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본론
3. 오브제를 통한 "영(靈)"의 추구
안상철의 입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가 “영(靈)”이라는 주제의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이 주제의식을 암석과 고목이라는 독특한 ‘오브제’의 사용으로 실현했다는 점이다. 우선 안상철이 추구한 “영”이란 무엇이었을까?
“영”이라는 주제에 대해 작가는 다음의 글을 남겨 놓았다.14)
“사람에 있어 靈이란 육체 내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동안 지니고 있다가
육체는 죽더라도 남아서 누군가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靈은 확실히 인간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주의
원동력과 같은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靈의 무수한
태어남이 이어져서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민족성이 오랜 세월동안에
이루어지고 그것이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리라...(중략)...이들 자연이나
사람이나 우주나 모두 눈에 보이지 않은 에너지에 의해 지탱되고 성장하고
번식하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物質을 지탱하는 것은 靈인
것이다.”
위에 글에서 우리는 ‘영’에 대한 작가적 해석과 만날 수 있다. 흔히 종교적으로 이야기되는 인간의 신체에 대비되는 ‘영’이나 ‘혼’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가 인식하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주는 에너지로서의 ‘영’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15)‘영’의 주제는 <영62-2>이후 작가가 작고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수묵채색화 작업이 병행되었지만, 작가의 내부에서 조형의 실험성에 대한 탐구와 열정이 강하게 대두될 때마다 ‘영’의 주제는 반복되면서 심화되어 나갔다.
암석이나 고목은 어떤 다른 오브제보다도 자연주의적 동양정서를 드러낸다는 점과 오랜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간직하는 영원성의 상징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연정 안상철의 작품을 연구한 김은은 안상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암석과 고목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썩어서 패이고 떨어져 나간 고목은 단순한 무기물질일 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곳에서 생명력을 키워내는 영적인 존재로 해석된다. 이는 화가의 정신
이 물질과 합일된 개성 있고 실험적인 조형작업의 가치로서 당시 동양화단에
충격적인 행위였고, 앞으로의 한국 입체추상발전에 있어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16)
서양미술에서 오브제의 개념은 일상적, 합리적인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방식을 일컫는다.17)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에 의해 다양하게 실험된 오브제의 가능성은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사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물이라는 개념”을 획득하게 됨으로써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 내었다.18)
안상철에 있어서 ‘암석’과 ‘고목’은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았던 ‘영적 에너지’를 형상화 할 수 있는 구체적 대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안상철의 관심이 우연히 시작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입체작품을 대하는 사람 중에는 종종 일본의 ‘메마른 산수(枯山水)(도16)를 연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돌만으로, 돌의 추상성을 끌어내어 조형적 완성을 이룬 일본의 전통 미의식과 안상철의 미의식이 같은 바탕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生得의 산수’, 즉 ‘그 돌이 바라는 바대로’ 돌을 세우라는 일본의 전통 정원의 이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19)
작업하는 일 외에 ‘분재’에 심취했던 안상철의 미적 욕구가 ‘암석’과 ‘고목’이라는 대상을 만나 이룩한 결과가 <영>의 시리즈이다. 안상철은 서구인과 달리 동양인은 정신적 사고에 의해 자연을 보아 왔으므로 그 결과로서 영적인 생명을 내포한 표현을 해야하며 그런 의미에서 동양화는 서양화보다 앞서서 추상성을 내포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옛 그림의 이상적 산수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안상철의 <영>시리즈는 그의 이러한 조형의식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오브제인 암석과 고목을 선택하고 이를 조형화 하는 작업 속에는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과정의 중요성과 오브제의 상징성 그리고 조형요소의 요체를 추출해 내는 추상성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14)안상철, 전게서 p.397
15)안상철, 「‘靈’에 대한 단상」, 『공간』, 1978. 12.
16)김 은, 然靜 安相喆에 관한 硏究-安相喆 作品을 中心으로,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청구 논문, 1992 p.43 필자는 “「영」에는 연정의 영혼과 그가 추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 그리고 존재의 기원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접하면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서 오는 기쁨을 노래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희구하는 인간의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는 자연주의를 느낄 수 있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안상철에게 있어 ‘영’의 주제는 자연주의의 소산임을 강조했다.
17)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엮음, 1999, pp.339-340
18)한스 리히터 Hans Richter, 다다-예술과 반예술, 김채현 옮김, 미진사, 1994, p.81 ;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p. 167 ; 김철효, 「20세기 회화사에서 본 꼴라쥬와 오브제의 개념 및 그 전개」, 성신여대 석사학위 논문, 1983, p. 87
19)쓰지 노부오 지음, 이원혜 옮김, 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日本美術の見方), 시공사, 1994, pp.8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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