 57과 60에서 인용했다. “몽환적 키치”라는 용어는 원래 발터 벤야민이 사용한 말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미디어 문화 속의 관습적 이미지들이, 즉 그린버그에 있어서 키치로 간주되는 그러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이미지들을 쏘아 보내는 것에 대비하여 롱고의 이미지들은 분열적인 외양의 하이퍼리얼리티가 끊임없이 내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쓴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14) 위의 글, p.59.
15) Jean Baudrillard, “The Ecstasy of Communication,” Hal Foster ed., 앞의 책, p.130.
16) 실재는 사라지고, 모조품들만이 끊임없이 자전하는 세계에 대한 보드리야르적인 전망들을 반향하는 듯한 이상의 인용문은 롱고의 퍼포먼스 작품 에 나오는 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Howard N. Fox et al., 앞의 책, p.162 참조.
17) Anthony Leo Bannon, 앞의 논문, p.106.
18) Douglas Crimp, “Pictures,” Brian Wallis ed., 앞의 책, p.186.
19) Douglas Crimp, On the Museum's Ruins (Cambridge촵London: The MIT Press, 1993), p.118.
20) Jean Baudrillard, “The Precession of Simulacra,” Brian Wallis ed., 앞의 책, p.254.
21) 위의 글.
22) Anthony Leo Bannon, 앞의 논문,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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