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I. 하케의 작품, 그의 전략
그렇다면 하케의 작품은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그다지도 강력하게 정치인들을 자극하고 과잉반응하게 했던 것일까?
1. ‘DER BEVOLKERUNG’-잊고 싶은 역사를 불러들이기
그들이 가장 싫어했던 단어 ‘DER BEVOLKERUNG’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Bevolkerung’이라는 단어는 독한사전에서는 통상 인구, 주민으로 해석된다. 즉 그냥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보통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3) 다시말해 그 자체로 이 단어는 전혀 정치적인 용어가 아니며 오히려 극단적으로 비정치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이 비정치적인 용어가 의사당건물의 정문 박공 헌사인 ‘DEM DEUTSCHEN VOLKE’와 같은 글씨체로 완전한 쌍을 이룬 채 건물 내부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이 용어에는 전혀 새로운 용법이 작동되기 시작한다.
이 건물은 1880년대 제국주의의 물결이 전유럽을 휩쓸고 그 물결의 진원지가 프랑스에서 독일로 서서히 넘어오는 시점에 건립되었다. 당시 귀족과 연합하면서도 새로운 시민계층의 요구와 소위 민중적 정서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알았던 빌헬름 1세는 급속한 국가발전의 주역으로, 진정한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가 그다지도 무모하게 외국에 대한 제국주의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보다도 그렇게 많은 민중들이 그를 지지하지만 않았다면 제1차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은 우매한 가정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비열한 정책에 대한 놀라운 지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그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새로운 인식, 소위 ‘국민의식’이었다. 즉 그를 지지했던 민중들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주입’된 중요한 인식은 그들이 살 길, 그들이 기대야 할 유일한 구심점이 이제는 ‘국가’와 ‘국민Volk’이라는 개념이었다.
빌헬름 1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빌헬름 2세는 1916년에 이르러서야 1894년 건물이 완성된 이후 22년이나 미루어온 의사당 정문에 대한 헌사 ‘dem deutsche Volke(독일 국민에게)’를 용인하였다. “1915년 전쟁놀이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질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나폴레옹 전쟁 때 약탈했던 대포 2개를 녹여 마음에 들지않는 글씨의 주물을 뜨는 데 사용했던 것(한스 하케)”이다.4) 즉 독일의 유명한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작가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미적으로 잘 디자인된 글씨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적 맥락-전쟁이데올로기 속에서 내부적 화해를 가장하는 도구, 나폴레옹부터 시작되는 권력국가간의 복수의 역사- 속에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이에서 끝없이 확장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1차대전의 패배이후에도 모종의 연결고리를 통해 되살아난다. 즉 1933년 이 건물의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공산당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완전히 국회를 장악한 히틀러의 등장, 그리고 그를 빌헬름1세 때보다 더 열렬히 지지했던 ‘Volk’의 존재는 이 건물을 둘러싼 역사와 연결되고 관계맺는다. 우연하게도 1916년 ‘dem deutschen Volke’라는 문구를 새기기 위해 주물작업을 했던 유대인 주물공의 두 아들은 모두 이 때 나치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한 명은 플렛첸제(Ploetzensee)에서 다른 한 명은 아우슈비츠(Auschwitz)에서. 그리고 이 때 113명의 의원들이 독일민중에 속하기를 거부당했고 75명은 감옥에서 죽었으며 8명은 자살했다(한스 하케).” 바로 그러한 잔인함을 정당화했던 히틀러가 자신의 정치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Volk’라는 단어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는 하케가 직접 인용한대로, 1935년 베르톨트 브레흐트(Bertholt Brecht)의 “진실을 쓰는 다섯가지 어려움”에서 암시된다. “우리 시대에 ‘Volk’대신 ‘Bevolkerung’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많은 거짓을 부정하는 것이다.”5)
‘dem deutschen Volke’에서 ‘독일’을 삭제하고, ‘Volk’에서 차용되고 기원하였으나 그 의미가 비정치화되어가는 ‘Bevolkeru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박공헌사에 대한 역사를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들인다. 독일 특유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다른 조건, 매우 오래된 과정을 통해 형성된 ‘Volk’라는 단어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하케는 오랫동안 그 단어에 덧붙여진 ‘신비’를 벗겨내기를 원했고 또 그 신비가 함축한 극단적인 자국민중심주의, 비민주성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케는 F.A.Z.에 의해 소소한 재미거리로 밝혀졌지만 전혀 기억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dem deutschen Volke’의 주물공의 두 아들이 나치에 의해 학살된 사실-을 다시 끄집어내고 유포시킨다(작품의 설치여부가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되고 언론의 관심거리가 됨으로써 이 역사는 물론 더 효과적으로 유포된다).
또한 그의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말해주듯이 현재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독일 사회, 정치, 일상생활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국가이데올로기(자국민중심주의, 외국인차별정책, 인종적 폭력 등등)의 권력에 대해 감추지 않고 말하게 하고 또 토론하게 한다. 결국 이 토론에 참가한 국회의원들이 외국인, 무산계층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선입견이 그들이 추진하는 정책에 어떻게 반영될지, 그들이 얼마나 국가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지 혹은 거리를 두고 있는지 등의 사실이 이 토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것이다.
3) 이 용어에는 또한 ‘Volk(국민)’의 ‘견고한 집단’의 의미보다 ‘그렇게 되는 과정’의 뉘앙스가 더 강조되고 있다. 한편 여성명사 ‘Bevolkerung' 앞에 ’der'를 덧붙이면 ‘~에게’의 의미이다.
4)Haacke, Hans, “Wem gehort das Volk?. Interview mit Matthias Flugge und Michael Freitag”, In: Neue bildende Kunst, Nr. 7 (Dez. 1999).
|