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모호함과 비가시성


황용진, <굿모닝 0501>, 2005년


황용진의 <굿모닝 0501>(2005)은 '언어' 연작을 거쳐 '풍경'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선보인 2005년의 개인전에서 대표작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고전주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는 깊이 있는 색조와 톤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패널에 한지를 바른 후 다시 미디엄(Medium)을 발라 최대한 매끈한 화면을 준비한 후 판화 잉크를 전체적으로 바르고 닦아내는 과정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한다. 'GOOD MORNING'이라는 네온 글씨는 이 작업 직전의 '언어' 연작과 연결된다. 이 작품은 짙은 어둠과 여명이 비치는 하늘의 강한 대비로 이루어진 간결한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적인 풍경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추상적인 공간을 모호하고 흐릿한 갈색의 톤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첨가된 'Good Morning'은 짙은 새벽의 건물 지붕 위에서 빛나는 네온 간판의 글귀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곧 다가올 찬란한 아침을 예고하는 것 같다. 이 전시의 <들어가는 글>에는 추상이 '새로운 세계를 예시하고 그것의 특질들을 가시화하며 그러한 세계가 비롯되는 잠재성의 영역들을 경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모호함을 나타내는 배경의 '현재성'과 아직은 비-가시적이지만 곧 다가올 세계를 가리키는 Good Morning의 '잠재성'이 공존하고 있다.


윤형근, <청다색>, 1973년


1950년대 말 한국의 추상표현주의 시기를 접하면서 앵포르멜(Informel) 미학을 경험한 윤형근(1928-2007)은 1960년대 초기 회화를 통해 수직적 제스처에 의한 표현주의적 화면을 남겼다. 그는 1970년대부터 색면이나 색띠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제작하였으며 점차 색상을 최소화하여 다색과 청색으로만 이루어진 화면을 창출해내었다. 화면의 두 가지 색깔을 지칭하는 작품의 제목인 '청다색(靑茶色)'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색들은 테레핀이나 린시드와 혼합되어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 위에 여러 번 발라지며 이러한 과정에서 번져나가는 모양을 만들어낸다.

추상회화는 간결한 형태에 이를수록 복잡한 일상적 세계와는 다른 감상의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추상회화가 지닌 힘이다. 자연과 세계는 수없이 많은 대상들로 가득 차 끊임없이 변천하고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추상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행위야말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행할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추상은 또한 그러한 간결한 형태 안에 깃들어 있는 복잡성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윤형근의 작품은 수없이 많은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다른 움직임에 의한 것들이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들로 귀결된다. 감상은 그러한 복잡성을 역으로 추정하는 시선과 그 시선을 하나의 패턴 위에 묶어두는 심상(心象)의 대립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노순택, <얄읏한 공>, 2006년


노순택(1971- )은 동시대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적 맥락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을 통해 기록하는 작가이다. 그는 한국의 분단과 이로 인해 발생되는 정치폭력의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년째 해오고 있으며,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을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얄읏한 공(The StrAnge Ball)>(2006)에 등장하는 흰 공은 평택 대추리에 있는 미공군기지 캠프 험프리의 군사시설인 레이돔(Radome)이다. 레이돔은 전투기의 공격력을 정확히 하기 위해 설치한 레이더 안테나의 덮개로, 이것은 한국 땅에서 정확한 폭격을 위해 광범위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군사시설이다. 노순택은 작품에서 이 레이돔을 여러 방향에서 포착하고 있는데 이것은 골프 공, 달 빛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주 되며, 교묘히 정체를 위장하고 있다. 노순택은 대추리를 3년 동안 관찰하며 기록한 <얄읏한 공>을 통해 대추리 주민들의 자연과 삶 속에 숨겨져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치적 관점을 강하게 제시하는 <얄읏한 공>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 부분은 바로 동일한 사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점들에서 비롯된다. 10개의 사진이 동일한 구체(球體)를 포착하는 방식은 마치 편재(遍在)하는 모든 시점에서 대상을 고려하고 있는 초월적 주체를 떠올린다. 관점들의 망라(網羅)가 암시하는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사진들 모두에 공히 나타나는 '공'의 모습은 사정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이 유머러스한 반전이 정치적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꾼다. 멀리 보이는 이상한 형태의 하얀 공은 나머지 부분들의 향토적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초월적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편재성은 양쪽에 존재한다. 하얀 공을 바라보는 시점의 편재성과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하얀 공의 편재성이 대립하고 있다. 하얀 공의 추상이 있고, 시점의 추상이 있다.



이우환, <무제>, 1960년대 후반


이우환(1936- )은 1968년부터 시작된 일본 모노하(物派)의 실천과 이론의 선구자로서, 그 당시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회화의 모태라 할 '점'과 '선'은 어떻게 그의 회화의 기본적 어휘가 되었을까? 그는 "내가 점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며 그 당시 떠돌이 환쟁이가 우리 집에 놀러와 그 사람으로부터 서예와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우환의 작품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명쾌한 논리성과 그 못지않게 명쾌한 개념이다. 그는 그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찍히는 점 하나하나가 그 관념의 구체적인 표현이 된다. 1960년대 초반에 제작된 <무제>는 그가 일본에 건너가서 제작한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본화 재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필선이나 운필은 새로운 그의 회화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린다'는 행위성의 등장을 예고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우환의 작품은 추상의 가장 기본적인 사례인 기하학적 단위들을 사용한다. 점과 선은 유클리드 이래 세계를 재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관념이자 재료들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점과 선은 관념적 대상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이의 행위에 의해 물리적 현실로 나타나는 대상들이기도 하다. 나는 점을 상상하며 찍으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찍힌 점은 상상했던 점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대상이다. 감상자는 찍혀있는 점을 보면서 그것이 관념적인 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함과 동시에 물리적으로 구현된 그 점의 모습을 관찰한다. 추상은 의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존재한다. 그려진 점은 그 두 개의 추상하는 주체를 매개하며 둘 사이에 떠있다. 의도의 추상과 감상의 추상,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하는 추상적 형식. 따라서 여기서 핵심은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그리기'가 추상적 관념을 얼마나 정순(貞純)하게 재현하고 있는가이다. 이로 인해 감상자는 그려진 점이 얼룩이 아니라 '점'이라는 관념의 등가물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동일한 프로세스를 동양에서 수 천 년 동안 반복해 왔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우환의 작품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극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임옥상, <들불>, 1981년 /<먹구름>, 1990년


임옥상은 1980년대에 민중미술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작가이다. 농촌 출신인 작가는 공업화되는 과정에서 농촌이 파괴되어 가고, 또 그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반발하였고, <들불>은 이러한 생각을 땅의 모습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과 먹을 동시에 사용하여 수묵화(水墨畵)와 같은 특이한 방식으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먹구름>(1990)은 먹구름을 묵시론적 풍경화로 그린 것으로 대지의 생명력과 땅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들불>과 <먹구름>은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 독특하게 먹구름이 낀 하늘을 다루고 있다. 하늘의 먹구름은 이제 막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들판에 막 폭우를 쏟아 부으려 한다. <들불>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빨갛게 번져가는 논밭의 불길을, <먹구름>은 빗방울을 기다리는 황무지의 고요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화면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비구름 낀 하늘의 과감한 표현이다. 대지의 상태를 묘사한 구체적인 필체는 우연적으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얼룩으로 처리된 하늘의 비-정형성과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 압도적인 것은 비-정형화한 하늘의 면(面)이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의도가 자연으로부터 배태되고 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이 그림에서 정치적 관념은 추상을 통해 측정하기 어려운 규모의 강렬함(intensity)으로 증폭되어 있다.



김홍석, <별>, 2005년


김홍석(1964- )은 기존 사물의 개념을 낯선 형태 혹은 개념으로 제시함으로써 예술에서 기호의 전복을 시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별>(2005)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에 작가는 우주를 대변하고 있는 불변의 이미지인 별을 그린 후 사진을 찍어 복제와 오리지널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진정성과 모호함의 경계를 부각시키는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2차원의 별의 형상을 회전시켜 다시 3차원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의 이미지는 실상 2차원의 편평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작가는 자신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3차원의 별을 제시한 것이다. 작가는 이 조형물을 자신의 별 드로잉을 찍은 사진과 함께 전시함으로써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개념의 모호함, 혹은 복제, 차용, 재창조 등을 통한 무한한 변용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김홍석의 작품은 일종의 단서로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거나 잠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단서 혹은 증거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사건은 보통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 확인할 길은 없다. 때문에 사건은 과장되거나 부풀려진 현실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실제로 다른 사실의 표절처럼 제시될 수도 있다. 세계는 확인할 길이 없는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사실들을 신뢰하고 스스로에게 재현하는 방식이다. 별은 하늘에 총총히 떠 있지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문 밖으로 나가보기 전에는) 문 밖에 비가 오고 있는지 증명할 수 없다. 세계는 거대한 추상화의 과정이다. 여기서는 잠재적 사실을 입체화한 별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I. 모호함과 비가시성    II. 일상 속의 추상    III. 추상의 기술    IV. 추상적인 면 혹은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