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소고(小考) - 이중섭의 작품에 나타난 전통성을중심으로 -

이용우(고려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Ⅰ. 머릿말
Ⅱ. 李仲燮의 生涯
Ⅲ. 이중섭 화풍의 淵凜
Ⅳ. 이중섭의 작품세계
Ⅴ.맺음말

Ⅲ.李仲燮의 畵風의 淵源

1. 서양화풍의 영향

李仲燮의 畵風의 淵源을 살피기 위해 우선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떠한 화풍을 접했는지 그 의 초기화풍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李仲燮이 수학했던 일본의 문화학원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와 개성을 존종하는 학풍의 학교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일본 화단은 官學派 중심의 인상주의적인 아카데미즘을 탈피하려는 시도로 다양한 여러 가지 서구의 화풍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자유미술가협회」도 창설되었던 것이며, 이 협회의 대부분의 회우들은 기하학적 추상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李仲燮의 경우, 추상화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작품>(도판 1)의 경우, 대상물을 면으로 구 성하고 그 면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 굵은 線을 그어주고 있다. 이러한 선은 후에는 李仲燮 특유의 선으로 바뀌게 되지만 아직은 루오(George Rouault)적인 선이라 할 수 있었다.


1941년 동경에서 열렸던 「조선미술협회」전의 출품작인 (연못이 있는 풍경)이나, 같은 해에「자유미 술가 협회」에서「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이 바뀐「미술창작가협회」의 제5회전에 출품했던(소와 여인)애 등장하는 인물은 고갱(Paul Gauguin) 의 인물과도 유사하여 李仲燮이 다양한 화 풍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판2)

이러한 다양함은 1940년과 1943년에 제작되었던 같은 제목의 (望月)(도판 3,4)이라는 작품 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여러가지 동물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샤갈의 작품과도 유사하게 여겨진다. 특히 1943년의 작품은 샤갈의 (친사의 추락)과 구도에 있어 부분적으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렇게 본다면 李仲燮이 일본 유학 당시 영향을 받았던 서구의 화풍은 야수파로 구분지을 수 있는 루오, 후기 인상파의 고갱, 초현실주의의 샤갈 등 으로 상당히 다양하다. 이러한 현상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의 전통회화 작가들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畵譜를 통해 이곽파 화풍, 절파, 오파화풍 등의 다양한 화풍을 학습하던 것에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초기에 이렇게 다양한 화풍의 습득기를 거친 李仲燮이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이 강렬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李仲燮 자신도 스스로 신표현의 제일인자라는 자부심을 보이고 있고, 그의 거친 붓질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친 붓질에 의한 화면 처리는 반 고흐(Vicent van Gogh)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화면의 일정 부분을 균질하 게 채색을 해서 메꾸는 것이 아니라, 붓을 반복하여 그어줌으로써, 붓의 터치가 살아 있는 것 처림 보이고, 이러한 선들이 모여 면을 만들어 내는 점에 있어서는 반 고흐의 화면과 李仲燮 의 화면이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인 뭉크(Edvard Munch)의 경우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가 李仲燮이 단지 서양화풍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선이 다른 서양의 화가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다. 이중섭이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고 있는 작가는 마티 스 (Henri Matisse)로 이는 마티스의 화풍을 따른다기 보다는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작품태 도가 이중섭의 그것과 같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李仲燮의 (춤추는 가족)은 마티스의 (춤)과 구도나 인물 표현예 있어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李仲燮은 춤을 추고 있는 가 족들을 마티스의 인물보다는 더 현실적인 인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마티스의 작품이 긴 시간을 두고 온 대작인 것에 비해, 李仲燮의 가족도는 규모나 제작시간에 있어 마티스 의 것보다 즉흥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인물도에서 李仲燮이 자신만의 독특한 인물 유 형을 창조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李仲燮은 일본 유학을 통해 다 양한 서구의 화풍에 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화풍을 완성시켜 가고 있었 다. 물론 그와 함께 유학했던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 등이 화풍을 추상으로 굳히고 있었던데 반해, 어쩌보면 낡았다고 여겨지는 전 시대의 화풍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문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李仲燮의 화풍을 서구의 표현주의와 굳이 연결시킬 필요는 없 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강렬한 붓질과 거친 질감이야말로 이중섭이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었던 방법이며, 이를 표현주의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중섭 에게 가장 알맞는 기법이며, 당시 우리가 처한 험한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적절한 표현기법 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李仲燮의 기질로 보아 그가 살아 계속 작업을 했다 하더라도 그의 화풍이 추상으로 옳겨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2.傳統性의 문제

필자는 머릿말에서 전통성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소재주의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했 었다.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대할수 있는 소재인 소, 닭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고려상감청자 에서 볼 수 있는 童子를 그렸다고 해서 어떤 작품이 전통의 맥에 닿아 있다는 평가는 불합리 하다.

이보다는 작가의 표현양식이 확고하게 전통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작가가 전통성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李仲燮은 과연 그의 작품에서 전통성을 구현한 것일까? 필 자는 線의 표첨, 구도, 典型을 얻은 인물표현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 정신적인 면에서의 전통성을 고찰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李仲燮의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이다. 李仲燮의 선은 강렬한 힘과 율동미를 갖추었 으며, 이러한 특질을 지닌 선은 한국회화사에서 고구려 미술의 특징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접의 선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율동미를 지닌 唐草文의 선이나, 四神圖의 거친 듯하면 서도 힘있는 선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李仲燮은 벽화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벽화제작을 하기도 했었다. 그가 은지화를 비롯한 소품들을 대작을 위한 에스키스라고 했을 때의 대작이 벽화를 의미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전쟁 전에 북한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 벽화를 직접 보았을 가능성도 크다.

김환기 등의 다른 작가들도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의 유 려한 선이 이루는 조형성에 심취한 경우가 많았듯이, 李仲燮 역시 도자기에 관한 관심이 지대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에 다니러 오거나, 유학 후 귀향한 뒤, 박물관 에서 계속 유물을 스케치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우리의 유물과 그것이 갖고 있는 아 름다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李仲燮의 인물, 특히 어린이상은 이러한 관심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 은 단순히 靑硏서 차용한 童子像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린 가족도의 어 린이들은 그의 아들이라는 개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발전한 표현양식으로서 일반화 된 아이들이다.

이는 마치 18세기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김홍도나 신윤복의 인물처럼 전형화되 고 樣式化한 것이다. 이중섭이 가족도에서 주로 사용한 구도는 원형구도이다. 가족도 이외에 도 닭 그림인 (부부)의 경우, 중앙에 수직으로 위, 아래로 내리 뻗은 닭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그려져 있지만 날개를 펼치고 있어 중앙을 강조한 변형된 원형구도로 볼 수 있다. (도판 24, 25)

이러한 원형구도는 보는 이외 시선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여 중앙에 모이게 해주며, 화면 에 등장아는 소재, 인물들 모두에게 시선이 골고루 갈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원형구도 역시 조선 후기의 김홍도가 즐겨 썼던 구도이다.

분청사기 중 철회분청의 간결하면서도 힘있고 운 치있는 문양 역시 李仲燮이 사용한 특징적인 표현법이었다. 철회분청에 사용되는 꽃이나 새 등의 문양은 거칠면서도 독특한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현대적인 감각의 문양들이다. 이중섭은 이러한 문양을 놓치지 않고 활용한 것이다.

이외에도 이중섭이 한자로 서명한 작품 이 거의 없다는점에 주목할필요가 있다. 이중섭은 자신의 이름인 '중섭'과 이를 평안도 사투 리로 발음할 때의 표기인 '둥섭' 혹은 '대향'이라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한글 자모를 풀어 서 명으로 사용졌다. 이는 일제 시대부터 계속된 그의 서명의 특성이었고, 여기에서 그의 민족성 신의 일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양의적인 특성이었다면, 직접 눈에 보여 손으로 만지 듯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에 의해 유추할 수 있는 이중섭의 정신적인 면에서의 전 통과의 관련성은 어떠했던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전통을 단순히 소재로써만 이용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전통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가 오산학교 재학시절, 그에게 그림을 가르친 任用璉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임용련은 3.1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중국 으로 피신했고, 곧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한 인물로 미국이나 유럽의 안정되고 보 장된 환경을 마다하고 귀국하여 교육계에 투신했던 선각자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임용련 이 어린 李仲燮에게 미쳤던 영향은 상당했을 것이다. 앞서 필자는 李仲燮이 박물관에서 유물 을 스케치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와 연관을 지어 그와 당시의 개성 박물관장이었던 高緖燮과의 교류를 유추하는 내용의 논문도 있어 주목된다.

3.李仲燮의 師承關係

무엇보다도 오산학교시절 미술교사였던 任用璉의 영향을 들 수 있겠다. 임용련이 미국에서 공부를 한 시기는 1920년대의 후반기였고, 이 시기의 미국에는 아직 뚜렷한 미술운동이라고 할만한 흐름은 없었으므로, 임용련의 화풍은 프랑스가 주도하는 서구의 화풍에서 벗어나지 않 았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어 '임용련의 신화'를 증거해 준 그의 풍경화 <에르블 레 풍경)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단정하게 다듬어진 그림으로, 전경에 보이는 주택들의 지붕이 나 휜 벽에서, 강 건너 숲의 처리에서 빛의 효과를 강조하는 인상과의 영항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빛의 처리에 있어서 표현기법이 강렬하고, 강물의 2면 처리나, 원경의 숲의 처리에 있어서 상당히 감각적인 기법이 보이고 있다.

단순히 인상파의 영향만으로 볼 수는 없다. 오 히려 후기인상파, 혹은 야수파의 영향 아래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용련은 李仲燮에게 민족주의의 영향만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접 미국 및 유럽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돌아온 임용련의 존재는 어린 李仲燮애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이로 인해 李仲燮이 프랑 스 유학을 꿈꾸게 된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추측할수 있는점은, 임용련이 학생들을 지도함에 있어 기본을 중시하는 엄격한 스승이었으리라는 점이다. 李仲燮이 데생 및 스케치에 뛰어났었 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며, 이점은 유학 이전의 기초교육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부분은 미국 예일대학(Yale Univeisity) 미술학과 수석졸업이라는 명 예를 지닌 임용련에게 일정 부분의 공이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미술가협회]의 주된 경향이 기하학적 추상이었던 분위기 속에서도 李仲燮은 줄곧 강렬한 표현의 구상을 고집 했으며, 이러한 이면에는 그의 최초의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의 영향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다음은 李仲燮의 유학시절 스숭의 영향은 어떠했을지 알아보겠다. 李仲燮은 처음 東京帝國 美術學敎에 입학하였으나,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긴다.

1925년에 미술학부가 설치된 문화학원은 자유로운 예술 창작의 분위기를 중시하던 곳으로 당시 서양화과의 교수진으로는 이시이 향구데이(石井相亭), 기노시다 요시노리(木下義脚), 아 까끼 야스노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어 이중섭이 일본에 서 학업을 통해 받은 영항관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38년부터 문화학원의 강 사로 나왔고, 김환기, 유영국 등과 친교가 있었던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에 대해서는 그 가 기하학적 추상화를 그렸던 화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었으나, 李仲燮과는 화풍상 특별 한 관계가 없었다. 李仲燮의 화풍은 그의 일본 유학시절 어느 정도 완성 되었다고 보여진다.

후기 인상파의 고갱, 반고흐, 야수파인 루오, 그리고 20세기 초 파리에서 작업을 하던 샤갈 등의 영향이 보이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물론 이러한 영향을 일본인 스숭을 통해 받기도 했을 터이나, 전적으로 간접적인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일본의 화단은 서구의 화풍 유입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화풍의 유입에 많은 시간이 걸 리지 않았으며, 프랑스로의 유학은 상당히 일반화되어 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李仲燮은 일본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불가능해졌던 것으로 여 겨진다. 이렇게 본다면 李仲燮은 유학 이전에 임용련을 통해서 간절적이나마 일찌감치 서구의 화풍을 접할 수 있었으며, 일본유학을 통해 좀 더 다양한 세계에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