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0세기 미술전

유준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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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20세기미술전(1975-1987)
「외부로부터의 위협」
프랑스 미술의 25년
평 가

⊙평 가

이상 8명의 작품으로 구성된「프랑스 20세기미술 1975∼1987」전은 1988년 5월 26일부터 6월 25일 사이인 일개월간에 걸쳐 제7전시실과 제1전시실 일부에서 전시된바 있다. 최종 집계로 나타난 관람객수는 14,792명 이었으며, 하루 평균 오백명정도가 관람한게 된다.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물론 관람객수를 가지고 전시회의 성공여부를 판별한다는건 문제가 있지만, 고무적인 현상이랄수는 없다.

미술의 전시는 하나의 사회적 교섭을 통한 예술감정의 유발을 동인으로 드라이브되는 거며, 작품의 연출(엑세큐션)을 하나의 독자적인 기능으 로해서 도출되는 현대사회의 문화역할이라고 할때, 재검토해야 될 문제점들이 있다고 하겠다. 전시회는 여기 모여드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미술가가 아니더라도,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된다는데 대해서 주의해야 되기 때문이다.

사회성을 갖는 사실로서의 미 술현상이 생동적으로 환기되는 곳이 바로 전시장이다. 이 경우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미술 지식이 전제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재검토 되야 할 문제점들도 다음의 사항이 지적된다.

ㄱ) 미술관 진입로의 조속한 개선책 : 이것은 절대명령으로서의 우선과제이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반듯이 시정되야 한다.

ㄴ) 홍보활동의 미비점. 미술홍보가 다른 선전활동과 구별되는 점은 관중의 감정적전념을 예술의 훈도로 유발시킨다는데 있음을, 대중심리학 내지는 여론통계의 입장에서 연구개발할 필요가 있다.

ㄷ) 강연, 해설, 심포지움등의 교섭을 통한 미의식의 확산. 전시회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관중이며, 손님이 없는 주인행세는 자가당착으로서의 고립밖에 남는게 없다는 점을 자성해야겠다.

이번 전시를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의구」라는 P·레스타니의 말을 인용하면서, 프 랑스미술의 세계적 위치를 정위해보려 했던것은 그런대로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도 지적 한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프랑스미술을 정점으로하는 미술의 중화사상 또는 사 대주의에 젖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예속심리로 설명될 수도 있다. 어떤 예술도 처음에는 독자적인 토양으로부터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성장하는 거며, 이것이 자라남에 따라 외계로 가지를 넓히게 되고 인접문화권과의 교섭을 통해 확대된 지표의 넓이를 굽어보게 된다. 이 말은 프랑스의 향기로운 예지 R·위그의 말이다.

오늘의 한 국미술도 외계를 굽어볼 만큼 성장했으며, 자신의 시각에 대해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만큼 성숙했다는 자부의 인식을 가져야겠다. 일방적인 연정은 상대에게도 무례하지만 자신에 게도 해롭기 때문이다. 한국미술의 개화가 전통적으로 프랑스미술에 대한 편애로부터 싹트기 시작했었다는 연고를 감안할때 이점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오늘의 프랑 스미술의 세계적 지위가 그전만 못하기 때문에 별 볼일 없다는 걸 강조하자는건 아니다. 양국간의 유대를 철없는 순수애정(푸로퍼어펙션)만으로 짝사랑하기에는 우리가 성숙했 다는걸 자각해야겠다는 것이다.

이번 8명의 작가가운데서 J·알베로라는 자유구상파(프랑스의 신표현주의)시절 가루 스트(Gerard Garoust 1946-)보다는 인기가 높은 작가였다. 둘은 모두 신화와 전설적인 소재를 다루던 자유구상파였는데, 가루스트가 뉴욕의 레오·카스테리에 의해서 발탁되어 그의 작품이 고가로 팔린적이 있다.

카스텔리는 전후의 세계화단을 주름잡던 화상계의 실력자이며 미국의 액션페인팅을 세계미술시장의 총아로 부상시킨 대부이다. 이러한 그가 프랑스적인 표현주의작 가운데서 가루스트를 지목하여 「그의 발견은 80년대 미술 가운데서 획기적인 발굴이었다」고 공언한 건, 미술의 세계여론을 주도해온 프랑스의 자부심을 상 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독단적인 추리이지만, 세계미술의 오늘적인 현상과 그 기상예보로 비겨볼때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번 「후편」에선 자유구상의 작가들이 모두 배제되었으며, 전기한 가루스트를 위시해서 F·부와스롱, 루이칸느, 로자, 부랑샤르, J-C ·브래, F·마르텡등이 보이지 않는다. 알베 로라는 전기한바처럼 에노쉬베르그와 공동제작한 사진기록물이었으며, 콩바가 유일한 자유구상에 속하는 작가였다. 이것은 독일과 미국 그리고 이태리등지에서 80년대에 일 반화 되었던 표현주의의 추세를 상대적으로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번의「후편」은 세계적 추세하고는 별도의 또 다른 현대미술을 프랑스미술을 통해 보여준다는 의도가 선행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되며, 상대적으로 한국미술의 입지여 건이 그만큼 세계여론의 외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르게 말해서 한국은 아직도 미술정보의 일방적인 수용국에 불과했다는 거며, 이 민족이 이룩한 경제 적 성공과 올림픽이라는 세계인의 축제마당에서 어떻게 하면 프랑스미술의 진수를 보여줄수 있는가가 「후편」의 주요 구성요인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상의 가정은 미술전시의 국제적 교류 내지는 사회적 교섭을 순수하게 미적상태로서만 조성되는게 아니라, 사회통계학적인 효율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미술을 수단으로 하는 국가이익이 전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의 가치가 추상적 보편의 파급력을 가지고 모든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다는건 어쩌면 환상일는지도 모른다. 전시회가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 환기되는 미술의 잔치를 뜻한다면, 그러한 축제(패스티발)의 고 양은 구상적 보편의 분위기로 유발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즉 미술의 국제적 교류는 미술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그것을 축제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관중심리의 유발원을 어떻게 예측하고 유도해야 하는가에 따라 그것의 평가가 좌우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번 「후편」에서 우리가 배우게 된건 이러한 전시구성의 효율인거며, 앞으로 보다 발전되는 기획을 위해 진지한 자성이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