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0세기 미술전

유준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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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20세기미술전(1975-1987)
「외부로부터의 위협」
프랑스 미술의 25년
평 가

프랑스20세기미술전 1975∼1987전 개막식

프랑스20세기미술전 1975∼1987전 개막식
왼편으로부터 미셀(문화원장), 파르시(담당관)
포르크노(프랑스대사), 정한모(문공부장관), 조경희(정무장관), 이경성(국립현대미술관장)
이대원(운영자문위원회장)

1988년 5월 26일부터 6월 25일 사이에 개최된바 있는「프랑스20세기미술 1975-1987전」 은 1986년의 신축미술관 개관기념전의 후속편으로 조직된 전시유형이었다. 이 두 유형의 전시회는「프랑스20세기미술전」이라는 전시명이 말해주듯이 20세기 프랑스미술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도로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앞으로의 기술을 위해 86년도의 전시를「전편」이라 칭하고 88년의 그것을 「후편」이라고 칭하면서, 이 전시의 기획경위와 성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 일러두기

1986년은 한국과 프랑스가 국교를 수교한지 백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으며, 이것을 기념하는 예비행사의 하나로 한불문화협회초청으로 P·레스타니씨가 방한한바 있었다. 주지하는대로 레스타니는 60년대초의 누보·리얼리즘을 주도했던 평론가이며, 20세기말의 산업소비사회의 사회현실을 바로 예술표현의 주요수단으로 제기했던 인물이다.

1985년 12월 28일 국립현대미술관회(덕수궁)가 마련한 초청강연회에서 레스타니는 프랑스문화의 *학예 연구실장 실정을 다음처럼 요약한바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미술교류의 긴밀한 우호국이었다는 점. 그러나 프랑스의 문화가 인류에게 유익한 문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점. 레스타니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작금의 프랑스미술은 외부로부터위협을 받고 있으며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야겠다는것.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프랑스인인 자신이 자국의 미술문화를 부정적으로 또는 절망적으로 정의 한다는 뜻은 아니며, 효과적인 정보역할을 위해 사실 그대로를 알려드린다는 것이었다. 그의 결론은 한불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미술교류에 있어서의)를 감안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프랑스 미술을 신뢰하고 도와줄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맺었다.

이상은 「프랑스20세기미술전」과 직접 관계가 없는 보고이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선 문 화교류에 관한 실용적 인식과 구체적인 검토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 되기에 기록해둔다. 한불미술교류는 80년대 전까지는 일종의 짝사랑같은 환영이었던게 사실이며, 해변가에서 바다 너머의 미지세계를 추상적으로 동경하는 소년기의 환각상태 에서 아직 한국예술이 못 벗어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1926년의 이종우의 도불과 2류급 전시회로 전락된 사롱·도톤느에 십호 크기의 정물화가 입선했다는 것으로 한국근 대미술사가 기술되기 시작하는 관례는 어떻든 지양되야만 하기 때문이다.

P·레스타니가 말했던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의구심」은 어떤 문화권에도 해당되는 말이며, 한나라의 문화사가 편국적(파로우키얼)인 역사(고립의 역사 또는 자가당착의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세계문화의 구성단위가 되는 도정으로 받아들여야 되겠기 때문이다.

레스타니가 말하는「외부의 위협」은 20세기초부터 그 빌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북방적예술요인으로서의 정신주의를 가리키고 있으며 근자의 경향으로는 영어권 미술세 계에서 활발하게 제기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P·레스타니는 물론 80년대의 기수는 아니다.

그러나 지식은 변해도 지성은 불변이라는 프랑스적 에스 프리의 소유자였으며, 세계미술의 변두리나 다름없었던 한국에 뒤늦게나마 그가 찾아왔 다는건 그만큼 한국의 문화적 잠재력이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거와 같았다.

물론 이러한 관심은 순수하게 예술적이기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선진 대열을 뒤쫓기 시작한 한국사회속의 예술적 잠재력과 그 사회적교섭의 가능성에 대한 세계시장의 반응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G·카스의 말처럼 「현대의 사회는 예술속에 있는 사회적기능을 중시하는 경향에 있다」고 할때 오늘의 한국사회야말로「사회성을 갖는 사실」로서의 문화권의 하나로 지목되기 시작한건지도 모른다.

어떻든 80년대와 한국미 술계는 세계적관심의 실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던건 사실이었다고 하겠으며, 86년의 아 시안게임과 88년의 올림픽등 인류축제를 앞두고 새로운 미술시장으로 지목된바 있다.

◎ 경과(1)

88년도의「프랑스미술전」에 앞서 개막된 86년의 「전편」의 성립경과를 참고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6년 2월초 과천에 신축중인 국립현대미술관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관장 김세중씨는 이화대학교의 정병관교수와 함께 전시교섭을 위해 파리를 방문 두차례의 회의를 갖는다.

  ● 1차회의(1986. 2. 18(화) 10 : 00-11 : 30)
 1) 한국측 ; 김세중, 정병관. 김인중(체불중의 신부이며 화가)
 2) 프랑스측; Y·Mabin(외무성 예술진흥국),M·Collette여사(조형예술과직원) B·Antonioz
     (문화성 예술창조국 감사=지한파이며 한국유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줌)
 3) 회의 내용
   (ㄱ)전시회명칭
   (ㄴ)전시유형 및 선정위원선출
   (ㄷ)작품수, 운송, 보험등
   (ㄹ)합의서채택

 ● 2차회의(2. 20(목) 10 : 00-12 : 30)
 1) 한국측; 전과동일
 2) 프랑스측 : B · Antonio
D·Heude 여사(프랑스미술관흥국학예직 )
M·Collette 여사
C·Contensu 여사(파리시립근대미술관)
A·Paquement씨 (퐁피두현대미술관 학예직)

3) 회의 내용

(ㄱ) 전시 유형
뒤뷔페의 「루울루프」










1제1전시실에 하적된 출품작품.
뒤뷔페의 「루울루프」가 보인다.


20세기 프랑스미술전인만큼 금세기초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미술가들 가운데서 20 세기 전반기의 프랑스미술을 장식했던 99명의 작가를 선정, 이것을 다시 1900-1950년 사 이의 시기로 구분했고, 포비즘, 큐비즘, 다다이즘, 슐리얼리즘, 추상창조, 에콜·드·파리로 유형화한 다음 25명의 작가를 선정. 이상을「20세기프랑스미술전·제1부」로 정하고「2부」 는 1950-현재까지 활동했던 74명의 작가 가운데서 표현주의, 코브라, 서정추상, 시네티즘, 누보·리얼리즘, 신구상, 슈폴·쉴파스, 개념예술, 자유표현, 신표현주의(독일과 이태리) 그리고 조각분야로 유별하여 여기 해당되는 작가 또는 작품을 선정.

(ㄴ) 이상에서 보는바처럼 「20세기 프랑스미술전」은「1부」와「2부」로 나누어 개최한다는데 우선 양측은 동의했으나 작품대여, 보험료, 운송등의 실제문제로 인해「1부」 의 유형을얼마간 수정하여 개최할것을 양측은 합의한바 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출품작가는 피카소,마티스, 맛송, 안따이, 로랑스, 폴리아코프, 아르뚱, 쑤라즈 그리고 뒤뷔페등의 9명이었다.피카소와 마티스는 조각작품을 출품했고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원조로 지목되는 맛송과입체파조각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로랑스의 조각작품 그리고 슈폴쉴파스의 선구로 평가 되는 안따이의 작품들을 서울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뒤뷔페였다.

1986년 8월 26일 개관기념전으로 개막된 이 전시는 10월 31일까지 개최되 었으며, 같은 기간동안에 전시된 와이즈맨소장품전과 아시아현대미술전(아시안게임의 축하전)등으로 신축미술관의 전시공간은 거의 여백이 없는 정도였다.「전편」은 제7전시 실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전기한 뒤뷔페는 가장 충만된 대량의 작품을 보내왔기 때문에 특별히 수용해야 될 전시공간을 필요로 했다.

뒤뷔페는 기념사업단이 적극적으로 관여 했으며 17점의 회화와 7점의 거대한「루울루프」그리고「크로스리·팔바라」의 예술환경을 기록한 대형판넬의 사진 7점을 보내왔던 것이었다. 이것은 뒤뷔페연구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루울루프」는 렘프코아와 중앙홀에 나누어 설치전시했으며 회화작품은 제1전시실의 일부를 파티션으로 차단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고한바처럼 「전편」은 86년 2월 파리에서 회동한 양측대표간의 합의사항 이었던「1부」에 해당되는 전시유형으로서의 「20세기프랑스미술」인 것이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피카소와 마티스는 조각작품이었고 로랑스, 맛송, 안따이등 한국인에겐 대체적으로 생소한 이름들의 작품을 통해 황혼기의 파리화단의 경과를 목격하게 했으며, 전후의 프 랑스미술을 다시 한번 지난날의 태양빛으로 빛낼듯이 보였던 이른바 뜨거운추상(타피에)의 기수들 아루뚱, 플리아코프, 쓰라즈 그리고 프랑스적인 시대표현이었던 뒤뷔페등으로 구성된게 「전편」의 성격이었다.

이것을 시대별로 구분하면 1950년대까지의 프랑스미술의 동향을 서술적으로 또는 학술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구성한 전시유형이었다고 하겠 으며, 86년의 회의안건이던「2부」가 자연스럽게 숙제로 남게되며 88년도의 「후편」이 개 최되기에 이른다.

끝으로 첨가하여 일러둘것은「전편」의 입안자였고 신축미술관을 위해 병고를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오던 김세중관장이 개관 이개월전인 6월24일 강남성모병원에서 이승을 하 직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