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Ⅲ. 뮤직비디오
롱고의 컴바인 작품들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텔레비전을 통해 드러나는 현대문화의 어떤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렇듯 작품을 통해 텔레비전 문화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텔레비전 중의 텔레비전이자, 텔레비전 문화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다 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 방영 채널 MTV를 위해서도 작업을 하게 된다.
롱고는 1979년 2월 머드 클럽에서 열린 라이즈 채덤(Rhys Chatham)의 기타 트리오 퍼포먼스를 위해 <음악을 위한 그림들(Pictures for Music)>이란 제목의 18분짜리 슬라이드 쇼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원시적인 형태의 뮤직비디오였다고 할 수 있다.23) 또한 앞서 살펴본 컴바인 작품들의 각 화면들을 찍어 빠르게 편집한다면 뮤직비디오들과 거의 유사한 결과물을 보여주리라고 생각된다.
할 포스터는 롱고가 영화 <어리나 브레인즈>나 뮤직비디오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한 것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라 하면서, 이제 롱고의 예술은 정신분열증적 외설성과 유토피아적 희망 사이의 전장에 자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24)
앤 카플란(Ann Kaplan)은 역시 “텔레비전이 이 시대의 궁극적이고 완벽한 대상이므로 텔레비전 이미지와 함께 우리 자신의 몸과 우릴 둘러싼 모든 우주가 하나의 컨트롤 스크린이 되”는 “차가운 우주”에 관한 보드리야르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MTV가 바로 이러한 “차가운 우주”와 그 이전의 “뜨거운 우주” 사이의 이행기에 놓여 있고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 단계를 예견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25)
카플란이 MTV를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 단계로 들어서기 직전의 과도기에 놓여 있는 매체로 본 것은 뮤직비디오들 중에 아직도 오이디푸스적인 과정에 의존하는 고전적 내러티브를 채택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롱고의 뮤직비디오들은 음악 생산의 주체인 밴드의 공연 모습이 비디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최소화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탈중심화된 양상을 드러내고 있어, 여타 뮤직비디오들에 비해 더욱 포스트모던하고 더욱 보드리야르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한창 제작하던 80년대 중후반에는 예술계에서보다 케이블 방송채널에서 롱고의 작품을 볼 기회가 더 많았다고 언급되기도 할 정도로 작품 활동은 상대적으로 위축된다.26) 또한 감독으로서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구상적 요소와 추상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던 작품에서 구상적 요소가 빠지고 추상적 요소만 남게 된 듯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경향을 보여준다.27)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비디오로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생각되는데, 롱고의 뮤직비디오는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가 보여주던 컴바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놓여진다고 할 수 있다.
뉴 오더(New Order)의 뮤직비디오 <괴상한 삼각관계(Bizarre Love Triangle)>에는 나란히 늘어선 4개의 패널로 구성된 부분이 있고(도판8), 헬멧(Helmet)의 <그것을 주어라(Give It)> 비디오에는 비슷하게 3개의 패널로 구성된 부분이 등장한다.(도판9) 이는 앞서 본 <재즈의 대가>(도판3)나 <스틸>(도판4)과도 같은 화면 병치이다.
이들 뮤직비디오에서는 하나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마치 여러 대의 텔레비전을 동시에 보고 있는 듯한 효과, 혹은 리모컨을 통해 채널을 마구 돌리고 있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관람자들을 커뮤니케이션의 현란한 황홀경을 모조해보고 있는 듯한 상황 속으로 빠뜨려 놓는다.
특히 헬멧의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도판11)은 컴바인 <죽음과 세금>(도판10)의 화면구성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작가가 문화산업의 산물을 제작하는데 있어서도 예술을 대할 때와 별다르지 않은 자세로 임하는 것, 혹은 상업문화 생산자의 역할을 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예술계의 성과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롱고가 연출한 뮤직비디오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그의 미술작품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도시인> 연작에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마치 레디메이드인 것처럼-사실상 레디메이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차용하듯이 자신이 연출한 <보이(고)> 속 장면의 스틸 사진(도판12, 14)을 차용하여 컴바인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도판13, 15)
뮤직비디오 감독 롱고는 수많은 원천 중에서 작가 롱고의 작품을 선택하고, 다시 작가 롱고는 뮤직비디오 감독 롱고의 영상이미지 속에서 참조원을 뽑아낸다. 이렇게 한 인물 안에서, 문화산업과 순수미술이 서로를 활용하는 현대 시각문화의 상황이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롱고가 1987년에 연출하고 공연한 퍼포먼스 <천사 죽이기(Killing Angels)>의 1부 <대리석 안개(Marble Fog)>의 배경(도판16)이나 작품 <어리나 브레인즈>(도판17)에 등장하는 입술이미지는 <괴상한 삼각관계>나 메가데스(Megadeth)의 <평화를 파네(Peace Sells)> 비디오에서도 볼 수 있으며,(도판18) 특히 <천사 죽이기: 대리석 안개>의 배경은 <코드명 J>의 한 장면(도판19)과 유사하다.
이들 입술이미지는 따로 떨어져 떠 있거나 위쪽의 낯선 이미지와 결합하여 매우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서, 만 레이(Man Ray, 1890-1976)의 사진을 연상시킨다.(도판20) 이 사진은 만 레이 자신의 회화작품인 <기상관측 시간-연인들(A l'Heure de l'Observatoire, les Amoureux)>(도판21)을 배경으로 가운을 입은 모델로 하여금 포즈를 취하게 하고 찍은 사진으로서 『하퍼스 바자』지 1936년 11월호에 실린 사진이다.
잡지사진을 위해서 자신의 작품을 인용한 만 레이처럼, 롱고 역시 예술작품과 문화산업의 생산물을 넘나들며 순수미술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육질의 남성 이미지는 롱고가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돼지의 검(Sword of the Pig)>(도판25)이나 <친구들(Friends)>등에 나타나는데 헬멧의 <그것을 주어라> 비디오에서도 사용되었다. 그 밖에 불, 눈동자, 꽃, (군대라는 제도가 행하는 폭력의 이미지로서) 전쟁, (전쟁터의, 혹은 고대 유적의) 폐허의 이미지들 역시 여러 매체를 갈아타며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다.
“추락하는 인간(Falling Men)”28) 시리즈로 불리기도 하는 <도시인> 연작의 “추락천사(fallen angels/doomed souls)”29)는 <괴상한 삼각관계>의 후렴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도판22) 그리고 특정한 건물의 외양이든 다소 추상화되고 일반적인 모습을 띠게 된 형태이든 거대한 빌딩의 이미지는 롱고가 꾸준히 천착해 온 것인데 특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재즈의 대가>(도판3)와 같은 작품 속에서, 영화 <어리나 브레인즈>에서, <그것을 주어라> 비디오에서 나타나는 등 매우 자주 이용된다.30)(도판9)
그의 뮤직비디오에는 색필터를 써서 찍은 듯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강한 사랑(Strong in Love)>(도판23)이나 <돼지의 검>(도판25), <스틸>(도판4) 등을 위시한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이와 같은 색조를 띤 화면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화면들은 길버트 앤드 조지(Gilbert & George, 1943- & 1942-)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도판26)
한편 이들 뮤직비디오가 일반적인 여타 뮤직비디오와 다른 점들 중 하나가 화면 분할의 독특한 사용인데, 뉴 오더나 헬멧의 비디오에서 보이는 상하 분할(도판27)은 위아래 두 개의 화면으로 이루어진 <압박(Pressure)>(도28)이나 <차가운 천국(Cold Heaven)>, <보디 오브 어 코믹(Body of a Comic)>(도판29), <어리나 브레인즈>(도판17) 등의 작품을 이루는 이미지 조합의 구성원리와 통한다.31) 그리고 헬멧의 비디오에서 보이는 화면 분할은 제임스 로젠퀴스트나 길버트 앤드 조지의 양식을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도판30, 31, 32)
전자수첩과 컴퓨터가 머리를 대신하고, 핸드폰이 귀와 입을 대신하고, 텔레비전이 눈을 대신해가는 오늘날의 세상 속에서,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우리 삶의 가장 친근한 과정들은 실질적으로 미디어의 자양분이 되어버렸다.32)
몰래 카메라가 횡행하는 현실이 원색적으로 보여주듯, 현대인에게 내밀한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기계들(Machines in Love)>(도판15)에서, 내밀한 감정의 영역조차도 사회의 메카니즘 혹은 현대문화의 상징물에 의해 잠식당할 수밖에 없고, 문자 그대로 ‘관통’당한다.
<괴상한 삼각관계> 비디오가 다루고 있는 주제도 이런 것이다. 사적인 영역과 로맨스를 위한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과도한 움직임이 넘치는 도시의 공적인 영토가 가하는 위협 속에서 현대인은 불안한 듯 인형을 안고 뛰는 모습으로 이 비디오에 등장한 소녀와도 같다.
대량생산된 상품의 포장지처럼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을 한 일종의 제복을 착용한 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중력-사회/문화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공깃돌처럼 튕겨진다.33) (도판22) 사랑의 삼각관계에서 제3자는 바로 사회와 그 문화이다.
그런데 이 뮤직비디오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흑백화면 속 동양여인은 아마도 롱고에 의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즉 동양적 사회의 도그마에 저항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설정된 듯이 보인다. 도그마에 대한 비판 내지 풍자는 <평화를 파네>가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평화를 파네> 비디오는 가사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종교, 국가, 금권 등 모든 권위와 그 힘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다. 교회 평면계획을 변형하여 만들어 낸 칼 모양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돼지의 검>(도판25)에서 롱고는 남성성이란 개념의 억압적 힘과 그것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권위적 양식을 풍자하고 있어서 그와 유사한 내용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풍자적 시선은 비디오 속의 세상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의 퍼포먼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마치 기계와 같이 움직이는 댄서들처럼, 시위대나 시위진압대 그리고 클럽에 모인 광적인 팬들 모두 나름대로의 사회적 의무에 기계적으로 복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록 밴드와 그 팬들을 위해 만들어진 뮤직비디오이지만, 사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차갑다.
알이엠의 <내가 사랑하는 이(The One I Love)> 비디오에서도 주제를 대하는 시선은 냉정하다. 낭만적 사랑과 관련된 상투적 이미지들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면서도, 번개와 적운 등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자연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삽입한다. 화면 속에서 계속 불꽃 튀는 스파크는 <강한 사랑>이 보여주는 숨은 폭력성과도 같은 것이다.(도판23, 24)
롱고가 한창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던 시기에 제작된 컴바인 작품들은, 물론 이전의 작품들 속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던 것이지만, 여러 매체의 다양한 이미지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80년대 전반에는 주로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작업을 했다면, 중반 이후로는 <헤즈는 연주하리라(Heads Will Roll)>, <사랑에 빠진 기계들>(도판15), <레니는 투덜댄다: 폭격기 속의 혜성(Lenny Bleeds: Comet in a Bomber)>(도판33), <사무라이 오버드라이브(Samurai Overdrive)>(도판34) 등에서 보이듯이 이미지들을 중첩시키고, 또 병치시키면서 중첩시키는 등 점점 더 복합적인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진화는 뮤직비디오 연출에서도 엿보인다. 편집속도는 빠르지만 화면들이 겹쳐져 있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괴상한 삼각관계>에서 화면을 겹침으로써 얻는 효과가 주로 탐구되는 <평화를 파네>나 <내가 사랑하는 이>를 거쳐 헬멧의 <그것을 주어라> 비디오에 이르면 여러 기법이 종합되고, 그 복잡성이 절정에 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의 중첩은 일찍이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의 작업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후에 롱고와 비슷한 시기의 작가들, 특히 데이빗 샐리나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 )와 같은 작가들이 탐구한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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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Katherine Dieckmann, “Small-Screen Stimulus: The Film and Video Work,” Howard N. Fox et al., 앞의 책, p.133.
24) Hal Foster, 앞의 글, pp.60-61.
25) 앤 카플란/채규진·성기완 옮김, 『뮤직 비디오, 어떻게 읽을 것인가-포스트모던 영상과 소비 문화(Rocking Around the Clock: Music Television, Postmodernism, and Consumer Culture)』, 한나래, 1996, p.89, p.220.
26) Christopher Lewis, “Mondo Longo,” Art in America (Mar., 1989), p.35.
27) Katherine Dieckmann, 앞의 글, 128. 뮤직비디오 작업이나 <어리나 브레인즈> 같은 영화작업을 하던 80년대 후반에 롱고는 카터 래트클리프가 “미니멀리즘의 로고”같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추상적 작품들을 보여준다. Carter Ratcliff, “Longo's Logos,” Artforum (Jan., 1990), pp.105-110 참조. 90년대 전반 <코드명 J>를 연출할 때까지는 깃발, 권총, 십자가 등의 상징기호에 대한 탐구가 작품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간의 시기에 그가 보여준 미술계에서의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을 상징할 수 있는 로고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로고가 해당 기업을 상징하고 그 이미지를 구축하듯, 롱고가 생산해 낸 로고들은 관념이나 의식, 정서를 상징하고 관객들과 그것을 교감하려고 한다. 비유하자면 롱고는 추상적 관념의 로고를 만들어 내는 미술계의 디자이너였다고 하겠다.
28) Brian D'Amato, “Electric I,” Artforum (Summer 1995), p.24.
29) Howard N. Fox, 앞의 글, p.23.
30) 확인된 바는 없으나 <제국(Empire)>이라는 퍼포먼스의 제목도 사실 이 빌딩의 이름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31) 한편으로, 뉴 오더의 비디오 마지막 부분은 그 자체가 영사된 이미지의 커다란 화면을 배경으로 하여 행해지는 롱고식의 퍼포먼스를 찍은 듯한 느낌을 준다.
32) Jean Baudrillard, “The Ecstasy of Communication,” Hal Foster ed., 앞의 책, p.130.
33) Maurice Berger, “The Dynamics of Power: An Interview with Robert Longo,” Arts Magazine (Jan., 1985), p.88에서 롱고는 <도시인>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국 도용 병정들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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