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백남준과 비디오
2.비디오와의 만남
동경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간 백남준은 1956년부터 독일 뮌헨대학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던 1958년 여름 다름슈타트의 국제 현대음악 하기강좌에서 존 케이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어서 쾰른대학으로 전학하면서 WDR(Westdeutsche Rundfunk) 전자음악스튜디오에 다니게 된다.
당시 쾰른, 뒤셀도르프 등 중서부 지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후 독일의 낙후된 문화를 새롭게 끌어들이려는 분위기였고 특히 아방가르드의 실험적 운동에 관대한 분위기였다고 요하네스 클레더스(Johannes Cladders)는 회고한다.5)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플럭서스’라는 명칭의 소그룹이 형성되었고 그 참여작가들의 유대감에 기초한 실험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핵심부에 백남준이 위치하고 있었다.
1962년 ≪플럭서스 -신음악 페스티벌≫을 비롯하여 각종 퍼포먼스에 활발히 참여하던 백남준은 1963년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역사적인 최초의 비디오아트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 제목이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도판5,6)이었다. 화랑 입구에 소머리를 걸어두고 갤러리 여기저기에 각종 기자재를 늘어놓은 어수선한 분위기의 이 전시회는 단지 그 재료로서 ‘조작된’ TV가 사용되었고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비디오 아트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로 기록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전시에서의 소위 ‘조작된’ TV의 등장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로 평가되지 않았으며 그저 이 괴짜 동양인의 새로운 퍼포먼스 소품 중 하나 정도로 여겨졌다.6) 아직까지는 TV화면의 현상적 특성을 적극적인 미학적 표현수단으로 여기기보다는 우연성에 입각한 간단한 조작과 브라운관의 주사선을 방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소극적인 효과를 시각적으로 이용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시 이후 TV 모니터야말로 백남준의 등록상표가 된다.
백남준이 자신의 작업으로 도입했던 TV는 다다의 우연성, 존 케이지의 음향실험 등 실험적 예술방식의 새로운 확장을 의미했다. 어떻게 보면, TV 모니터라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 가장 밀착하고 있는 매체를 선택하게 된 것 자체가 뒤샹의 레디메이드 혹은 예술의 대중화라는 플럭서스의 교조에 힘입은 것일 것이다.
또한,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부수는 식의 파괴적인 행위가 숨기고 있는 비판적인 의식이 텔레비전에까지 투영되어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7) 백남준 자신조차 스스로 ‘황화(黃禍)’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달고 다닌 그의 성향을 기억해야만 한다. 여기에 백남준이 성장한 부잣집 특유의 최신문물에 대한 왕성한 관심과 실험적인 분위기 역시 한 몫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8) (도판7)
그러던 중 1965년 10월 백남준이 최초로 비디오 녹화기를 구입하게 되었고,9) 1964년 잠시 일본에 머물던 기간에 일본인 기술자 수야 아베와 함께 개발하기 시작하여 1968년 WGBH 방송국 프로그램 제작을 기하여 완성한 ‘비디오 신디사이저’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노아르처럼 화려한 색채로,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록처럼 격렬하게,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인” 비디오미학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10)
1973년작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는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백남준 특유의 비디오미학을 거의 완결된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당시 미국 비평가 캘빈 톰킨즈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과격했던 종전의 태도와는 달리 어떤 선언도, 주장도 야단법석도 없이 비디오를 예술형식으로 승화시키려던 생각에 충실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가진 회고전을 계기로 그는 공식적으로 국제적인 비디오 작업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비디오 설치작업은 처음부터 쌍방향 소통(interaction communication)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처음 ≪음악의 전시≫에 출품한 <조작된 TV>연작에서, 그리고 그 뒤의 <마그네틱 TV>(도판8)와 <음성변조> 등의 작업에서 관람객의 참여는 중요한 작품의 요소가 된다. 이는 그가 1960년대 초부터 함께 활동하던 플럭서스 퍼포먼스와 존 케이지의 선철학, 그리고 뒤샹의 우연성의 미학을 한 데 버무려놓은 것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백남준에게 있어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자체는 민주성(특히 공중파를 이용한 무차별적인 소통)과 폭력성이 동시에 잠재되어 있는 가장 복합적인 소통수단이었다.
5)요하네스 클래더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콜라쥬다” (인터뷰), 『독일 플럭서스 1962-1994: “매듭 많은 긴 이야기”』 (전시 소책자) 2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pp.36-37
6) ‘prepared piano’, ‘prepared TV’ 식으로 사용되는 ‘prepared’라는 단어는 ‘준비된’, ‘조정된’, ‘조작된’, ‘장치된’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된다. 특히, TV와 관련해서는 이 단어는 오브제에 미리 기술적으로 변형을 가해놓았다는 의미가 강하므로 ‘조작된’ 정도의 번역이 무난하리라 생각한다.
7) 1972년 제작한 ‘전자오페라2’에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것에 불편한 반응을 보였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얘기를 듣고 “그렇다면 성공이다. 나는 이 기회를 부르주아의 문화적 가치로 전락한 고상한 서양 전통음악에 대하여 저돌적인 발언을 하고 싶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용우, 앞의 책, p.175)
8)<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에 등장하는 사진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들이 남장을 하고 단체사진을 찍는 등 장난기 많은 가족의 특별한 성향을 보여준다.
9)백남준은 소니가 미국시장에 수출한 첫 비디오 카메라를 구입한 장본인이었다. 백남준은 소니의 수출계획을 알고는 당시 록펠러재단에서 받은 매체연구기금 가운데 일부를 할애하여 선금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카메라가 케네디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찾으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황의 방문장면을 카페 오 고고(Cafe au GoGo)에서 첫 상영하였다. (이용우,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 p.166)
10)이용우, 앞의 책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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