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Ⅲ. 한국 모노크롬의 이념과 특성
한국 미술계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형 이념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하나의 특정 양상으로 주류를 형성해 나간 것이 바로 모노크롬 회화의 집단적인 출현이다.
특히 일체의 형상과 이미지를 화면에서 제거함으로써 화면의 평면적 특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던 모노크롬 회화는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 미술이 되었다. 당시 세계 미술계에는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이 풍미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한국의 모노크롬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모노크롬은 다색화(polychro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에만 변화를 주어 그린 단색화를 의미한다. 색채뿐만 아니라 내용, 주제, 선, 형태를 거부한 모노크롬은 구성의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 미술 개념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며 전체주의적(wholistic)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세기초 절대주의 화가인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1878-1935)의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과 러시아 구축주의 작가인 로드첸코 Alexandre Rodchenko(1891-1956)의 <검정위의 검정>을 기원으로 하며 최초의 단색 실험을 시도한 클랭이 1957년 일명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IKB’라고 불리는 그의 고유한 청색 모노크롬이 유명하다.
특히 그는 청색이 가장 비물질적이고 절대와 무한을 표상하는 색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비물질적인 실체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 미술의 미니멀적인 사고는 한국에 와서 독특하게 변질되었는데 이른바 모노크롬으로의 환원이라 불리는 것이다.13)
당시 평론가들은 서구의 모노크롬과 한국 모노크롬 미술의 공통성과 차이점에 대한 기술로서 한국 모노크롬 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오광수의 경우 서구 ‘미니멀리즘과 컨셉추얼 아트의 한국적 변형으로 개념 지을 수 있는 것이 구조로써의 평면(평면주의)과 정서로서의 모노톤(단색주의)이라’고 규정짓고 이 중에서도 구조와 정서에서 똑같이 검출되는 것으로 ‘비물질화’라 정리하였다.14)
또한 모노크롬의 등장은 또 다른 측면에선 회화의 평면 조건에 대한 검증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단색의 일정한 표면이란 다름 아닌 회화의 기본 여건으로의 회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단색파의 경우, 평면을 다시금 구조로 인식함으로써 회화를 화화로 되돌려 준다는 논거가 성립됨에 주목한 것이다.15)
이일의 경우에는 그의 전시 서문을 통해 한국의 모노크롬을 ‘내재적 모노크롬’이라고 정의를 내린바 있다. 그는 서구와 비교하여 ‘우리 작가들의 경우, 모노크롬의 의미는 사뭇 특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저네들의 모노크롬이 물질로서의 색채, 또는 질감으로서의 색채개념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단색화 함으로써 일종의 ‘관념적’인 단색(특히 이브 클랭의 경우가 그렇다)으로 환원했다면, 우리 작가들의 경우, 그것은 애초부터 물질성을 떠난 ‘내재적 모노크롬’이다. 바꾸어 말해서 색채가 그들에게 있어 물질화된 공간을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정신적 공간을 의미한다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정립하였다.16)
김복영은 모노크롬으로 인해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서구와 전통간의 분열 양상의 극복과 이념에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17)
이 두 가지 측면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있어 ‘모노크롬’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김복영은 이를 형식에서는 평면주의로 요약했으며18) 이는 다시 말해 회화의 가장 근원적 조건인 구조로서의 평면의 개념을 자각함으로써 한국현대미술이 결여하고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대성(modernity)을 성취했다고 언급하였다.19)
결론적으로 김복영의 ‘평면주의’, 이일의 ‘내재적 모노크롬’, 오광수의 구조로서의 ‘평면주의’와 정서로서의 ‘단색주의’는 평면이라는 구조적 형식과 동양적 정신성이라는 내용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는 단색화에 대한 평가로 압축된다.20)
그러나 한국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평가는 일본인들의 시각에 의해 색다른 특성을 돌출하게 되는데 이는 1975년 동경화랑에서 열린 《다섯 개의 흰색전》21)과 동경 센트럴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단면전》’22) 에 의해 한국현대미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일본인들의 시각에 의해 새로운 분석이 시도되었다.
특히 《다섯 개의 흰색전》에서는 흰색을 기조로 한 다섯 명의 현대작가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중심 경향으로 모노크롬 회화가 소개되었고 이는 특히 ‘백색’을 통한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 전시를 본 일본의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백색 모노크롬 회화를 한국적 미의식 및 한국적 정체성의 획득으로 의미 부여하였다.
백의 민족이나 조선의 백자를 연상시키는 백색은 정신성에 대한 표상이자 민족적 특질을 대표하는 강력한 기호로 내세워졌다.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으로 한민족의 정신을 표상하는 색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모노크롬이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색채주의 아니라, 그들이 회화에 대한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23)이라 말했으며 이일은 이를 다시 ‘초(超) 색채주의’로 정리하였다.24)
그렇다면 색채를 뛰어넘은 동양의 정신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당시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연과의 합일’,‘자연에의 순응’을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
당시 화가들은 자연과의 합일이 동양의 도교적 전통을 의미하며 이것은 동양적 정신성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정치 사회의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동화, 자연의 사색, 그리고 자연의 광대함 속에서 인생사의 덧없음을 느끼며 하나의 도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주목하였다. 모노크롬 미술가들은 그들의 화면이 물질적, 감각적인 세계 너머의 무한에로 확산되는 공간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으며, 그 공간은 정신공간이면서, 더 원초적인 것, 즉 자연에로의 회귀, 자연의 생성과 동화에서 태어나는 세계라고 말했다.25)
이러한 자연에로의 회귀는 작품 창작에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복적 행위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작가마다 그 기법과 의도, 그리고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공통되는 점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복적 행위를 토대로 하여 작가가 일정의 ‘무위’의 상태에 접근한다는 점이며, 보는 이에게도 이러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26) 이렇듯 서구의 미니멀 아트가 사물 그 자체로의 환원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갔다면 우리의 모노크롬 회화는 비물질화등을 통한 정신적 차원을 추구하였다.
평면이라는 회화의 근원 조건으로 환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신성으로 접근함으로써 모노크롬은 평면이라는 구조적 형식과 동양적 정신성이라는 내용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3) 오광수, 서성록 공저, 같은 책, p.290.
14) 오광수, 「70년대 한국미술의 비물질화 경향」, 『한국 현대미술의 미의식』,1997, p.59.
15) 오광수, 서성록 공저, 같은 책, p.292.
16) 이일, 『현대 미술의 시각』, 미진사, 1985, p.373.
17) 김복영, 『현대미술연구』, 정음출판사, 1985, p.160 이 글에서 김복영은 1970년대에 우리의 근대적 시각이 비로소 질적으로 개화된 것으로 정의하였다.
18) 오광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한국현대미술의 비평사』, 미진사, 1988, p.176.
19) 김복영, 「현대미술에 있어 모더니즘과 AG 운동」, 1992, p.125 참조, 김복영,『현대미술연구』, p.160, p.171 참조.
20) 오광수, 앞의 책, pp.176-177.
21)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 이동엽이 출품.
22) 김창열, 김기린, 권영우, 김구림, 김용익, 김진석, 박서보, 박장년, 서승원, 심문섭, 윤형근, 이강소, 이동엽, 이상남, 이승조, 진옥선, 최병소, 이우환, 곽인식등 총 19명 참가.
23) 오광수, 「70년대 한국 미술의 비물질화 경향」,『한국 현대 미술의 미의식』, 재원, 1995, p.71.
24) 이일, 「한국현대미술의 위상 -70~80년대를 중심으로-」,『에꼴 드 서울 20년·모노크롬 20년』, 1995, 관훈 갤러리.
25) 김영나, 「현대미술에서의 전통의 선별과 계승 : 1970년대의 모노크롬 미술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 『정신문화연구』, 겨울호, 2000, pp.38-39.
26) 윤난지,「형태반복의 방법과 의미」, 『에꼴 드 서울 20년·모노크롬 20년』, 서보문화재단,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