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수집과 그 기록 -미술관의 소장품관리(Collection Management)


이인범(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Ⅰ. 머릿말
Ⅱ-1 작품수집에 있어서의 고려사항들
Ⅱ-2 작품수집-정책 수립과 실제
Ⅱ-3 양식(1, 2)
Ⅲ-1 소장품 기록의 중요성
Ⅲ-2 소장품기록의 실제
도 표



Ⅰ. 머릿말

뒤주, 다락, 광,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묻어 두던 흙구덩이, 장독, 쌀독같은 전래적인 식량의 저장용기들, 옛날에 쓰던 일기장, 핏줄의 유구한 계보를 알리는 족보, 돌아가신 할아버 지께서 쓰시던 하찮은 집기류까지도 그 내용이 어떠하든 우리에게 여전히 삶의 넉넉함과 깊이를 환기시키는 정서적 등가물로 남아 있다.

사실, 나날의 음식을 신선하게 하는 냉장고와 낱권의 책에서부터 엄청난 정보들을 집적시킨 각종 자료관, 도서관들, 그리고 오늘날 정보의 집적량과 그 체계화 있어서 매우 위력적인 힘을 드러내고 있는 컴퓨터 등등, 이들은 우리생활에서 현실적인 힘의 원천임에 틀림없는 장치들이다.

무엇인가를 모으고, 그것을 갈무리하였다가 적절한 때 사용하는 일은 철새와 같은 몇몇 동물을 제외한 뭇 동물들에게 공통된 일상적인 생활양식이다. 가을산 다람쥐들의 도토리 모으기, 때때로 우리를 감복시키는 개미들의 노동 등, 자연계 안의 미물들에서조차 우리는 그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일은 유기체로서 동물들이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최소한의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육체적 생존과 더불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전망과 그 성취를 위해서 그에 적합한 것들을 모으는 일은 인간들에게만 있는 특수한 일이다. 사람들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거나 자신들이 이룩해 놓은 삶의 족적들을 회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망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서, 흑은, 사회전략으로서 그러한 일을 행한다.

더욱 더 괄목할 만한 일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물질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가치있는 사물들을 선택적으로 수집하여 저장하였다가 적절한 때 다시 끄집어 내어 발전의 동력 원으로 삼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 레스가 세웠던 뤼케이온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상속된 그리이스 문명의 영화만을 고립시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예술품과 문헌들에 대한 수집열과 컬렉션이 밑받치지 않은 르네상스문화를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박물관(museum)은 인류가 꾸려온 컬렉션의 역사 속에서 최선의 시스템 중 하나이다. 특히, 실재하는 사물을 수집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도서관과 같은 자료의 수집을 관장하고 있는 여타의 문화기구나 장치들로부터 매력적으로 구별된다.

예술작품이든, 고고학적 자료이든, 역사적인 자료이든, 민속학적 자료이든, 박물관이 다루는 것은 다름아닌 '실물'(real thing)이다. 뭐니뭐니해도 사물의 실체성이야말로 박물관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그러한 면에서, 박물관문화의 생성토대를 논하면서 사회를 '관념중심적사회'(con- cept-centred society)와 '사물중심적사회' (object-centred society)로 나누는 캐논 브뤀(P. Canon-Brook)의 구분법은 매우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대부분의 사회의 문화가 '관념중심적'인데, 그러한 사회에선 낱낱의 사물들은 매우 제한된 의미만을 지닌다.

이러한 '관념중심적사회'가 사물들에 대해 갖는 관심이란 고작 그 사회 안에서 여전히 지속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주물들(fetishes)이나 토템들(totems)에 머무를 뿐이며, 문화적 전통은 전적으로 구전형식을 통해 후대에 상속될 따름이다. 반면, '사물중심적사회' 에 있어서는 문화적 전통계승과 소통에 있어서 사물들의 집적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당연하게도 박물관문화의 성숙은 '사물중심적사회'의 발전의 귀결이거니와 또한 그러한 사회의 진보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박물관의 사회에 대한 기여폭의 확대는 단지 그것이 가치있는 '실물'들을 수 집하고 관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한 사회에서 그것의 위상을 한층 더 중대한 수준으로 높힌 것은 바로 이 사회 속에서 그것이 지닌 공익성과 공공성이다.

국제박물관협회(ICOM)가 정의하는 바의 박물관의 개념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 "박물관은 예술, 역사, 미술, 과학 및 기술관계 수집품과 식물원, 동물원, 수족관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자료, 표본 등을 각종의 방법으로 보존하고, 연구하며, 가치를 고양시키는데, 특히 일반대중의 즐거움과 교육을 위해 공개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설립된 항구적 시설을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확실히, 박물관의 컬렉션은 개인의 개별적인 수집행위와는 구분된다. 개인의 수집행위는 한 개인의 기호에서 비롯되지만, 박물관의 수집활동은 그것의 토대인 한 사회의 문화적 입장과 성격을 반영하고, 그 사회의 지적, 경제적 풍토를 드러내며, 박물관의 컬렉션과 그밖의 활동은 그것을 밑받치는 사회와 필연적으로 상호연관관계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박물관문화가 확연하게 그 사회 구성의 성격과 구조적으로 연관될 뿐만 아니라, 박물관 소장품이 그 사회에 기여하는 폭과 방식 역시 그러하리란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박물관(museum)의 한 개별적인 종으로서 미술관 (art museum)의 작품수집이나 수집된 작품의 기록이 적절해야함은 미술관이 지닌 이러한 공공성이라는 본질적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시급한 일이다. 온당한 절차와 벙법에 의해 수집되지 않은 작품과, 설혹 바른 방식에 의해 취득되었더라도 바르게 기록 또는 등재되지 않은 작품이 미술관 고유의 활동목표에 기여하리란 기대를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바르게 수집되지 않은 작품이 공허한 만큼, 수집되었으되 바르게 정리 기록되지 않은 작품은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정보의 빈곤이나, 체계화되지 않은 정보나 우리를 영양 실조에 걸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한 공동체의 문화는 공공의 것이다. 토지의 공개념 못지 않게 문화 유산의 공개념 역시 우 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은 그것을 낳은 공동체적 삶의 객관화이고, 그 작품은 다시 그것을 낳은 공동체를 이루는 민중들에게 되돌려져 또다른 창조적인 삶의 밑거름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작품수집과 그 기록은 작품을 본래의 위치로 되돌리는 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어느 노미술사가가 언급한 바 대로, 이 일을 바탕으로 해서만 제대로된 미술관 활동과 제대로된 미술사학이 시작될 것이다.(주1)

예술작품이 폐쇄된 밀실에서 혹은 개인의 사적소유나 기호대상에서 해방되어 그 존재를 공공의 역사 속에 드러내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일 것이다.





(이글은 미술관의 소장품 관리에 관한 글의 일부임)

주1) 미술사 연구의 방법론. 즉, 미술사학과 동양 및 한국미술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탐구하여 미술사학과 미술사 연구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고자 1986년 발족된 「미술사학 연구회」의 '미술사와 미술사학'이라는 제목의 초청강연(1988년 5월 20일, 대우학술재단)에서 이동주 선생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작품기록에 문제(작품목록학)가 한국미술사 발전의 시금석이 될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역설했다.

이 강연 내용은 「미술사학보」창간호 (미술사학 연구회, 1988)에 정리, 게재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