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소고(小考) - 이중섭의 작품에 나타난 전통성을중심으로 -

이용우(고려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Ⅰ. 머릿말
Ⅱ. 李仲燮의 生涯
Ⅲ. 이중섭 화풍의 淵凜
Ⅳ. 이중섭의 작품세계
Ⅴ.맺음말

Ⅱ. 李仲燮의 生涯

李沖燮의 生涯는 그간 많은 문인들에 의해 소개되어 다른 어떤 미술인들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일본여자를 아내로 맞은 점, 전쟁의 와중에서 아내와 아들들과 생이별해야 했던 점들은 어느 정도 과장되게 표현되고, 이러한 특이한 상황을 바탕으로 이중섭의 일생은 영화, 혹은 드라마로 극화되어 세인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그와 비슷 한 시대를 살았던 다른 이들에 비해 유난히 더 어려웠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의 성품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天眞하다든가, 純粹하다든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표현이고 보면, 戰爭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내기에는 그의 성품이 너무 여렸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이 그를 天才로 혹은 奇人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훈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저렇듯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돌아 가는데 나는 그림 만 神主 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무슨 짓이냐?"

이와 같은 自虐 증세는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일본에 가려는 계획이 좌절된 결과로 나타나 며, 이어서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림그리는 일에 대한 懷譏도 나타난다. 그리고 무언가 타 인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아, 머물고 있던 여관의 곳곳을 청소한다든지, 이것도 부족해 음식을 거부하는 증상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적인 접 근이 필요하겠지만, 정신분석학에 있어 門外漢인 필자가 보더라도 李仲燮의 절망감은 극에 달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拒食症으로 말미암아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李仲燮이 세상에 할 수 있었던 보복의 수단이었다고 감상적인 평을 하 는 이도 있으나, 그러한 감상적인 평가가 李仲燮의 神話를 만들어 내는데 큰 몫을 한 것은 아 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는 극도로 섬세하고 정열적이며 내성적이었던 예술가가 어려운 상황 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불편한 것 없이 부유하게 자란 李 仲燮으로서는 전쟁 중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가 극히 어려웠을 것이고, 자신의 삶에 중심이었던 그림그리는 일 또한 여의치 않게 되어 겪는 갈등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들 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가족을 사랑라는 마음이 지극했던 그에게 남편노룻, 아버지 노 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 그 은혜는 ‥‥ 꼭 흘륭한 작품으로 보답하겠소" "아고리는 新雌界의 覇表頊의 제일인자라는 것. 정직한 畵工인 것을 굳게 굳게 믿어 주오. "

"올바르게 완성하지 않아서는 안될 새로운 세계의 회화를 짊어지고 최장거리 마라톤을 끈기있게 충실히 걷고 또 걸어 기어코 완성시키고야 말 작정이오."

이렇듯 자신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인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그는 자부심과 자신들 지 니고 있었다. 자신을 반드시 畵工이라 지칭하는 점에서 우리는 李仲燮의 화가로서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소에 비유했는데 이는 마라톤을 꾸준히 걸어 완성하겠다는 태 도와도 일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에 알려진대로 천재라기보다는 꾸준히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성품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성품은 자신이 원하는 구도로 주소를 쓸 때까지 편지의 겉붕을 여러 번 썼다는 주위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李仲燮은 세상에 알려진 대로 천재요, 기인이라기보다는 노력하는 성품을 지닌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이 아닐까? 40세의 나이로, 예술가로서는 아직도 한참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그에게 그를 아낀다는 이들이 붙여준 천재, 혹인 기인이라는 평가는 죽은 이에게 영광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위 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중섭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음 연보로 간략히 처리할까 한다.

(年 擔)
1916 4월 10일 平南 平原郡 朝雲面 松千里에서 長水 李氏 李凞周(父)와 安岳 李氏(母)사이 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31 오산고등보통학교 입학. 任用璉에게 미술을 지도받음.
1937 文化學院 미술학부 서양화과에 입학.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과 교유,
1938 [在 동경미술협회]의 서울전(화신백화점)에 출품. [자유미술가협회]의 제2회전에 출 품.
1940 文化學院 졸업. [미술창작가협회] 의 서울전에 <소와 아이>, <서 있는 소>, <望月>,<산 의 풍경) 출품.
1941 [미술창작가협회]의 회우로 추대, 제5회전에 <망월>, <소와 연인> 출품. [조선신미술가 협회」결성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최재덕, 진환), 창립전을 동경에 이어 서울(화신 화랑)에서 갖게됨.
1942 「미술창작가협회」展의 제6회전에 <소와 어린이> 등 5점 출품 제2회 「신미술가협회」展에 참가
1943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展에 <망월>을출품하여 태양상 수상 제3회 「신미술가협회」展 참가.
1944 제4회 「신미술가협회」展 참가.
1945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 李南德)와 결흔. 해방 후 서울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에 벽 화제작.
1946 [북조선미술동맹]가입. 具常의 시집 {懷香}의 표지그림 사건으로 고생함.
1950 부산으로 피난.
1951 제주도로 옮김. 다시 부산으로 감.
1952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입단. 「대한미협」의 3.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 부인, 두 아들과 이별. 한묵, 손응성, 박고석 등과 가로전 개최
1953 統營(성림다방)에서 개인전.
1954 진주에서 개인전. 「대한미협」展(경복궁 미술관)에 출품
1955 謠針報吐 주최로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 정신이상 증세 로 입원 치료.
1956 9월 6일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 4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