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Ⅴ. 회화 - 조각 - 건축
키슬러는 자신의 만년에 해당하는 1956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 많은 조각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하여왔던 상호관련개념은 작가에게 거듭하여 좌절을 안겨준 건축보다는 회화나 조각에서 보다 실현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슬러는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15인의 미국인“전에서 <갤럭시 조각>을 발표하였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 마크 로드코(Mark Rothko), 윌리엄 바지오츠(William Baziotes) 등이 참가한 이 전시회에 당시 키슬러는 다리우스 밀하우드(Darius Milhaud)의 <애처로운 수부 Le Pauvre Matelot> 무대디자인을 위해 제작된 <갤럭시 조각>과 <19부분으로 된 갤럭시>를 발표하였다. 관객이 조각 안에 들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볼 수도 있는 작품으로 당시 키슬러의 동료들은 이 조각을 뉴욕 최초의 환경조각으로 인정하였으며 『라이프』지는 이것을 ‘살아있는 조각, 살 수 있는 조각’이라고 평했다.
이 작품은 후에 <프로메테우스의 잔>(1956-64)이라 불리게 되는데 키슬러는 자신의 일기라 할 수 있는 「엔드리스 하우스의 내면」의 ‘에필로그 IV: 조형예술의 상호현실주의(Epilogue IV : The Correalism of the Plastic Art)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조형예술이 스스로의 영역 속에서 서로가 상호관련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것은 진부한 전통이나 양심, 그리고 형식적인 우행이나 시장성이나 경리담당자의 지시에 의해 조형예술의 한계가 규정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과 함께 시작된다. 시인, 미술가, 건축가, 그리고 과학자는 우리의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새롭게 건립된 건물의 네 귀퉁이를 지지해주는 기둥역할을 한다”
키슬러가 생각한 조형예술이란 회화나 조각, 입체적 구성물에 국한하지않고건축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관련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전통적인 예술에서 물체는 그것이 회하든, 조각이든, 건축의 단편이든 결국 독립된 유니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한다. 인공의 것이든 자연의 부분이든 물리적으로 움직이면서 파악되는 시각현상에 의존해서 다각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기존의 세계로부터도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세계로부터도 순간적 연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 환경은 사물만큼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사물은 우리 인간과 같이 주위의 상황과 호흡하고 있다는 이유 이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자연물이든 예술작품이든 모든 사물은 환경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물체는 스스로가 환경이 될 수 있을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다.-1952년 근대미술관에서 전시된 내 작품<갤럭시 조각>을 보라.
이제 우리는 의식적으로 모든 물체로부터 좀더 중요한 환경으로 관심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각각의 분야를 상호 연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합적 목표를 설정하고 생활목적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지않으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는 유니트와 유니트 또는 움직임과 움직임이 각각 흩어져 무너지게 될 것이다. ”
<프로메테우스의 잔>은 본래 <불그릇>이라 불리었다. 키슬러는 이것을 “엔드리스의 불그릇”이라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엔드리스 하우스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엔드리스 조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이 작품은 <엔드리스 하우스> 오리지널 모델의 부분에서 출발한 것으로 산책 도중 발견한 판자를 이용한 ‘불의 용기’, 그 불의 용기에 어울리는 형태로 두드려만든 에로이즈‘,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이라고 하는 3개의 실내공간의 기호적인 요소에 대응하는 3개의 조각적 유니트를 위해 천정에 매달은 ’태아‘, 이 세 개의 유니트를 바라보기 위한 좌석용으로 알루미늄 주조로 만든 ’엑트플라므스‘ 즉 4개의 유니트로 이루어진 조각이다.
처음부터 키슬러는 정해진 내용에 다라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자신과의 대응관계 속에 필요한 유니트를 첨가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1978년 회고전에 발표된 <아치/무지개 조각>은 바닥에서 벽을 향해 연속되는 9개의 형태가 연결된 작품이다. 높이가 3미터를 넘기 때문에 관람객은 작품의 안쪽을 통과해 지나갈 수 있다. 또한 바닥과 벽이라는 별개의 공간이 이 조각작품에 의해 연결된다. 게다가 강력한 표현성을 지닌 유기적 형태를 띠고 있어서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전람회장의 한쪽 구석에는 벽에 붙여진 <갤럭시>가 있다.
이 작품은 흰색 종이 위에 그려진 여러 장의 회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화면의 배열이 공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것들은 조각작품을 연상시키는 목재 조인트로 연결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작품은 벽면과 평행을 이루지 않고 있고 각각의 다른 각도로 부착되어 있다. 키슬러는 회화형식을 빌리고 있으면서도 벽과 작품, 그리고 감상자 사이의 환경적 관련성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키슬러는 그의 일기에서 38) ‘갤럭시 회화’ 시리즈를 ‘고독한 회화’가 아니라 ‘가족이 있는 회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엔드리스’개념을 이같은 전시방법에도 적용시킨 것이다.
키슬러는 작품과 그것이 전시되는 공간의 상호관련을 통해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관한 의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으며 감상자와 예술작품의 상호관련을 의식했다. 이처럼 키슬러는 상호현실주의 개념에 입각한 전시디자인과 전시공간설계, 그리고 갤럭시 시리즈를 통해 작품과 감상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장력’을 컨트롤하는 데 작업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
물체 상호간의 연속성을 키슬러는 ‘갤럭시(Galaxy)’라는 단어를 빌어 설명했다. <갤럭시 초상>에서는 한 장의 종이에 신체의 각 유니트가 사이를 두고 그려져 있고, <갤럭시 조각>에서는 단일 작품을 구성하는 유니트와 유니트가 서로 떨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갤럭시’는 일정공간 상에 놓인 몇몇 유니트들의 관계를 지칭하는데, 하나의 유니트로부터 다른 유니트로 그리고 또다른 유니트로 연속되게 배치함으로써 각 유니트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통해 공간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57년 설계한 월드 하우스 화랑(World House Gallery)의 내부 공간구성에서도 <엔드리스 하우스>에서와 같이 곡면이 연속되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 전시되는 회화나 조각작품의 배치도 유니트들 사이의 연속성을 고려해 디자인했다. 이 모든 것이 엔드리스 개념에 입각해 디자인된 것이다.
그런데 이 <월드 하우스>화랑에서 실천된 엔드리스 개념은 연속된 곡면을 ㅁㅁ 실내공간의 연출 및 연속성을 고려한 작품배치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키슬러는 화랑을 방문하는 관객과 공간과의 관계 또는 관객과 작품과의 관계에도 엔드리스 개념을 적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가 주장한 엔드리스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주목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조각의 갤럭시가 제작될 무렵인 1947년부터 1949년까지키슬러는 평면으로 된 갤럭시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이브 탕기, 앙드레 브르통, 머스 커닝햄, 존 케이지, 한스 아르프, 마르셀 뒤샹 등 의 초상화였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갤럭시 회화는 사실 1918년 선보인 갤럭시 제작기법을 재시도한 것이다.
키슬러는는 갤럭시 회화에 대해 “혼자 살고 있는 독신남이나 미혼여성과는 달리 가족이 있는 회화이다” "이를 위해 유니트와 유니트 사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필요가 있다. 각 유니트 사이의 간격은 작품 전체의 성격을 걸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의 유니트를 다른 유니트에 가까이 둘 것인가 멀리 둘것인가, 또는 높게 할 것인가 낮게할 것인가가 갤럭시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만든 확장된 우주에 몰입하고자 하는 관객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장 아르프의 초상>을 한 장의 종이위에 연필로 그려져있지만 얼굴과, 자신의 부조를 들고 있는 손, 무릎부터 왼쪽발까지 오른쪽 발목 등이 그려져 있으나 나머지 부분은 생략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만 종이위에 그려져있고 각 유니트가 장력에 의해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마르셀 뒤샹의 갤럭시 초상>은 8개의 종이 패널위에 그려져 있는데 뒤샹의 얼굴, 와이셔츠의 깃과 넥타이, 손, 바지, 짝짝이 구두를 신은 발 등이 섬세한 연필로 묘사되어있다.
한편 <말의 갤럭시>는 말의 각 부분이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의 7장의 패널에 그려진 것인데 한 장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5장은 벽면에 부착되었으며 나머지 한 장은 바닥에 놓여졌다. 이 7장의 패널로 키슬러는 회화를 액자로부터 해방시켜 공간상에 연관되는 갤럭시를 실현한 것이다.
1954년 9월 27일부터 10월 19일까지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발표된 것으로 이 말의 갤럭시는 그의 만년에 제작된 거대한 말 조각 <뷰세활러스>를 통해 재시도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명마의 이름을 딴 이조각은 머리와 몸통, 다리가 6개 부분으로 나뉘고 커다란 몸통안에는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엉서 몸통안은 동굴과 같은 공간으로 안벽에는 문자나 말의 형상이 마치 석기시대의 인간이 그린 동굴벽화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갤럭시 초상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왕>은 종이 위에서 행해졌던 초상기법을 3차원의 공간에 재구성한 것이다.
키슬러의 마지막 작품 <우리, 너, 나 Us, You, Me>(1965)는 37개의 조각작품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길이 48피트, 폭 16피트 그리고 높이 40피트의 전시 공간 속에 각각의 유니트를 배치하도록 계획되었다.
“ 내 심장에 종이 울리고 있다. 작품의 규모나 표현상의 문제 등이 가능한 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조형물, 그것들로 가득찬 하나의 섬을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각각 다른 높이와 폭, 그리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된 소조들은 하나의 통일된 집합체를 이루면서 동시에 각 부분은 독립된 개체이기도 하다.
실내공간의 어떤 빈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서 한쪽 구석에 좌대를 놓고 그곳에 조각 작품을 올려 놓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같은 방식은 이미 먼 과거의 일이다. 그것들은 행복, 욕망, 놀이 등에 관해 아무런 보장도 해 주지 않는다.“
뉴욕의 화랑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화나 조각이 그에게는 단지 심미주의적 대상으로 밖에 비쳐지지않았으며 그것들이 단지 미적 대상일뿐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우리, 너, 나>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공간에 대한 의미부여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일상의 영웅>, <인간 승리의 문>, <구세주 자동차여!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파괴된 도시>, <다윗왕>, <외부공간으로 도망치는 사람> 등 37개의 조각들 각각의 유니트가 상호 관련되도록 배치되어 서구문명의 영향권하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인물들의 모습, 비행기의 연소장면 파괴된 도시 등의 이미지는 기술과 인간의 투쟁에 대한 알레고리를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전시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각각의 조각작품과 사상적인 대화를 나누게 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에서 탈피하여 상호관련을 맺기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