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전시디자인
1949년 발표된 「상호현실주의 선언」은 그의 상호현실주의 이론을 집대성하는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프리-포름>을 다루고 있는데 <프리-포름>은 미술관 관람객의 휴식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의자였으나, 후에 좌대 등의 용도로 쓰이게 된 다목적 가구이다. 30)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가 <공간주택>과 같은 건축이나 <움직이는 가정용 책꽂이>와 같은 가구디자인 뿐만 아니라 화랑의 전시공간설계 및 전시디자인에도 상호현실주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42년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화랑 및 1957년 ‘월드 하우스’ 화랑의 전시공간설계, 초현실주의 국제전의 <미신의 방>(1947) 및 ‘피의 불꽃’ 전의 전시디자인 등도 상호현실주의 개념에 입각해 디자인된 것이다.
1942년 그는 페기 구겐하임의 요청에 따라 뉴욕 금세기 화랑에 전시디자인을 담당하였다. 그의 생각은 회화작품을 위한 프레임을 없애고 벽 자체로써 프레임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화랑의 벽을 목제 지주로써 길게 늘이거나 구부렸다. 이 화랑을 위한 구상에서 키슬러는 ‘18가지 기능을 가진 의자’를 고안해냈다. 그것은 어느 쪽이로든 설 수 있는 의자였는데, 테이블, 벤치 또는 발판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그즈음 그는 원소(元素), 인생, 우주 등과같은 현실의 여러 국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코리얼리즘(correalism)'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코리얼리즘 선언‘을 만들어 르 꼬르뷔지에와 더불어 바우하우스에 반기를 들고 유토피아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탁상공론의 건축은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어떤 탁상공론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기능처럼 유연한 건축물을 원한다.”
키슬러가 페기 구겐하임의 의뢰를 받고 ‘금세기 예술’ 화랑의 설계에 착수했다. 이 화랑을 디자인하면서 회화에서 액자를 떼내고 캔버스를 구부러진 벽면 앞에 버팀목으로 지지시켰다.
이 방법은 그가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서 시도한 ‘공간전시’기법과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고안한 L&T(Leger and Trager)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다. 나아가서 추상회화작품이 걸려 있는 곳에는 조각과 회화의 전시를 위해 천장에서 바닥까지 밧줄을 늘어뜨리고 그것을 이용해 작품을 공중에 매다는 전시기법을 보여주었다. 뒤샹이 ‘회화에’ 공간적 구조개념을 도입시켜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시도했다면, 키슬러는 ‘회화 그 자체’를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실천한 것이다.
1947년 그는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국제전의 계획을 감독했으며 그 자신이 <미신의 방>을 설계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예술통합 개념을 이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예술의 종체는 건축적인 필요성에 종속된다”라는 그로피우스나 빌라누에바의 생각과는 달리 키슬러는 시인의 참여 속에 이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통의 이념 하에 개최되었던 이 전시회는 시를 예술의 종합체 속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키슬러 역시 이러한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한 분야의 예술가가 아닌 건축가, 화가, 조각가 그룹이 창조한 집합적 예술작품에 시인 -테마를 산출한 장본인-이 참여한다면 조형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시야가 열려질 것이다.”
이 전시회의 설계는 키슬러의 천재성을 보여준 것으로서, 그의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53년, 필자는 골프 쥐앙에서 그와 함께 휴가를 보냈는데 그는 필자에게 ‘지평선상의 마천루’를 포함하여 일련의 야심적인 자신의 구상(構想)에 대한 스케치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마지막 계획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의 <명상의 동혈(洞穴)>)- 직후, 마그 화랑에서 펴낸 카탈로그『1947년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에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나서부터, 키슬러는 끊임없이 기능적 건축에 저항하여 ‘마술적 건축’의 원리를 주장했다. 이 마술적 건축이란 우리시대의 재료와 기술을 활용하는 건축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란 사실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1947년 키슬러는 앙드레 부르통(Andre Breton)의 기획으로 파리 매그 화랑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전의 <미신의 방>을 디자인했다. 이것을 계기로 발표한「마술적 건축」선언은 키슬러의 상호현실주의가 기능주의 비판에서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관한 제안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마술적 건축」선언의 일부이다.
19세기가 황혼속으로 저물어갔다. 그리고 20세기가 시작되고 25년간 건축, 회화, 조각의 통합 및 해체가 시도되었다. 르네상스는 이같은 통합 위에 번영했다. 사람들의 신념이 날개를 달고 다가올 세상에 행복을 운반한 것이다....(중략)...조형예술의 새로운 현실은 우리들의 오감(五感)에 수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의 상호관련에 의해 명확해질 수 있다...건축에 있어서 ‘근대기능주의’는 죽었다.
인간의 육체에 감추어져 있는 신체의 신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검증하지 않은 채 ‘기능’만을 유일한 생존자로 인식한다면 결국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른바 신비위생(神秘衛生) + 심미주의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바우하우스, 르 코르뷔제 등)
<미신의 방.은 우리의 시대에 걸맞는 표현방식인 ‘건축-회화-조각’을 목표로 한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그것으로해서 ‘건축-회화-조각’의 구성요소가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도록 변형시키는 것이다. 나는 ‘공간의 디자인’에 착목했다.
나는 화가 뒤샹, 에른스트, 마타, 미로, 탕기, 그리고 조각가 헤어와 마리아를 초대해서 내 플랜의 실현을 위한 동의를 구했다. 모두들 열심히 도와주었다. ...특정분야의 전문적인 예술가들의 모임이 아니라 건축가, 화가, 조각가를 하나로 묶은 그룹과 테마를 맡은 시인이 참여하여 창조된 공동제작은, 설사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난다 하더라도 조형예술 발전에 대단히 강력한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나는 위생(衛生)의 신비주의를 반대한다. 그것은 기능주의 건축이 신봉하는 일종의 미신과도 같은 것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마술적 건축’이 현실성을 띠는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축복받은 부분 또는 저주받은 부분 어느 한 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미신의 방>의 전시디자인을 통해 피력된 미술작품의 존재방식에 관한 제안은 이에 앞선 1942년 ‘금세기 예술’ 화랑의 <초현실주의자의 방>의 전시공간설계를 통해 집대성되었다. 또한 <미신의 방>을 설계한 1947년 3월 휴고 화랑에서 니콜라스 칼라스의 기획으로 열린 초현실주의 전람회 ‘피의 불꽃’전의 전시디자인에도 적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957년 아르망 바토스와 설립한 ‘키슬러 & 바토스(Kiesler & Bartos)사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월드 하우스‘ 화랑의 전시공간설계는 파티션의 설치나 작품감상용 집기 등 소프트웨어 디자인을 통한 전시환경조성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물론 미술관 건물 자체를 디자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시장의 실내공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디자인 대상으로 하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키슬러의 갤럭시 시리즈가 <미신의 방>을 필두로 하는 전시디자인 및 전시공간설계와 같이 개별적인 작품의 제작에 몰입한 결과물이 아니라, 작품에 의해 형성되는 공간의 양상에 주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내공간연출에 엔드리스 개념을 적용시킨 이 두가지 예는 전시디자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키슬러는 회화나 조각 등의 작품들이 상호연속관계를 지닐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의 엔드리스 개념이 공간의 연속성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 놓이는 물체들 사이의 연속성에 이르기까지 확대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체 상호간의 연속성을 키슬러는 ‘갤럭시(Galaxy)’라는 단어를 빌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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