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베른린 국회의사당 - DER BEVOLKERUNG
1990년 분단되었던 조국(祖國, Vaterland)이 통일되었을 때 독일은 옛 수도 베를린-1871년 독일이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된 ‘독일제국’의 모습이 갖추어졌을 때 명실상부한 그들의 수도였던 곳-의 영광을 되찾는 일에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착수했다. 1991년 새로 구성된 전독일의회(全獨逸議會)에서 베를린 천도가 결정된 이후 이 작업은 10여년의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고, 1999년 국회가 베를린으로 옮겨졌을 때에도, 2000년 정식으로 본에서 베를린으로 모든 행정기구가 이사를 끝냈을 때에도 어떠한 요란한 국가적 행사도 동원되지 않았다.
그 사이, 즉 독일인들이 베를린을 새로운 수도로 가꾸는 동안, 그들은 강력했지만 그만큼 또 참혹하고 암울했던 이 도시의 역사를 어떻게 ‘재이미지화’할 수 있을까를 진정 고민하는 듯 보였다. 즉 그 도시의 강력했던 힘의 역사는 그대로 남겨둔 채(혹은 오히려 더 강화시키면서) 그 강력함이 결과적으로 동반했던 도시의 어두운 기억만은 가능한 한 속죄와 화해를 통해 희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색은 베를린 각지에서 다양하게 일어, 유대인학살에 대한 추모기념물(Berlin Mahnmal)을 세우려는 열띤 논의에서부터 기존의 건물들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일(1995년 크리스토에게 허용된 의사당건물의 포장작업도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19세기 극성을 부렸던 기념동상의 위치를 재배치하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882년 파울 발로트(Paul Wallot. 1841-1912)에 의해 설계된 제국주의 양식의 국회의사당 건물 내부를 현대적인 예술품으로 가득 채우려는 계획 또한 그러한 고민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이 계획을 위해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예술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당연하게도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z) 등의 작품이 선정되어, 각각 건물의 동쪽 입구, 서쪽 입구 그리고 의원들의 레스토랑 벽에 걸렸다. 거기에다 소위 ‘세계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수준의 작가로 프랑스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와 미국의 제니 홀쩌(Jenny Holzer) 등의 작품도 초대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모두 ‘세계수준의 현대미술’을 허용하고 흡수하는 이 건물의 너그러움에 동화되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작품만이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가 바로 한스 하케였다.
1998년 5월 예술자문위원회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세계수준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고 또 무엇보다 독일 출신의 작가인 한스 하케에게 작품 한 점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국회의사당의 북쪽 중정에 자리하도록 되어있었고 하케는 즉시 그 의뢰를 수락했다. 그리고 1999년 6월 하케는 자신의 계획서를 제출했다.
먼저 가로, 세로 21x7m의 크고 평평한 상자가 중정의 한가운데에 설치된다. 이 상자의 테두리는 로비니아 나무(Robinienholz: 시간이 지나면 산화되어 회색으로 보임)로 제작된다. 이 테두리의 한가운데에는 ‘DER BOVOLKERUNG’이라는 글씨가 땅에서 약 40cm 튀어나오게 설치된다. 이 글씨는 위를 향해 하얀 빛을 내뿜으며 글씨체는 목판인쇄체1)로 한다.
이 정원의 흙은 국회의원과 그들의 동료의 참여로 채워진다. 그들은 국회의원이 속한 지역구에서 흙을 담아와 붓게 되며, 토층의 높이는 참여한 의원들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이 다종(多種)의 흙에서 우연히 자란 식물들, 잡초들은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는다. 의사당측에서는 새로 국회의원이 선출되었을 때 이 작품의 참여적 성격을 잘 설명하고 그들 또한 이 작업에 참여할 기회를 준다. 이 때 흙의 양은 약 50kg이 되어야한다.
방문객을 위한 옥상의 유리난간 양쪽에 작가가 제작한 두 개의 설명판이 설치된다. 웹사이트에 이 작품의 내용과 기능, 관련자료 등이 글, 그림, 동영상으로 제공된다. 또 북쪽 중정의 건물 처마에 웹카메라가 설치되어 이 정원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상에 전송되고 기록으로 보존된다.
이상이 하케가 제출한 작품에 대한 기획안이다. 이로써 통상 잘 가꾸어진 자연물이나 작품의 품위에 맞는 예술품이 세워질 것으로 기대되는 건물의 중정은 그의 계획대로라면 ‘DER BEVOLKERUNG’이라는 흰색 네온글씨만으로 채워지게 된다. 게다가 그 글씨가 놓여지는 뜰에는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흙에서 자라난 잡초만이 무성하고 지저분하게 자라게 될 것이다. 이 공간은 주변 건물의 모든 층에서 보여지게 되고 무엇보다 의사당을 찾는 방문객의 공간인 옥상에서 극적으로 잘 보이도록 고안되었다. 나아가 건물 사용자들의 내부적 공간인 이 안뜰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공개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빛을 내뿜을 뿐인 이 문자작품이 설치되는 일이 그다지 쉽게 현실화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에 반대하는 많은 논리들이 작품의 미적 결여-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다는 것, 가꾸지 않은 잡초를 작품화한다는 사실-보다 더 심대한 ‘결점’을 공공연히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1)이 글씨체는 국회의사당 건물 정문의 박공에 새겨진 ‘DEM DEUTSCHEN VOLKE(독일 국민에게)’라는 글씨(1916년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가 도안한 것)의 서체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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