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본론
2. 안상철의 오브제 실험
안상철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전을 통해 화단에 입성한 작가이다. 그가 국전 경력은 실로 화려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구(丘)>(도3)로 입선, 1956년 제5회 국전에서 <전(田)>(도4)으로 문교부장관상,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정(靜)>(도5)으로 다시 문교부장관상,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잔설(殘雪)>(도6)로 부통령상, 1959년 제8회 국전에서 <청일(淸日)>(도7)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화려하게 등단했던 안상철은 그러나 안정된 작가로서의 생활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조형어법을 찾아 실험을 매진한 작가였다. 그는 남화와 북화 전통의 결합을 탐구한 결과로 안료를 크라프트지에 쏟아 부어 우연의 효과를 바탕으로 한 수묵담채화들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목련 A,B>(도8, 9)는 이러한 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평생 자기변화의 열망을 지니고 살았던 안상철은 수묵채색화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말년에는 암석과 고목으로 시도한 완전한 입체조형 작품에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어 움직임과 빛과 음향까지 작업에 도입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안상철의 작품들은 별도의 설명 없이도 한 사람의 작가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다다르고자 한 예술의 경지를 보여 준다.
안상철은 다작의 작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과작에 속하는 작가였지만 언제나 진일보한 조형적 탐색을 제시한 작가였다. 그가 남긴 오브제 작품을 일람해 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최초의 오브제 작품인 1961년작 <몽몽춘(朦夢春)>(도10)을 비롯해서 1962년부터 해를 거듭하면서 암석과 고목의 다양한 변이를 보여 준 <영(靈)>시리즈가 있다. 우선 <몽몽춘>은 가로로 좁은 폭을 가진 세로형(242x50cm)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안상철은 화선지와 돌을 한 화면 안에서 보여주는 과감성을 제시하였다. 자유로운 필획과 드리핑 기법으로 화면의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들을 직접 붙인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안상철이 서구 모더니즘,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나 앵포르멜사조 등의 주요 개념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 이해를 바탕으로 그가 몸담고 있는 전통회화의 전면적 혁신을 꿈꾸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몽롱한 봄의 경치를 꿈꾼다'는 작품 제목은 불확실성 속에서 전통 회화의 또 다른 차원을 꿈꾸려는 작가 의도의 은근한 비유법은 아니었을까?7) 이 작품은 당시 화단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몽몽춘> 이전 안상철이 국전을 통해 이룩해 놓은 수묵화가로서의 뛰어난 기량이 사장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부정적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안상철은 <몽몽춘>을 통해 기존의 수묵화가 지닌 수구적 전통과 관념에서 탈피하여 오브제를 이용한 물질 자체의 형상화를 꾀했으며 이를 통해 이차원의 평면공간을 삼차원의 입체공간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획기적 계기를 우리 전통 화단에 마련해 주었다.
<몽몽춘> 이전에 작가는 이미 <만염몽>(도11)8)이라는 작품을 통해 수묵의 자율적 표현성과 추상성을 탐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제9회 국전에서 발표되었던 이 작품은 묵선과 점만으로 균질화된 화면을 구성하였다.
당시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구 미술사조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아울러 전통회화에서도 수묵 중심의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경향주9)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은 안상철이 실경풍의 풍경화에서 <만염몽>으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게 되는 간접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염몽>을 제작하게 된 직접적 동인은 작가 자신의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안상철은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모더니스트’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자각은 안상철로 하여금 학연, 지연으로 연결된 단체활동을 회피하게 하였고 독자적 작품 활동에 주력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10)
1962년 안상철은 <영62-2>를 제작,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후일 논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필자는 1962년부터 적극적으로 입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화면을 3층으로
만들어 부피를 일척 정도로 반입체화하여 바위를 나열하고 화면에 구멍을 뚫고
이중·삼중의 깊이를 만들었다. 바위와 화면에 백록 등 동양적인 채색을 가함
으로써 동양적인 감성을 다분히 느끼도록 하였다. 계속하여 1966년까지 매년
바위를 주제로 한 <영>의 연작을 발표하였고 1971년에는 장방형이라는 화면
의 상식을 깨뜨려 부채꼴로 바꿨다...(중략)...부채꼴을 전과 같이 부피가 있는
반입체로 만들었고 액자를 없애고 바위를 부착시켰다.”11)
<만염몽>에서 시작된 추상실험이 <몽몽춘>, 더 나아가 작품이란 ‘영적인 생명력’을 내포해야한다는 신념에서 제작한 <영>의 시리즈로 연결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내용은 1970년대 중반까지의 작업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후 전개된 완전입체에 대한 내용은 살펴볼 수 없지만, 안상철의 입체적 조형실험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향으로 추구될 지를 예상할 수 있는 시사점이 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영> 연작은 모두 7점으로 62년 작품을 비롯해 70년대에 제작된 부채꼴 형태의 작품들 그리고 고목을 등장시켜 완전 입체를 실현한 70년대 이후 91년까지의 작품이 망라되고 있다. 이 중에 언급하여할 작품으로 <영-74>(도12)와 <영-89>(도13)가 있다. 전자의 작품은 반듯한 받침대위에 고목으로 하나의 환경을 조성한 작품이다. 제23회 국전에서 안상철이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한 이 작품은 드디어 이 작가가 완전한 입체 조형의 차원을 개척하였음을 보여 준다.
후자의 작품은 큰 고목 덩어리에 부분적으로 작은 고목을 붙여 오브제로서 활용하고 모터를 장착해 움직임을 유도했으며 부분적으로 조명을 이용해 빛을 끌어들인 작품이다.12) 안상철은 <영>시리즈에서 에서 원초적 풍경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영-90>(도14)에서는 뱀처럼 길게 뻗은 고목의 형태감을 표현하였고 <영-91>(도15)에서는 기념비적 스케일로 작품을 착안하여 마치 우주의 흐름을 고목의 숨결 위에 투영시키고자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자신의 논문에서 안상철은 자신의 작업을 “자연속에 존재물, 특히 돌과 나무의 온갖 표정에 매혹되고 그것을 대담하게 화면에 클로즈업하거나 형상화시켜 입체공간으로 더욱 확대 시켜 나갔다”라고 요약하기도 하였다.13)
7)최병식, 「안상철의 생애와 예술」, 『연정 안상철 작품집』, 예서원 , 1993, p. 10
8)김경연, 1950년대 한국 수묵화의 추상적 경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청구 논문, 1993, pp. 61-62 <만염몽>같은 작품이 제작되게 된 데에는 당시 수묵화에 불어닥친 추상적 경향의 유행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연은 김기창, 박래현, 이응로, 안상철, 안동숙, 권영우 등이 이런 경향을 선도했는데 이들 작가들은 서양화 재료를 적극적으로 실험하였으며 수묵의 표현성을 새롭게 인식하였고 ‘동양화’의 개념에 대한 비판을 대두시켰으나 결론적으로는 추상회화의 유입이 곧 전통회화의 현대적 창조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켜 새로운 형식의 수용이 작가 자신의 내면화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 안상철, 「한국 동양화 비구상의 발전과정 연구」, 『성신여대연구집』, 1974, p. 382
9)1957년 <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협회> 등이 결성되고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작가초대전>, 덕수궁돌담길에서의 <’60년 미술가협회전> 등이 열려 새로운 시대의식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의 발아가 시작되었다.
10)전통회화 분야에서는 기성작가들을 중심으로 1957년에 결성된 <백양회(白陽會)>와 서울대 출신의 청년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1960년 결성한 <묵림회(墨林會)>가 수묵화의 새로운 추상경향을 주도하였다 ; 김경연, 앞의 책, pp. 154-156 ; 홍선표, 광복 50년, 한국화의 二元구조와 갈등, 미술사연구 제9호, 1995, pp. 319-321
11)<묵림회>의 경우 서울대 출신 동문들의 모임이었으나 의견차이로 안상철은 참여하지 않는다. 1962년 박노수 등 한국화가 36명의 친목도모형식의 단체였던 <청토회(靑土會)>가 결성되고 안상철은 창립전에 <영-62-2>를 출품하지만, 이 역시 적극적 단체활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12)안상철, 전게서, p. 383
13)빛과 움직임에 대한 관심은 안상철이 1991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전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이지은, 이미지의 장소 : 회화에서 가상현실까지, Visual 2003 vol. 2,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p. 61 이 논문에서 필자가 밝히고자 하는 논점은, 전통적으로 이차원의 캔버스 안에서 다뤄지던 이미지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비디오 동영상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가상현실 공간으로 확장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전개시키기 위해 필자는 매체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매체의 특성에 대한 강조의 결과로 초래된 회화의 사물성(objethood)은 캔버스의 틀을 넘어서 관람자를 작품의 주요한 요소로 포함하는 설치미술로의 확장을 이끌어 내었다.” 안상철이 오브제미술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동기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