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미술관의 사회적 기능

최태만(학예연구사)

Ⅰ. 현댸사회의 문화적 징후들
Ⅱ. 미술관의 역사
Ⅲ. 미술관학의 역사와 이념		 Ⅳ. 문화적 참여제도:개방적 미술관의 요청
Ⅴ. 미술관문화 정립의 몇 가지 조건들
Ⅵ. 문화발전론에서 본 국립현대미술관과 미술관의미래
V. 미술관문화 정립의 몇 가지 조건들

미술관 내·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문화활동 전체를 미술관문화라고 할 때, 미술관 문화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인력과 예산, 그리고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미술관 재정의 경우 크게 설립주체에 따라 국고와 기업이나 사회단체 혹은 개인 등이 출연하는 기금으로 나뉜다. 일차적으로 국가에서 설립한 국립미술관의 경우 거의 전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국고의 지원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국 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요한 국립미술관들이 정부의 재정에 의해 운 영되지만 특히 퐁피두는 문화부를 통해 예산을 배분받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예산 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 및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받 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이령게 국가예산으로 미술관 운영경 비를 조달하고 있으나 미국은 기업이 출연한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한 국립예술기금 (NEA)으로 공·사립미술관 운영비를 보조하고 영국은 의회 산하의 예술위원회 (Art Council)가 관리하는 별도의 기금으로 운영된다.

그외 많은 국가들이 별도의 기금으로 미술관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국고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기금의 설립도 고려해 볼만하다.

참 고로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스베인 주림 쥔즈랜드 문화센터(Queensland Cultural Center)의 경우 별도의 복권을 판매한 수입금으로 기금을 확보하고 있으며, 몇몇 주정부 역시 문화 공공사업을 목적으로 복권을 판매 하고있다.

특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별도의 '오페라 복권'이 주 수입원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외 몇 개 국 가에서는 경마수입의 일부를 문화기금으로 조성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게 볼 때 대 규모의 예산이 소요되는 미술관의 운영을 위해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지원과 더불 어 기부금을 제공한 개인/단체/기업에 소득세, 판매수익세 중 일부를 감면해 주거나 수익자의 출자에 응하여 정부가 교부금(grants)을 지원하는 이른바 매칭 펀드 (matching fund) 등의 간접지원을 병행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재정확보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미술관 전문인력의 양성과 충원은 소프트웨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미술관의 활동에 관한 한 그 미술관의 관장이 어떤 생각 으로 미술관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미술관의 방향은 관장에 의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아 무리 잘못된 시설, 스탭을 가지고 있더라도 관장이 미술관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면 그 미술관은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아무리 훌륭한 시설과 뛰어난 능력을 구비한 스탭이 보조한다고 하더라도 관장의 확고한 의지가 결여된 미술관은 부침할 수밖에 없다고 맡은 미술관학 입문서들이 누차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관장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할 수 있다.

나아가 현대사회에 있어서 미술관장은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 어떤 보물을 절대적 비밀 속에서 간직한다 는 의미(thesaurisation)로서의 '보존관' (Thesaurius)이거나 학자로서가 아니라 전문 가적 식견과 안목은 물론 미술관직원들을 효율적으로 지도, 감독, 충원, 배치하고 미술관과 관련된 기관이나 기업, 후원자들로부터 재정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사교와 행정에 능숙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가 이러할진대 관장의 결정을 보 조하고 미술관활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학예연구직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 인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미술관 활동의 핵심은 큐레이 터(curator)에 의해 이루어진다.

통상 학예연구직으로 번역되는 큐레이터의 업무는 그 성격에 따라 작품의 수집 및 보존, 전시의 기획, 미술관 자료의 조사연구 등으로 나뉠 수 있다.

영어권에서 큐레이터 혹은 키퍼(keeper)로 불려지는 학예연구직의 불 어식 표기가 '보존담당자' (conservateur)를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학예연구 직의 고전적인 임무는 미술관 소장품의 안전하고 항구적인 보존관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더라도 단순히 값나가는 물건을 창고에 집어넣고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만큼 보존담당 큐레이 터의 활동 역시 몇 가지 전문적인 영역으로 세분된다.

첫째 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 는 물건들의 예술사적 가치에 대해 연구하고 그 성과를 전시 및 출판을 통해 발표하 는 이른바 '소장 및 상설전시 담당 큐레이터'와 그 큐레이터를 도와 소장품을 효과 적으로 분류, 정리하고 과학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전문적, 기술적 지식과 경험을 제공하는 레지스트러 혹은 컨서베이터 등의 활동 역시 학예연구직의 역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새로이 소장할 가치가 있는 작품의 자료를 수집 하고 그것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토대로 미술관에 소장을 추천하는 것 역시 이 영역 에 드는 활동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미술관이 요구하는 학예연구직의 역할이 단 지 작품의 보존관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대부분 과거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역사박물관이나 미술사박물관과는 달리 현대미술관은 당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적인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을 정리, 소개, 평가하는 방향으로 활동영역을 정립하고 있는 만큼 학예연구직의 역할 또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획전시의 경우 학예연구직원 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 그리고 능력을 시험받는 무대가 된다. 따라서 기획전시를 통해 개인 흑은 팀으로서 큐레이터의 취향, 태도, 방향 전망까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성공적인 전시를 위해 큐레이터의 의도와 안목을 효과적 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전시디자이너 혹은 코디네이터(학예직), 출판디자이너 등이 하나의 팀을 구성하여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이라는 사회적 기능의 수행을 위해 수집, 보 존, 전시뿐만 아니라 미술관과 대중을 긴밀하게 연결시켜주는 홍보·교육부분에 있 어서 학예연구직 활동의 강화가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출 판을 통한 미술관 활동의 대중홍보 및 학교교육을 보완하는 각종 사회교육 프로그 램, 세대 지역 계충별 취향과 요구에 맞는 관람프로그램의 개발 및 실행보급을 위해 활동적인 미술관마다 별도의 교육담당 큐레이터를 두고 있는 이유도 변화하는 사회 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큐레이터의 활동영역이 이렇게 폭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활동들은 전문영역에 따라 엄격하게 세분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각 부문을 담당한 학예연 구직원들의 긴밀한 협업에 의해 미술관이 운영되어야 한다.

미술관 활동의 협업구 조는 비단 학예연구직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역할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 하는 행정부서와도 연계되어야 한다. 학예연구직원의 활동과 관련하여 국립현대미 술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할을 소개하자면 소장품의 분류·조사·연구, 전시기 획안 발의, 국내, 국제전시의 코디네이팅, 교육 프로그램 개발, 자료의 조사 및 연 구, 기타 미술관활동 관련업무의 처리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국립현대 미술관의 규모와 조직 학예연구직의 활동내용에 비해 전문직원의 정원이 매우 적 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성격과 규모에서 분명히 다르지만 국립중앙 박물관과 비교해 볼 때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학예연구직원들의 연구활동을 신장 하고 그 성과를 구체적인 활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직제의 개편을 통해서라도 더 많은 학예사가 충원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학예연구직원들이 전문영역 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이 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미술관 자체 내 에서 학예연구직원의 재교육이 수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소장작품 담당 학예 사가 그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성과를 발표하며, 교육담 당 학예사는 교육학 전공학자에 버금가는 안목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회화, 조각 등의 전통적인 장르개념이 해체되고 있는 현대미 술의 조류에 부응하여 평면, 입체, 사진 및 비디오, 테크놀로지 등 전문영역을 갖고 장기적인 계획 아래 연구를 진행하며 그 성과를 전시 및 교육활동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예연구직원들이 자신의 직분에 대한 분명한 신념 과 사명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학예연구직원들이 미술관의 바 람직한 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업무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의 필 요 또한 덧붙이고 싶다.

'자율성이 있는 곳에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인식하고 실천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될 때 학예연구직의 활동에 대한 기대 또한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해 본다. 학예연구직원의 양성 및 충원에 관한 한 대학이 그 역할을 담 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술대학의 교육은 작가를 양성하기 위한 실기위주 의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학과나 미술사학과 역시 현대미술관에서 필 요한 학예연구직의 충원을 위한 기본교과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 에 학예사 채용시험을 치룬 신입 학예사들이 적응하기 위해 상당기간 재교육받거 나 훈련기간을 가져야 하는 문제가 있다.

기왕에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및 시 행령 규칙이 발효되었고, 공·사립미술관의 설립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학예연구직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의 정립이 더없이 요청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학 강좌)는 이런 이유에서 개설된 것이며, 보다 전문적인 소양을 갖춘 우수인력의 확보를 위해 대학 및 대학원 과정에 미술관학 전공이 개설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다른 나라에서 예술행정가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기관과 그 교과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경우 런던시립대학의 예술행정대학원에 예술행정 가 양성을 위한 세 개의 학위과정이 개설, 운영되고 있으며, 교과 역시 이론보다 실 례와 경험 위주로 짜여 있다.

따라서 이 대학원의 강의는 현장학습(field work)과 사 례발표를 중심으로 한 세미나 위주로 이루어지며, 공공부문에서의 예술행정의 조 직·운영을 필수과목으로 그 외 예술정책, 재정, 마케팅, 법과 예술, 대중예술, 예술 디자인, 국가 정책결정 등이 개설되고 있다.

프랑스는 2년제 전문대학 수준의 IUT(Institut Universitaire de Technologie)와 문 화성의 위임을 받은 4년제 대학과정의 ATAC(Technical Association for Cultural Action), 그리고 에콜 뒤 루브르(Ecole du Louvre), 일반대학 등에서 예술행정과정 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중 lUT의 경우 표현기술, 시청각기술, 외국어, 매스커뮤니 케이션론, 정보기슬, 문학과 문명, 경제학 입문, 현대경제의 문제, 역사와 사회, 심 리학, 사회심리학, 사회학, 정치제도, 행정제도, 사상사, 집단이론, 경영기술, _식 기술, 행정기술, 문화 촉매 운동론등 예술과목 보다 폭넓은 인문사회교과에 치중하 여 예술행정가의 사회성과 기술, 자질 등을 중점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캐나다 역시 반프센터의 행정 학교(Banff Centre; School of Management)에서 예술행정가를 위 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학교의 경우 새로운 예술행정가의 양성보다는 현재 현직에서 종사하고 있는 예술 행정가의 재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예 술행정가를 위한 행정개발과정은 교육기간이 3주에 불과하지만 5년 이상 문화기관 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조직이론, 재정관리, 기금확보, 법, 인간관 계, 조직전략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사례분석 특별주제에 대한 단체토론 등을 통해 이미 문화기관에서 쌓은 자신들의 경험 및 정보를 교류,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예술 행정의 바람직한 모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프센터의 큐레이터 재교 육과정 또한 10일에 불과하지만 외국의 유수한 미술관 전문직원들도 이 과정을 이 수할 만큼 수준높은 교육과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의 사례에서 볼 때 오늘날 큐레이터는 미술사학자 혹은 연구자로서의 자질 못지 않게 행정적 능력까지 갖춘 전문가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미술관 의 경우 그 제도가 지닌 특수성때문에 큐레이터들이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미술사 학자로서, 당대의 미술 흐름을 꿰뚫어 볼줄 아는 비평가로서, 대중들에게 미술에 대 해 쉽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능력을 구비해야 할 필요가 있 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뚜렸한 철학과 신 념 아래 인간과 인간, 작품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전시 조직자, 행정가적 자질 역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